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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클루니 Dec 01. 2024

17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길

용서는 가족을 유지하는 열쇠다.

용서하지 못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 버락 오바마 -


징검다리를 자처했던 성가대 단장으로서 '요한의 집' 후원 기금 마련 발표회를 무사히 마쳤고, 후임 단장도 훌륭한 후배로 새로 선출되었다. 1년 동안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발표회가 끝난 지 일주일 후, 결혼에 반대하시던 여자친구 부모님께서 뜻밖에 허락을 해주셨다. 마치 하늘의 선물 같았다.


하지만 상견례 준비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아버지가 결혼식에 어머니의 참석을 강하게 반대하신 것이다.

“둘 중 한 사람만 결혼식에 올 수 있다. 상견례도 큰어머니를 모시고 해야 한다.”

부모님 두 분과 함께 행복한 결혼식을 꿈꿨던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지만, 완강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아버지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 인연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 없이 큰어머니를 모시고 반쪽짜리 결혼식을 할 것인가.


예비 장인, 장모님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셨고, 결혼에 대해 더욱 탐탁지 않아 하셨다. 여자친구 역시 중간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가정을 이루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상황을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했고, 2006년 3월, 성당에서 아버지와 큰어머니만 모시고 힘든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화성 발안의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며 둘만의 행복을 누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새 생명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큰 기쁨과 책임감이 교차했다. 그 무렵 지방 근무를 마치고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회장님 의전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고민했다. 회사 근처 광화문을 선호했지만, 처형이 서로 의지하며 살자고 했다. 결국 처갓집과 가까운 문래동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내는 임신 중 입덧이 심하고 유산 위험까지 여러 차례 겪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처형은 기간제 교사 일을 시작하며 4살 조카를 아내에게 맡겼다.


아내는 나와 상의도 없이 조카를 돌보겠다고 했다. 조카를 돌봐주지 않으면 군산 본가로 보내야 한다는 처형의 말에 쉽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임신 중 아내의 건강을 걱정했던 나는 반대했지만, 아내는 결국 출산 열흘 전까지 울며 조카를 돌봐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딸을 낳았다. 결혼한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태어난 딸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작은 손과 발, 귀여운 얼굴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을 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새벽 출근과 밤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는 일이 쉽지 않았고, 주중에는 각방을 쓰는 생활이 이어졌다.


처형은 출산 후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필요한 시기에 서울 집값을 핑계로 남양주 마석으로 이사를 갔다.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그 결정은 더 큰 부담이 되었다. 이후 처형은 아내에게 남양주에서 함께 살자고 계속 권유했다. 나는 반대했지만, 양육에 도움을 주지 못한 터라 아내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남양주로 이사를 결정하면서 아내가 다시는 조카를 돌보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은 서울 강동에서 미술학원을 인수하며 아내를 동업자로 끌어들였다. 아내는 돌도 안 된 딸을 업고 학원을 도와야 했고, 나는 더 긴 출퇴근 시간을 견뎌야 했다. 결국 몇 번의 다툼 끝에 아내는 학원 동업을 그만두었다.


처형은 학원이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터키로 이민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남양주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자던 처형이, 막상 이사 온 뒤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처형네는 터키 이민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서울에서 손위 형님을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솔직히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가 유산 위험 속에서도 조카를 돌봐야 했던 일, 그로 인해 우리 부부가 다투었던 일, 그리고 처형의 미술학원 동업 부탁등이 힘들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형님의 반응은 어이없었다.

“군산 본가에 딸을 맡길 수도 있었는데, 처제가 조카를 좋아해서 키워준 거잖아.”

그 이기적인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대화가 끝날 무렵, 형님은 웃으며 나에게 터키로 함께 이민 가자고 말했다. 순간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결국 처형네는 터키 이민을 준비하며 급히 떠났고, 집과 짐을 정리하는 일은 장인어른과 내 몫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장모님의 차별 때문임을 깨달았다. 맏딸에게 지나치게 잘해주었던 장모님의 태도가 처형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반대로 아내는 항상 가족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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