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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137화 - 머무른 풍경에 남겨지는 잔[상]

by 마음이 동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밖에 비가 오는 걸 알아챘다. 빗방울의 굵기는 그리 굵지 않았다. 우산 없이 손으로 살짝 이마 정도만 가려도 될 만큼의 보슬비였다. 오후 4시 회의를 감안하면 오늘 점심때 밖에서 사진 한 장은 건져야 했다. 우산도 없이 기어이 건너편 아파트 정원으로 향했다.


입구에 오랜만에 빨간 장미가 눈에 띄었다. 선홍빛 장미는 한겨울 동백의 짙은 빨강과는 또 다른 색감을 나타냈다. 장미꽃의 결을 따라 빗방울들이 촉촉이 묻어 있었고, 일단 사진을 찍고 자리를 이동했다.


손으로 막기엔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자 서둘러 아파트 내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두 개의 벤치가 있고 그 위엔 투명 아크릴인지 유리인지 모를 덮개가 있었다. 덮개 너머엔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의 형태가 비와 함께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 오늘은 이거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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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지붕위 내려앉는 기

나무의 숨결이 물결처럼 형

적막한 거리에 말이없이 감

흩어진 구름에 마음까지 인

고요한 오후엔 바람조차 정

물방울 맺혀진 유리창은 현

비 그치면 여름이 올 걸 예

머무른 풍경에 남겨지는 잔


투명한 지붕 위로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오늘의 기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물에 젖은 잎사귀를 통해 제각기 다른 형상을 그리고 있었고, 나는 점심시간의 고요한 틈에서 그 모든 움직임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다. 말없이 바라본 흐린 하늘과 유리창 너머의 세계는 이상하게 마음 깊숙이 인상을 남겼고, 이 잔잔한 풍경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 살고 있었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바람은 일정하게 불었고, 자연은 아무 일 없는 듯 정상의 리듬을 지키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은,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을 그대로 붙잡아두려는 듯한 현상처럼 느껴졌고, 머지않아 이 비가 그치면 곧 더운 여름이 올 거라는 예감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사라질, 그러나 내 안에 오래도록 남을 잔상이 될 것 같았다.



137[꾸미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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