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아트한스푼
햇살 좋은 날 보트위에 잘 차려진 식탁, 그 한 순간. 행복한들뜸과 작은 소란스러움들이 반짝거린다.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 이들은 무엇을 먹으며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르누아르의 그림은 늘 행복과 기쁨의 빛으로 반짝인다. 가난했던 그는 부르주아의 일상을 동경했고, 자신이 존재하고 싶던 풍요로운 순간의 행복한 모습을 그렸다. 그에게 그림은 행복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는 어려웠던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했던 지인들을 이 반짝이는 행복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했다.
하지만, 이 그림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한 사람, 나는 종종 SNS에 올라오는 '아는' 사람들의 즐거운 순간들을 외면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 반짝이는 행복함 그 어디에도 나는 속할 수 없다는 심정이 되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나에게도 어쩌다 한번씩 생기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함께 사진이 찍힐 때가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쩌면 그저 행복해 보일 지 모를 그런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언제나 즐거움만 있지 않다는 것이 함정이다.
씹고 즐기고 맛보기
음식이 준비되어 오기까지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도축을 하고, 때로는 닭이 낳은 계란을 스틸하기도 한다. 과일이나 채소, 곡물을 기르고 수확해서 포장하고 배달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우리는 세련되게 잘 포장된 죽은 것들을 아니, 죽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행복한 만찬에 부족할지 모를 비용만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다른 생명에게 알게 모르게 직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나는 때때로 참기가 어려워질 때가 있다. 단지 음식이 준비되어 오는 과정,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뿐만이 아니라, 공격과 억압, 혐오와 분노, 서운함과 억울함같은 크고 작은 감정적인 폭력들은 우리의 만남 속에서도 늘상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림 안 인물들의 시선이 각기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까. 좋은 의도로든 혹은 그 반대로든 각기 다른 시선 사이에는 은밀한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존재한다. 비싼 레스토랑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은 우아하게 펼쳐지지만. 누군가가 죽인 동물들로부터, 누군가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온 것이다. 감탄하며 입으로 음식을 씹고 맛보고 즐기는 동안, 우리는 입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도 함께 씹고 맛보며 즐긴다.
인간을 고깃덩어리처럼 그리는 영국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런 말을 한다.
“비평가들은 내 그림을 두고 ‘공포’를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작품이 특별히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 그림을 두고 ‘공포’를 말하는 비평은 고기를 즐겨 먹으면서도 투우가 잔인하다고 항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자신의 몸 위에 모피와 새털을 두르고 투우장에 입장해 투우의 잔인성에 대해 항의하는 격이지요.” -프란시스 베이컨
이 모순된 양극단의 세상 가운데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문득 인지 되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혼란과 환멸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기꺼이 뻔뻔해질 수 있어야 한다. 뻔뻔하고 FunFun하게, 씹고 뜯고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삶이 가진 이 부조리함을 음미하며 부드럽게 소화시켜낼 수 있어야 비로서 한 인간으로써의 삶을 즐겁고 가볍게,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