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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Dec 28. 2022

화석이 된 콩나물국

살아도 살아있지 않을 때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쌀이 떨어져 아침도 굶고 출근한 아내를 위해 쌀은 겨우 구했으나 반찬일랑은 마련하지 못한 실직 가장이 밥과 간장 한 종지로 차린 밥상에 미안한 마음으로 써 놓은 한 줄 쪽지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진실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은 세 부부의 일화를 옴니버스로 구성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 중 첫 번째 부부의 이야기다.




간혹 등장하는 남편의 이야기 목록 중 하나여서

'그때 그랬나?'

하는 지 오래 전 일이라 처음엔 가물가물했다. 


결혼 후 첫 밥상에 콩나물국이 올라왔단다. 맛있다는 한마디에  일주일 내내 콩나물국만 끓이더란다. 황태로 우려낸 육수에 파송송 계란 탁 얹은 삼삼한 콩나물국은 언감생심.

맹물에 콩나물 넣고 소금 간만 했을 테니 맨송맨송 덜떨어진 맛이었을 것이다. 음식 가리지 않고 반찬 투정 일절 없는 타입이라 게슴츠레한 콩나물국이었지만 스님 발우 공양하듯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뚝딱 해치웠을 사람이다. 더구나 사랑의 콩깍지가 신선도 최상일 때니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콩나물국'만 있어도 수랏상이려니 했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곳적 콩나물국을 느닷없이 중추신경에서 불러내다니 처음엔 다른 부부 얘긴가 했다.


주머니 속 꼭지각에 낀 먼지 빼내듯 해묵은 콩나물국 얘기를 이제 와 꺼내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세월 지나 콩깍지는 화석이 된 지 오래고 다양한 음식에 노출된 혀는 부르주아 반열에 오르다 보니 그 옛날 어설픈 콩나물국을 규탄이라도 겠다는 건가? 

나 원 참!


일주일 동안 콩나물국만 내놨을지언정 당시로써는 초려 끝에 차린 밥상이 확실하므로 성의를 생략한 밥상으로 왜곡하는 것은 서운한 일이다. 맛있다는 한마디에 신혼의 새댁이 최선을 다해 끓이고 또 끓였을 테니 '일주일 내내'에 포인트를 두기보다 따뜻한 국이 있는 밥상을 마련했다는데 고마움을 간직해줘야 하지 않허요?


의미는 다르지만 고심 끝에 정성껏 차린  밥상이란 점에선  "왕후의 밥 걸인의 찬"과  맞먹지 않을까 감히 견주어 본다. 신혼 첫 밥상에 대한 남편의 회억을 어지럽힌 건 안타깝지만 이제 와서 어찌허요?



변변치 못한 콩나물국이 '일주일 내내' 라는 꼬리표 달고 오랜 기억을 따라온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애정과 불만 사이 어정쩡하게 자리했지만 '그때 그랬었지'로 아있 건 우리 젊은 날이 빠듯하긴 했어도 구김살은 없었다는 의미와 같다. 남편도 서툰 콩나물국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후다닥 지나간 시간이 아쉬워서 들춰내는 것일 다. 서운하네 안타깝네 이죽거리지만 그 마음 모를 리 없다.


때때로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기쁨, 설움, 애정, 서운, 열망, 안온과 같은 감정들이 일렁이지 않을 때가 그렇다. 마음에서 야금야금 꺼내볼 수 있는 젊은 날의 콩나물국은 애정과 아량이 숨쉬던 부족한 시절의 삽화 중 한 페이지로 남아 파리한 감정에 핏기를 돌게 하는 선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에혀라!

저녁에는 '원조 콩나물국밥', '전주 콩나물국밥', '할머니 콩나물국밥' 다 나와도 쨉이 안 될 그럴듯한 콩나물국밥이나 끓여내겠다.

눈알이 안경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겁나 맛있는 


"인생 콩나물국밥 대령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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