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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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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Apr 29. 2023

절이고 삭히고 말리고

소박한 찬

하기 싫은

숙제를 30여 년이나 한 걸 보면 바른 생활자임에 틀림없다. 이고, 뭐 간혹 '배 째라'는 날도 있긴 했지만 어지간하면 지 않았으니 인정할 부분이다. 한때 친절한 이웃이 어찌나 숙제를 성실하게 하는지 안 해도 될 숙제까지 기꺼이 따라한 적도 있다. 지금은 다시 백도(back도)를 외치며 뒤로 한 칸 물러난 상태지만 숙제는 여전하다.


이웃은

음식 만들기에 인색한 나에게 좀 더 관대한 감정선을 가질 수 있도록 범대중적 식재료의 고유한 레시피를 공유해 준 분이었다.



오래전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깻잎이랑 오이를 넣은 김밥과 바로 무친 겉절이, 마늘장아찌를 곁들여 점심 초대를 한 적 있었다. '서진이네'라는 프로그램에서 깻잎 위에 오이와 당근이 듬뿍 올라간 김밥을 보니 이웃이 떠올랐다. 푸짐하게 말아낸 유미표 김밥은 새천년이 밝았을 무렵 이웃이 대접한 것과 데칼코마니여서 그런가  닮은 군침이 저절로 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밥의 초록은 시금치가 선도했다. 적어도 나에게 시금치 대신 오이를 배치한 김밥은 선풍적이면서도 독특 미장센이었다. 깻잎 향과 오도독한 오이, 당근이 어우러진 김밥은 가벼우면서도 깊은  묻어났. 먹기는 간단하지만 제법 손 가는 음식이라 주방 앞에서 바삐 뚝딱거렸을 이웃을 생각하니 몹시도 황송했다.


고마운

마음이었으마늘장아찌에는 대기가 찜찜했다. 알싸한 향을 빼면 100가지가 이롭대서 일해백리一害百利라는데 일해의 강한 향을 들이고 싶지 않던 입맛은 백리까지 도외시하고야 말았다. 


기원전 

2500년 경 이집트 피라미드 벽면에 마늘을 나눠주는 벽화가 남았을 정도로 오래되고 유용한 슈퍼푸드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향이라 손대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두 번 세 번 권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거절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머릿속으로 눈알을 굴리며 가장 작은 마늘장아찌를 찾아 헤맸다. 아주 작은놈으로 골라 입에 넣고는 알약 넘기통째로 삼켰다. 어떠냐고 묻기에 정말 맛있다 하니 김밥 위에 올려 먹으면 더 맛있다고 직접 올려주셨다. 차려주신 성의에 말도 못 하고 어쩔 도리가 없어 미감에 날 스크래치를 불사하고 와샤삭 씹는 순간  '이런 맛 처음이야'를 느꼈다. 새콤하면서 달콤하고 간도 적당한 게 아삭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는 이었다. 제대로 갈리지 않은 굵은 마늘이 어쩌다 음식에서 씹힐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껍질 깐  망고스틴을 닮은 하얀 알갱이가 아삭아삭 씹힐 때면 새로 난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마늘장아찌랑 매실농축액, 오이지, 고추 절임, 과일청 같은 저장 음식 따라 하기에 적극 호기심을 갖고 덤볐다.


어릴 적 

엄마가 보리막장(메줏가루에 보리밥과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강원도식 별미장)에  무를 채 썰어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쳐준 것 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건만 이웃이 나를 저장 음식의 도그마에 빠뜨려 꼼짝 못 하게 만들다. 마늘을 까느라 손끝이 아리고, 매실을 씻어 말리느라 분주해저장 음식의 매력에 반해 스스로 열정을 키웠다. 오이지에 도전장을 내민 후로는 넓적한 돌만 보면 회까닥 눈이 뒤집혀 환장하던 시절도 있었다.


나트륨

섭취가 과하다, 설탕 투성이다 말도 많고 도 많지만 전통에 뿌리를 둔 저장식품은 여전히 우리 식탁을 오르내리며 상큼한 식사를 돕는 중이다. 요즘은 저장이 목적이 아니니 염도나 당도를 낮춰 건강식으로 컴백하여 저장 음식의 어감을 유지하고 있다. 매실액은 소화를 돕고 꼬들꼬들한 오이지무침은 입맛 돋우는 공신이다. 말린 채소는 생채소보다 단백질, 식이섬유, 비타민 등의 함량이 높기도 하지만 본래 가진 향과 맛도 훨씬 진하다. 기름에 달달 볶은 시래기는 얼마나 맛있게요(빅마마 아줌니 버전). 


사냥을 하고,

열매를 채집하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길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 파생된 갖가지 저장 방법.

훈제, 염장, 초절임, 당절임, 말린 채소 등 보관 방법도 다양하지만 재료도 무궁무진했다고 한다. 고려중엽의 ‘동국이상국집’이나 조선시대 ‘농가월령가’에는 장아찌를 예찬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단다.


요즘은

농법이 발전되어 제철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그래도 제철에 구입하는 식재료가 경제적이다. 제철 갈무리해 둔 음식과 오이, 당근 담뿍 넣어 말아낸 김밥으로 미안했던 사람, 보고 싶은 사람에게 한 끼 대접한다면 녹수가 한번 웃어준 연산의 마음으로 고마워하지 않을까?


오늘 저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갓 지은 밥에 지나 계절을 올려 먹는다면 좁쌀만 한 설유두에서 종소리가 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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