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
우리의 과거가 우리를 정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시 정의해 나갈 수 있다.
- R.M. 드레이크 -
노량진에서 시험 준비할 때,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매주 성당에 가는 시간이었다. 성당에서 성가대를 하고 청년 연합회장도 맡으면서 선후배들이랑 친해졌고, 그중 한 후배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예중과 예고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도 나왔고, 집안도 잘 사는 친구라 부담스러웠다. '왜 이런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계속 용기 내서 표현해 줘서 결국은 사귀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복수 전공을 시작했다가 IMF 여파로 대학 등록금을 늦게 내는 바람에 4학년 때 제적을 당했다. 그 뒤로 자신감이 많이 낮아졌다. 특히 연애를 할 때 더 조심스럽고 소극적이 된 것 같다. 내가 먼저 좋아하기보다는, 누군가 나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면 그때서야 만나볼까 고민하게 됐다. 그때도 그 후배가 적극적으로 다가와 줘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어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국내 은행 부행장으로 일하셨고 금융권 인맥도 두터운 분이라고 들었다. 친언니는 예중과 예고를 나오고 서울대를 졸업한 뒤 교수로 일하다가 외국인과 사귀게 되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그 친구에게 더 많은 기대와 집착을 하신다고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랑의 표현을 받으며 자라지 않아서 그런지, 감정을 잘 표현해 주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시험에 떨어져서 마음이 힘들어졌을 때, 그 후배 어머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OOO 엄마인데…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한데, 한번 만나고 싶은데 우리 집으로 와 줄 수 있을까요?"
처음 받는 전화에 당황스러웠지만, 직접 만나자고 하시니 피할 수도 없었다. 말씀하신 날짜에 정장을 입고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준비해 인사를 드리러 갔다. 긴장한 마음으로 벨을 눌렀는데, 문을 열어주신 어머님이 내 눈을 못 마주치고 피하시는 게 느껴졌다.
'아, 오늘 좋은 얘기는 아니겠구나.' 직감이 들었다.
선물을 드리고 거실 식탁에 앉으니 어머님이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딸아이가 많이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늘 최고로만 키우려고 했고, 지금도 아버지 쪽으로 좋은 선자리가 들어오는데, 얼마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안 만난다고 하니 당황스러웠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살아온 환경이 많이 다르던데, 우리 딸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우리 딸과 헤어져 주면 고맙겠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준비하던 시험도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나이도 적지 않고 마음고생이 많을 텐데, 우리 딸이랑 헤어져 주면 남편에게 부탁해서 금융권 괜찮은 회사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줄 테니까, 거기에 취업해서 안정적으로 지내면 좋겠어요."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잘 말씀드려서 교제를 허락받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계속 우시면서 말씀하시니 얼마나 속상하면 저러실까 싶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는 얘기와 내가 시험에 떨어져서 힘드니까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기보다는 그 친구가 여러모로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서 만남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사랑했다면 어머님을 설득해서 "잘해볼 테니 믿어 달라"라고 말씀드렸겠지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우시는 어머님을 보니 부모님 마음에 상처를 드리면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저희 집은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부끄럽게 산 적 없었고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만큼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도 시험에 떨어졌지만 포기할 생각이 없고, 누구 인맥으로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만남을 반대하신다면, 제가 헤어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그제야 어머님이 얼굴을 보며 너무 고맙다고 하며 한 가지 더 부탁하셨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요. 헤어지자고 하면 우리 딸이 당분간 많이 힘들어할 텐데, 나는 감당이 안 돼요. 내가 며칠 후 외국으로 15일 정도 여행을 가는데, 그때 맞춰서 헤어져 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났다는 걸 딸이 알면 인연을 끊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꼭 비밀로 해 줘야 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할 말이 없었다.
"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여러 번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약속 꼭 지켜 달라고 하셨다.
마음을 추스르며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약속대로 외국에 나가신 시기에 맞춰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시험에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어렵게 이별을 이야기했다. 후배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내 마음이 불편해서 어렵다고 모질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내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쉽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