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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이 동하다 Mar 25. 2022

커피믹스와 아메리카노 사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언덕 위 한 목동이 있고 그 주변에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염소들이 갑자기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늑대라도 나타난 듯이. 목동은 다가가서 염소가 먹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색 열매였다. 그렇다면 이 열매와 잎사귀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염소들이 그토록 흥분한 것일까? 목동은 궁금해졌다. 붉은 열매를 먹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상쾌해졌다. 졸음이 사라졌고 피곤함이 없어졌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커피의 기원, 즉 7세기 에티오피아의 칼디의 설이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색 열매.




    평범한 출근, 직장 내 직원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양치를 한 후 사무실로 들어와 종이컵을 꺼낸다. 테이블 위 커피박스에 손을 넣고 커피믹스를 하나 꺼낸다. 왼손엔 종이컵, 오른손엔 믹스 끝을 잡고 정수기로 향한다. 늘 그렇듯이 커피믹스 안에 내용물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기 위해 반대쪽 끝을 잡고 흔든다. 엄지와 검지로 끝을 잡고 손목스냅을 이용해 하나, 둘 흔들어준다. 그 순간 놀랄일이 일어난다. 초록색 자르는 선 부분의 끝만 내 손에 남겨진 채 커피를 담은 내용물이 공중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이 순간만큼은 슬로우비디오다. 2초가 2분처럼 느껴지는 순간. 커피믹스가 공중에서 몇 바퀴의 공중회전을 하고 나서야 바닥으로 착지한다. 분말이 상대적으로 작은 설탕과 프리마는 하얀 눈꽃처럼 흩날리며 떨어졌고, 입자가 굵은 커피는 무게감 있게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색 열매.




    이날 난 고객대기실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커피믹스 내용물들을 치우느라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물티슈와 휴지 그리고 막대걸레까지 동원했다. 마지막에 물티슈로 한 번 더 정리하고 있는데, 마침 일찍 출근하신 병원장님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한마디 건넨다. ‘김팀장 아직도 믹스? 이제 갈아탈 때 된 거 같은데’ 유유히 본인의 방으로 들어가신다. 바로 그 옆방에 내 사무실이라 아침의 우연한 마주침은 낯설지 않다.



    77년생인 나는 커피믹스와 아메리카노를 모두 겪으며 지내고 있는 세대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첫 직장에서는 커피, 프리마, 설탕이 각기 다른 병에 담겨 취향에 따라 스푼에 양을 조절하며 커피를 마셨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간단한 커피믹스지만 취향에 따라 빨간색, 노란색 그리고 하얀색까지 원하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커피믹스 그대로이다. 다만 주위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출근길 지하철 계단을 올라온 직원들은 곧장 커피매장으로 들어간다. 미리 앱으로 주문한 직원은 바로 한손에 크고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들고 나온다. 계절에 따라 하얀색 종이컵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젊은 직원들은 그렇게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종이컵 절반정도 양의 커피믹스 한잔과 500ml가 넘는 벤티 사이즈의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단순히 양의 차이만이 아닐 것이다. 지극히 개인 취향 차이다. 뜨거운 물에 숟가락을 저어가며 믹싱하고 후~ 불면서 ‘후루룩’ 소리를 내고 한입 들이키면 입 안 가득 커피향이 퍼진다. 달콤함이 전해진다. 약간의 텁텁함이 있지만 그 텁텁함은 또 하나의 묘미다. 아메리카노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얘기가 깔끔함이니, 이젠 커피믹스의 텁텁함을 받아들여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일 때 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에스프레소, 모카포트, 핸드드립, 프렌치프레소, 홀빈 등 용어도 어렵다. 그 차이를 구분하기란 더 힘들다. 아메리카노, 라떼, 모카, 마키아또, 프라페 등등 너무나도 다양한 상품이 어쩜 나를 커피믹스에 오랫동안 붙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취향에 고하를 나누고 같은 취향을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취향의 차이는 우열의 증거가 아니며, 강요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_김수현《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마음의숲)


    취향에 높고 낮음이 없고, 취향의 차이가 우와 열이 아니니 강요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더욱더 우리는 타인에 대한 미적 취향에 너그러워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특히 오늘날에 온통 알고리즘으로 취향마저 같아버린 시대, 평균치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시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고집하며 커피만큼은 커피믹스를 고수해본다.



가만히 식단표를 보니
오늘 점심메뉴는 쫄면,
매콤한 쫄면 뒤에
달달한 커피믹스 한잔~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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