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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la J Oct 30. 2022

단상: 잘못된 거울

feat. 잘못된 거울, 르네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The False Mirror, 1928


하늘을 본다. 탁 트인 푸른 하늘은 언제나 시원하다. 생각이 막혀있을 때, 답답함을 느낄 때 나는 곧잘 하늘을 올려다 보며 큰 숨을 내쉬곤 한다.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침묵하고 있다. 하얀 구름이 떠간다. 구름은 하트도 되었다가, 곰도 되었다가, 고양이도 되곤 한다. 다양한 형태가 연결되며 상상의 나래를....



시각은 이렇듯 지각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감각정보의 60~80%는 시각이 차지한다. 사람은 물체를 눈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사고를 한다. 즉, 본다는 것은 지각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 마그리트의 잘못된 거울에서 눈은 적극적으로 본다기보다 수동적으로 반사하는 거울의 기능으로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 존 버거는 그의 책 ways of seeing 에서 시각적 상호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본다는 행위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행위 이며 따라서 어떤 물건을 볼 때 그 물건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관계를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행위는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상호작용을 한다. 구름을 보며 내가 고양이를 떠올리듯이 말이다.


최근의 사회는 그야말로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미지 정보가 넘쳐나다 보니 보는 행위가 과연 의미 있는 지각경험으로까지 충분히 이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보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망연히 잡아두려 애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이… 없어졌다.



언젠가부터 내 눈은 단지 거울의 기능만을 하고 있었는지도...




그러니까… 잘못된 거울.






성숙: 순간을 머금으며 익어가는 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그것이 나를, 또 내 삶을 정의 하는 문장이었다. 언제나 나에게 시간은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잡으려고 애를 써도 잡을 수 없었고 채우려고 애를 써도 채울 수 없었던 것. ‘나의 시간’을 채워가며 형성되었어야 했을 ‘나의 삶’은 지금 과연 존재하고 있나? 만약 ‘나의 삶’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무엇인 걸까? 나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걸까? 형태가 없는 삶. 내용이 없는 삶. 그 어디에서 무엇으로도 존재할 수 없었던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은 인간의 삶을 구성해간다. 세상에 육체가 던져지는 순간부터  존재에게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에게 시간은 동일한 양으로 주어지는 걸까? 인간에게 주어진 24시간은 임의로 정해진 규칙인가? 자연의 법칙인가?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에 대한 개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각되고 적용되는가? 아니면 각자의 뇌에서 각기 다르게 지각되는 현상일 뿐인가?  


한병철에 따르면 시간은 간격으로 이해되며,  시간적 간격은  개의 상태, 또는  개의 사건 사이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선형적 시간개념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는 현재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라는 것은 무엇 인가.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은 적이 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생각들은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나의 생각들은 과거의 잘못, 행동, 기억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내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의심,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순간에 존재하며  순간에 해야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던 순간이었다.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들이 지속될   연속성에 의해 보이지 않던 시간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24시간은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른 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어진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지 않나.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세계에 띄우는 애정 어린 편지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의 사람들은 연속성이 없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그저’ 재핑하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특정한 공전궤도 없이 원자화된 시간이 결국 허공 속으로 흩어지며 소멸되어버리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연속적인 경험으로 쌓이지 못하는 채로 소멸되어 버리는 시간을 가진 존재는, 그러므로 내용물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해진다. 껍데기만 있는 나를 과연 나라고 말할  있을까? 순간들을 머금고 흡수시키며 내용물이 만들어질  나는 비로서 실재의 나로 존재하게 된다.  물질적인 몸의 오감을 통해(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경험되고 지각된 정보는  안으로 천천히(뇌를 통해)흡수되어 걸러지고 소화되고 해석되며 하나의 형태로 통합된다. 그것들이 촘촘히 쌓여나갈  비로서 진짜 경험을 했다라고 말할  있게 된다.


이 진짜의 경험들이 나를 구성해갈 때 존재는 성장한다. 90권이나 되는 책을 쓰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작가인 톨스토이는 인간실존의 기본 조건을 성장에서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성장은 자기의식에 집중, 몰입함으로써 가능해지고, 성장을 통해 자아를 해방시킬 수가 있으며, 자아를 해방함으로써 결국 세상과 교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식에 집중, 몰입한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있어 쉬운 일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정보들, 혹시라도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나 않을까,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 결국 두려움에 의해 촉발되는 조급함이라는 감정은 끊임없이 시간을 붙잡으려 애를 쓰게 되는 동기가 된다. 하지만 시간을 붙잡으려 할 수록 시간은 달아나버린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는 결국 시간 안에 머무르는 전략을 써야 한다. 시간 속에 머무르며 방향성이 있는 정보들을 머금고 흡수시키는 시간이 바로 한병철이 말하는 사색의 시간일 것이며,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의 순간일 것이며, 수많은 명상가들이 말하는 순간에 존재하는 바로 그 시간일 것이다. 이렇게 머금는 시간들이 흡수되며 소화될 때 나의 의식은 비로서 성장한다.


시간은 육체와 함께 주어졌고, 시간을 통해 나의 삶은 형성된다.  인생의 주기란 탄생과 성장과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장이다. 탄생은 내가 원해서  것이 아니지만, 성장의 과정은 나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존재는 성장하거나 퇴보하거나 유지하거나  세가지 상태  하나로 존재할  밖에 없다. 그러므로어떤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성장이 낫지 않겠는가.


결국 제때에 잘 소멸하기 위해 나는 하나의 완성된 인생으로 잘 성장해 나가야 한다. 잘 성장한다는 것은 그 내용이 충실하다는 말이다. 내용이 충실하다는 것은 앞서 말한 연속된 시간들이 켜켜히 잘 쌓여간다는 것이다. 켜켜히 쌓이는 시간은 순간을 머금고 소화시키는 바로 그 과정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머금으며 흡수하는 시간,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릴  있어야  빠진 나의  아래로 잡초들이 깨진 밑을 감싸며 결국 나의 시간들이 차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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