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밖에 비가 오는 걸 알아챘다. 빗방울의 굵기는 그리 굵지 않았다. 우산 없이 손으로 살짝 이마 정도만 가려도 될 만큼의 보슬비였다. 오후 4시 회의를 감안하면 오늘 점심때 밖에서 사진 한 장은 건져야 했다. 우산도 없이 기어이 건너편 아파트 정원으로 향했다.
입구에 오랜만에 빨간 장미가 눈에 띄었다. 선홍빛 장미는 한겨울 동백의 짙은 빨강과는 또 다른 색감을 나타냈다. 장미꽃의 결을 따라 빗방울들이 촉촉이 묻어 있었고, 일단 사진을 찍고 자리를 이동했다.
손으로 막기엔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자 서둘러 아파트 내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두 개의 벤치가 있고 그 위엔 투명 아크릴인지 유리인지 모를 덮개가 있었다. 덮개 너머엔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의 형태가 비와 함께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 오늘은 이거다!’
찰칵.
투명한 지붕위 내려앉는 기상
나무의 숨결이 물결처럼 형상
적막한 거리에 말이없이 감상
흩어진 구름에 마음까지 인상
고요한 오후엔 바람조차 정상
물방울 맺혀진 유리창은 현상
비 그치면 여름이 올 걸 예상
머무른 풍경에 남겨지는 잔상
투명한 지붕 위로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오늘의 기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물에 젖은 잎사귀를 통해 제각기 다른 형상을 그리고 있었고, 나는 점심시간의 고요한 틈에서 그 모든 움직임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본 흐린 하늘과 유리창 너머의 세계는 이상하게 마음 깊숙이 인상을 남겼고, 이 잔잔한 풍경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바람은 일정하게 불었고, 자연은 아무 일 없는 듯 정상의 리듬을 지키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은,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을 그대로 붙잡아두려는 듯한 현상처럼 느껴졌고, 머지않아 이 비가 그치면 곧 더운 여름이 올 거라는 예감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사라질, 그러나 내 안에 오래도록 남을 잔상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