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무지개에 빠지다
신의 저주 - 쉬우면 사랑이 아니다
1장. 레드 – 금기. 경고등이 켜졌다. 멈춰야 산다
“이거 이쁘네, 아까 그거랑 둘 다 살까?”
“내꺼 그만 사. 오빠 넥타이 본다며.”
“별로 눈에 들어오는 게 없네.”
“온종일 돌아다니구 없어? 넥타이가 다 비슷하지 뭘…”
창용이 앞장서 걸었다. 매대 가득한 악세사리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안보는 척 해본다.
“여자들은 좋겠어. 예쁜거 많잖아, 싫증나면 또 사고, 또 사고... 남자는 맨날 똑같잖아, 양복에 넥타이.. 우리 사무실은 아저씨들만 있어서 쫙 다 곤색이다. 진짜 재미없어.”
“창구 나오면 여자들 많잖아. 솔직히 말해, 인기 많지? 그치?”
수민이 팔에 매달리며 취조를 시작한다. 떠보는지, 확신인지, 만날때마다 묻는다.
“니가 맨날 택배 보내잖아. 혼사길 막혔다.”
“흐흐, 소문 다 낼거야, 임자 있다고.”
싫지 않다. 철없이 마냥 좋단다. 창용은 일편단심 자신만 바라보는 수민이 귀엽다. 복잡한 길거리를 꼭 붙어 걸으며 찌라시를 받아챙긴다. 떡볶이, 노래방, 술집…
“오빠, 여기 게이바 좋은데 많대. 한번 가보자.”
“우리같은 사람 가면 싫어해.”
“벌써 가 봤어?”
“많이 가지, 회사가 이 앞인데. 회식도 있고, 생일도 하고..”
“진짜 잘생긴 남자들 많아? 연예인 같애?”
“그냥 클럽하고 똑같애.“
“가보자, 나 한번도 못가봤어, 응?”
“잠깐만이다. 시끄러운데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팔짱을 끼고 걸었다. 익숙하게 몇 블럭 돌아 <컨택>에 들어섰다.
“무지개는 어디있어?”
“어이구? 별걸 다 알어?”
“그정도는 알지, 게이 표시라며? 티비에서 봤어. 입구에 붙어 있다 그랬는데…”
잔뜩 신이 난 수민이 앞장섰다. 깜깜한 입구를 지난다. 다른 세상이다. 이제 겨우 해질녁인데, 홀안은 이미 수없이 많은 술잔이 오간다. 달팽이관을 때리는 비트, 정신없는 조명아래 엉겨붙어 리듬을 타는 사람들… 진작에 취했는지 촛점을 잃은 젊은 외국 남자의 커다란 귀걸이와 짙은 볼터치… 위아래를 훑는 눈빛이 거북하다. 간간히 무리지어 앉은 여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치 않은 외모의 청년들이다. 요즘 애들은 쓸데없이 너무 잘 빠졌다… 배꼽까지 쭉 찢은 티셔츠를 입은 곱상한 바텐더가 반긴다. 가슴팍이 다 들여다 보인다. 무뚝뚝하게 맥주 두병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누가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다.
“얼른 마시고 가자. 정신없어.”
“남자들은 참, 뭐 어때? 그냥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거지?”
툴툴거리는 수민을 못본척, 화장실로 향했다. 느릿느릿 닫혀지는 두꺼운 문 뒤로 쿵쿵거리던 음악이 수그러든다. 얼굴 알아보기 힘든 네온 등 한 줄. 자주색과 진녹색으로 요상스럽게 치장한 벽마다 황금색 테두리가 도드라지는 거대한 거울을 걸었다. 굳이 소변기 앞에까지 거울을 걸었을까 하면서도 눈, 코, 입을 꼼꼼히 체크한다. 야근 혹은 조명…? 눈 아래 다크써클이 보이는 것 같다. 조명탓이다… 야릇한 모양의 수도꼭지를 들어올려 물을 튼다. 매일 몇명씩 이걸 올렸다 내렸다 할까… 손을 말리는 고급 에어 드라이어가 굉음을 뿜는다. 우위이이잉… 무참히, 손등 아래로 밀려나 부서지는 물방울…
긴장을 풀려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자연스럽게 위를 본다. <컨택>에서 유일하게, 창용에게 평온을 주는 천장 벽화다. 구름처럼 몽글거리는 뒷배경에 다비드는 아닌, 그러나 다비드처럼 홀딱 벗은 곱슬머리 남자들이 한데 엉켜있다. 각진 뼈대, 툭툭 불거지는 근육, 반쯤 감은 눈과 긴 속눈썹… 서양이 우리보다 자유로워서 일까. 한국 남자의 알몸은 아름답다 예술화 된 적없다. 그래, 한국에서 성인 남자의 맨살이란, 힘들거나, 민망하거나, 혹은 죄스러운, 입에 올리거나 눈에 보여서는 안되게 불순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벽 한쪽의 구슬 커텐을 열었다. 진한 향내… 사방이 거울로 된 작은 드레스 룸에는 푹신한 핫핑크 소파와 셀 수 없이 많은 화장품이 널부러져있다. 마음껏 치장해 볼 수 있도록 노출 심한 여자 옷과 하이힐, 가발, 악세사리와 팬티 스타킹… 공짜 콘돔까지 박스 째 쌓여있다. 어지럽다. 나가고 싶다.
“가자, 닭꼬치 먹을까? 매운 거?”
“벌써 가? 너무해, 진짜… 오빠 안 덮쳐, 저 사람들 눈 높다니까?”
창용은 말없이 짐을 챙겨들고 문을 나섰다. 늘 그렇듯, 서로를 꽈배기처럼 돌돌 감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중에도 청소하고 빨래는 오빠가 해? 진짜 먼지하나 없어. 맨날 청소만 하나봐.”
샤워하고 나온 수민이 그의 옷장에서 티셔츠를 꺼내 입으며 깔깔거린다.
“뭐야, 면티까지 줄 잡아놨어. 너무하는 거 아냐?”
“군대 가봐, 줄 안 맞으면 혼나.”
“근데, 우린 언제 결혼해? 내일 한명 또 가고... 진짜 몇명 안남았어. 나 더 기다려야돼?”
수민이 폴짝 침대 위로 뛰어 올라 그의 가슴팍에 엎어졌다. 늘 기분좋은 그녀의 애교... 고개를 움직일때마다 뽀족한 턱이 창용의 갈비뼈를 꼭꼭 누르며 간지른다.
“내 친구 결혼식에 같이 가자, 오빠 여기서 자취하는 거 다 아는데, 어떻게 나 혼자 가?”
“미안해, 진짜로 일이 있어.”
“그럼 우리도 결혼하자, 응? 나 안 사랑해? 언제까지 뽀뽀만 할거야? 응? 응?”
쪽, 쪽, 쪽… 딱따구리처럼, 그녀의 입술이 창용의 얼굴을 마구 공격한다. 간지럽다. 창용은 몇번 받아주다가 슬그머니 그녀를 떼어 놓았다.
“너 위로 오빠가 셋이야, 나 오래 살고싶다.”
“와, 비겁해, 책임 안 진다 이거지? 마음이 없는거 아냐?”
뽀루통해진 수민이 그의 배 위에 올라 앉았다. 찌푸린 얼굴도 귀엽다.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 뿐이다.
“마음이 어떻게 없어? 근데 나, 너네 오빠랑 20년 친구야. 아직 결혼도 안했잖아. 어색해지기 싫어. 친구 동생만 아니었으면 좀 달랐을 지도 모르지.”
“핑계대지마. 몰라, 엄마가 내려와서 얘기 좀 하자셔. 각오하고 와. 결혼 얘기 하실거야.”
“해야지, 내년에 할까?”
“또 내년이야? 제대하고 지금까지, 내년, 내년…”
“나 아직 집도 없잖아.”
“그러니까 내려와. 은행에서도 지방 간다 그러면 좋아할걸? 내가 서울로 옮기려면 대기가 길어. 오빠가 오는 게 훨씬 빨라.”
대답 대신 그저 웃었다. 아마 만번쯤은 해봤을 것 같은 똑같은 이야기다. 답이 없다. 수민이 베게를 껴안고 창용옆으로 내려가 앉았다. 훌렁 드러난 맨 다리로 이불을 헝클었다.
“아유, 똥고집! 근데 나 요새 선 봐, 알어? 아빠가 빨리 가라고 난리야.”
“네 오빠한테 들었어. 맘에 드는 사람있으면 만나봐. 나 기다리면 고생해.”
“딴 여자 있어?”
“그런거 아냐, 여자는 무슨…”
“나는 뭐, 괜찮은 사람 같기도 한데... 약사야. 몇번 만났어. 세살 많고, 겨울 전에 결혼 하재.”
“벌써 결혼 얘기를 해?”
“서른 셋이면, 선 나올때 부터 결혼할 사람 찾는거지. 오빤 아직도 내가 어린거 같지?”
“하긴, 너도 서른이네. 요만할때 부터 봤잖아, 나이차도 있고… 난, 아직도 너 꼬마 같애.”
“여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러는 거야? 맨날 이렇게, 진짜 초딩처럼?”
창용의 팔을 잡아당겨 베고 누운 수민이 삐졌는지 입을 닫았다. 미안해진 창용도 피곤한 척, 자는 척 해본다. 수민의 숨이 겨드랑이를 타고 올라온다. 따뜻하다… 포근하다… 아주 많이 편안하고… 그래, 역시, 본능이 갈망하는, 그 두근두근한 설레임이 없다. 수민이 아니라면…? 만약 품에 안긴 사람이 수민이 아니라, 진영씨라면? 진영씨가 내 옆을 파고 든다면…
2장. 화이트 - 천사가 허락한 사랑
무지개 언덕을 걷는다. 이태원 데이트 코스라는 이슬람 사원 앞을 지난다. 독특한 외향에 넓찍한 계단, 유유자적한 둥근 아치가 가지런히 늘어선 흰 기둥을 타고 흐른다. 건물 양쪽으로 거대하게 솟은 두개의 타워가 역시나 남성적이다. 권위, 통치… 거역하는 자는 피로 처단한다, 어떠한 반항도 용납하지 않는다… 제 발 저린다고 하나. 남들이 자꾸 쳐다 보는 것 같다. 벼랑 끝의 저항을 알아볼까. 꿇은 굴욕의 발끝은, 하루에도 몇번씩 복종과 배신 사이를 오간다. 빠르게, 소방서 옆길로 숨어든다. 군데군데 패이고 갈라진 언덕길 맨 꼭대기, 무너질 듯 허름한 건물에 간신히 매달린 간판 <HIM>. 누군가에 훼손되어 색이 다 지워져버린 둥근 테두리 아래로 지하 카페가 있다. 몇 푼 들지 않았을 탁한 회색 벽, 횟가루라도 묻어 날 듯 러스틱하게 마무리한 테이블과 의자, 몇년째 붙어있는 ‘자정 이후 15000원 무제한 칵테일’… 홀 가운데 초라하니 서있는 마이크와 검은 천으로 덮어 놓은 노래방 기계... 아직 오픈 준비 중이다. 침침하니 켜놓은 크림색 조명이 좋다. 홍대 앞 <컨택>이 프래디 머큐리의 열정 가득한 퀸이라면, 이태원 <HIM>은 첫사랑을 추억하는 앨튼 존 이다. 서른 여섯이 많은 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젠 적막이 좋다. 음악을 고르던 마담이 뒤돌아본다.
“어, 한잔 줄께, 잠깐만… 어제 진영이가 많이 기다리는 것 같더라. 자기 왜 안왔어?”
“고향 친구가 왔었어요. 진영씨는 뭐, 따로 약속해서 만나는 사이는 아니라서…”
“사귀는 거 아냐? 잘 어울리던데?”
“아니에요, 그런 분이 왜 저를… 미국에 약혼자 있으시잖아요.”
“약혼자는 무슨, 지가 뭐 국제 춘향이도 아니고.”
손가락 한마디가 더 붙은 것 같은 착시. 엄청나게 긴, 실버 매니큐어에 큐빅까지 박은 손톱을 한껏 뻗쳐 블랙 러시안을 건넨다. 흔한 칵테일이지만, 여기는 뭔가 다르다. 고개를 숙여 아예 글라스에 코를 박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강한 커피향이 올라온다. 아아… 지난 며칠 간, 정말 이게 필요했다. 귀 밑 침샘을 쥐어짜는 독한 보드카와 멕시코 커피… 중독이다. 이대로 무기력하고 싶다. 덜덜거리는 안마 의자 속 깊숙히 빠지고 싶은 맛... 알콜 도수는 세지만, 한방울씩, 한모금씩,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리는 느낌은 최고다. 이것도 진영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거다.
“티 난다, 알어? 너네, 각자 애인은 멀리 놔두고, 여기서 바람피는 거잖아.”
정곡을 찌른다. 술로 입술만 적신다. 오늘 오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
“너만 괜찮으면, 진영이는 오케이라던데? 저쪽하고는 끝이야. 방학마다 가더니, 지치나봐. 그러길래 바보가, 거기서 결혼하고 남았어야지, 여길 뭐할라고 돌아오니?”
“교수 됐잖아요, 저라도 그랬을 거에요.”
변명 비슷하게 편들어 본다. 진영은 미국에 약혼자를 두고 귀국했다. 장거리 연애의 당연한 새드 앤딩… 멀어지면 소원해 진다… 그래도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걸 보면 참 절절한 사랑이다 싶었다.
“남자가 버몬트 산다는데 오겠어? 거기 완전 천국이잖아. 그런 사람보고 와서 영어 선생해라, 그 사람은 진영이보고 미국 들어와 살자, 둘이 참…”
약혼자 사진을 본적이 있다. 단단하니 체격 좋고, 잔주름이 따듯하던 백인 남자였다.
“솔직히 얘기해봐, 진영이 좋아하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풉 웃었다. 2초만에... 이렇게 쉽게 자백했다. 마담의 예리한 눈초리가 미간에 내려와 꽂힌다. 눈도 못 마주치겠다. 창용에게 진영은, 수민과 많이 다르다. 감히 바라봐도 되나 싶게 황홀한 사람. 거짓말 한마디 못하게 착하고 여리지만, 지겹도록 우유부단한 창용을 보챔없이 기다려주는, 봄 햇살 가득 품은 시냇물 같은 사람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딱 거린다.
“제가 처음이라서요, 겁도 나고, 어떤때는 답답해 미치겠고…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할지...”
“쉬우면 사랑이 아니지. 진영이는 또 얼마나 힘들겠어? 근데 자기는, 고향 친구 동생이라며? 어떻하니, 부모도 쉽지 않은데 친구까지 얽혀서... 그래도, 진영이 같은 애 세상에 없다, 순정파에… 내가 걔를 오래 봐왔잖아. 천상 예술이나 해야지, 순해 빠져가지고… 솔직히 난 걔가 교수는 어떻게 하는지 상상이 안 가. 생긴것도 봐봐, 옛날에, 벌써 몇년전이니, 저 문으로 진영이가 처음 딱 걸어 내려오는데, 난 무슨 아이돌이 들어오는 줄 알았어. 내가 이렇게 정지화면 같이, 정말 이 자세로 컵 들고 이렇게 멈춰있었다니까? 그 얼굴에 그 체형에, 진작에 연예인했어도 떴을거야. 아무튼 아까워. 그런 애가 다 싫고 자기 좋다잖아, 나 같으면 영광이다.”
“알죠, 아는데… 제가 이럴 줄 몰랐어요.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쩌겠어. 에라, 모르겠다, 전쟁 팍 치르고나면 괜찮아져. 언제까지 숨길래? 자기, 그러다 진영이 놓쳐봐라? 의리? 정? 다 필요없어. 체면 때문에 미적거리다, 한번뿐인 인생 바로 지옥이야. 여기 봐, 멀쩡히 결혼 하고도 딴짓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어?”
끄덕끄덕… 마담에게 수긍되어 갈 때, 진영이 들어섰다. 마담이 담배 든 손을 카운터 아래로 내리고 연기를 쫒는다.
“테니스 갔다 오는구나, 잘 했어?”
날씬한 몸이 기분좋은 향을 날린다. 샴푸? 로션? 아님, 혹시 향수?
“예, 게임이 좀 길어졌어요. 뭔가 막 서두르니까 기분 좋은데요? 저 바빠 보이죠?”
“바빠서 이 아침부터 여길 오니? 헛소리 고만하고, 얼른 먹고 가. 너네 있으면 청소 못해.”
진영이 옆에 와 앉는 것 만으로도 창용은 한껏 충전된다. 립밤을 발랐을까, 윤기있는 아랫 입술이 도드라진다. 말하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쁜 진영씨. 며칠째 밤샘 채점 중이라는 프로젝트, 거의 다 완성했다는 키아누 리브스 초상화, 어제 또 봤다는 드라마 <도깨비>.
“<도깨비>를 몬트리올에서 찍었잖아요. 제가 학교를 거기서 나왔는데, 독특한 건물이 정말 많아요. 아무데나 놓고 막 찍어도 다 예쁘고, 정말 북미의 작은 유럽이에요. 근데, 거기서 공유가, 언덕에 앉아있거나, 가로수 길을 걷거나,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와아, 저는, 몇번을 봐도 자꾸 눈물이 나는 거에요. 어쩜 저렇게 깔끔하게 잘 찍었을까... 전에도, 거기서 늙어 죽어도 좋을 만큼 거길 떠나기 싫었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더 그립구요, 유튜브로 그 장면만 또 보고, 또 보고 하면서 혼자 울고… 한 컷 안의 색감과 바람까지, 그 디테일들이 가슴에 꼭꼭 되살아나면서, 알지도 못하는 제작진이 너무 고마운거에요. 내가 사랑하는 걸, 저 사람들도 저만큼 소중하게 담았구나.. 웃기죠? 제 것도 아니면서? 알아요, 제가 어떤때는 좀 많이 유치해요.”
과하지 않은 눈 웃음, 평온한 목소리, 수화하듯 아름다운 손놀림에 한번씩 발그레해지는 맑은 뺨까지… 한시도 눈을 뗄수 없는, 귀를 닫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 이제라도 만나 천만다행이다. 모든게 힘들어지겠지만, 진영을 잡는다. 수민에게 용서부터 구해야겠다. 어머니께도, 억눌렀던 스스로에게도.
“괜찮으시면 이번 휴가, 저랑 같이 가실래요? 몬트리올은 가볼만 해요. 근처에 만날 사람도 있어서…”
소녀처럼 떠들던 진영이 잠시 망설이며 술을 한모금 넘긴다.
“제가 학생때 만나서, 졸업하고 회사 다닐 때 까지, 꽤 오래 같이 살았어요. 그냥, 혹시라도, 어린게 미국 놈하고, 아니면, 뭐, 외국 물 먹어서 헤프다? 그런 오해 하실까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맹세코 단 한번도, 감히 진영씨에게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다.
“정말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 모아서 정식으로 약혼식도 하고, 언제든 돌아가서 결혼한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를 포기 못하겠어요. 과분하게 교수까지 하고 있고, 돌아가면 이만큼 안될 거 잖아요. 일도, 그 사람도 놓치기 싫어서 시간만 끌고 있었어요. 이기적이죠? 근데, 얼마전에 통화하는데, 같이 살았던 집이랑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겠대요. 저한테는, 이제 그만 기다린다, 끝내자, 뭐 이렇게 들리더라구요. 어쩌면 둘 다 서로, 상대편이 먼저 끝내주기를 기다렸나봐요.”
안심이다. 솔직히 조금 기쁘기도 해서, 위로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덥썩 ‘이제 나랑 사귀어요’ 하면 성급해 보이겠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창용씨 부담 주는 거 아니에요. 제가 질질 끌던거니까, 제가 끝내려구요. 마지막이거든요. 진짜 마지막으로, 너무 슬퍼서 평생 다시 못 갈지도 모르니까, 같이 가보고 싶어요. 거기가 어떤 곳인지, 남들 신경 하나도 안 쓰고 내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했었는지, 우리 둘만의 추억도 만들고 싶구요. 아, 아녜요, 부담 아니구요, 거절하셔도 되요.”
창용이 웃었다. 푹 가라앉아 우울하던 진영도 따라 웃었다. 살짝 귀 밑이 빨개지며 턱을 괴는 척 한쪽 뺨을 가린다. 진영의 매끈한 입술 사이로 남은 블랙 러시안이 빨려들어갔다.
“어떤 사람이에요? 잊기 힘든가봐요.”
“응급센터에 있어요. 교통사고나, 멀리있는 환자들을 수송하는데, 헬기 조정도 하고, 기계를 참 잘 다뤄요. 제가, 디자인, 색상 뭐 이런 예쁜 것만 해서 그런지, 그 사람이 공구 하나만 들고 있어도 너무 멋있는 거에요. 버몬트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전부인이 키워요. 두고 한국으로 오기가 좀 그랬겠죠. 이번에 이사하는 것도, 아들 가까이에서 살겠다는 거구요.”
담담하게 말하지만, 손톱으로 빈 술잔을 톡, 톡, 건드리는 모습이 슬퍼보였다. 마담이 슬쩍 넘겨다 보고 새 잔을 꺼내든다. 손짓으로 두 잔을 주문했다. 바들거리던 속눈썹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꽉 찬 눈물을 놓아 버렸다. 긴 한숨이 지난다.
“저는요, 뭔가 원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남한테 해끼치는 거 한번도 안하고 살았으니까… 진심으로 뭘 기원하면, 잘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역시나, 신은 저를 싫어하세요. 절대 내가 바라는 건 주지 않고... 그렇게 맘고생 할 때 창용씨 만났는데, 또 이도 저도 아니게 진전도 없고, 확신도 없고… 양다리도 아니고 이게 뭔가, 한심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이젠, 누가 해주길 기다리고 바라는 것, 그만 할려구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바꿀수 있는 것, 그런 걸 할 거에요. 신은 절 싫어하셔도, 천사들은 착하잖아요. 바라는 거 없이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그정도야 모른 척 해주겠죠.”
3장. 핑크 – 레드와 화이트, 금기와 허락의 오묘한 조화
아는 얼굴 가득한 회사 앞이나 이태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낙원동을 찾는다. 한 곳에 있기보다는 여기저기 걸어다니는게 마음 편하다. 광화문, 인사동, 종로를 돌아 이 곳까지, 둘이 자주 걷는 코스다. 이미 곳곳에 추억이 많다. 야고 만두 옆 축축한 시멘트 골목, 이가 맞지않아 덜컥거리는 하수구 멘홀, 금이 간 기와장을 얹은 싸구려 술집들이 간판도 없이 영업하는 곳.
“운치 있죠? 요즘 서울에, 이런 데 흔치 않아요.”
디자인... 창용에게는 다 낡아빠져 볼품 없는 것들이, 진영의 눈과 입술을 지나면 국보가 된다. 섬세함, 감성이란 게 그런건가 보다. 초라함에서 찾는 미... 외면받아 소외되고, 혐오스러워 악이 되면, 더 깊은 독을 품어 치명적인 빛을 발한다. 진영이 말했다 – 존재해야 하는 이유보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맞다 틀렸다의 논쟁없이, 창용은 동화되어갔다. 함께 있으면, 한탄스런 이 영혼도 서툴게 기지개를 편다.
며칠 전, 단골 비슷하게 주인과 알아가기 시작하던 낙원 포차에서, 처음으로 진영에게 키스했다. 수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게 몹시 어색했지만, 진영은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술 때문은 아니다. 혼란스럽던 창용에게 처음으로 깊은 닻을 내려 정박 시켰다. 이제서야 겨우, 그 오랜동안 혼자 표류하고 있었음을 깨우쳤다. 진심을 가득 담은 키스로 마음을 전했다. 오랜 망설임만큼이나 기다림도 컸다. 미룰 이유도, 피할 자신도 없다. 손을 꼭 잡고 포차에서 나와 후미진 뒷골목을 숨어다녔다. 설레는 포옹을 한다. 다만, 어두운 밤 불량 청소년처럼, 아직은 시선이 두렵다.
어제는 함께 여행 계획을 세웠다. 시작은 즐거웠지만, 나와의 첫 여행인 동시에 그와의 이별을 앞둔 진영을 위로하다보니 또 함께 밤을 새웠다. 미안함이나 동정이 아닌, 어쩐지 공감할 수 있으르 듯한 지친 눈물에 이끌렸다. 싸구려 여인숙 골목 막다른 곳에서, 보일듯 말듯, 아주 힘없이 한번 반짝.. 하며 흘러 내렸다. 분명 진영의 눈 속에는 반딧불을 품은 샘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구조신호 보내듯 가냘프게, 스러질듯 위태롭게, 창용의 무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제가 창용씨 많이 좋아해요. 애인 분 정리 될때까지 기다릴려 그랬는데, 그게 잘 안되요.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저도 해봐서 알잖아요. 오래 될 수록, 익숙 할 수록, 깨기 힘들어요. 여러 사람 괴로울거고… 저 때문에 혼란스러우신 거, 정말 많이 미안해요.”
흐느낌 하나 없이 젖는다.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가장 깊고 오랜 입맞춤을 나누었다.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건, 온 몸이 찢어지도록 아픈 말이다. 숨을 끊고 뇌를 멈추어서라도 둘이만 영원하고 싶다는 건, 우리 외의 모든 것 - 죽을때까지 살아갈 모든 날들,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다 포기한다는 말이다. 아직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건 아니었어도, 남들에게 지독한 손가락질을 받아도... 우리도 어쩌면 애절한 사랑인가 보다.
“제가, 진영씨를 사랑해도 될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안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손 안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
새벽녁에서야 잠깐, 짐을 가지러 집에 들렀다. 얼마 못 잔 탓에 면도를 하면서도 멍하다. 꼼꼼히 물기를 닦아낸다. 칼날이 지난 자리를 수분크림으로 달랜다. 거울로, 한 뼘 열어놓은 문쪽을 살폈다. 살금살금 들어와 수줍게 안는다... 상상 속 진영은 방금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래서 더 천진하고 사랑스런 얼굴로, 창용의 옆구리로 감아든다. 간지러운 환상에 활짝 웃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거울 속 얼굴은 나, 이창용. 아주 보통의 한국 남자, 승진을 코앞에 둔 건실한 은행원… 오랜 연인인 수민과 가족들을 버리고, 바짝 포악해진 태풍 속을 제발로 걸어들어간다. 나름 최선이라 되뇌인다. 아닌 척, 가던 길로 갈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정말 아닌 척 영원히 숨길수도 있지만... 전화벨이 울린다.
“수민아, 갔다와서 만나자. 할 얘기가 있어.”
“아냐, 오빠. 안해도 돼. 그 사람, 어제 우리 집에 인사 왔었어. 곧 상견례 할거야. 저번에 갔었을 때 확실히 알았어. 오빤 나한테 하나도 관심 없어.”
“…미안해.”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화가 났을까, 기분이 더러울까… 짧은 침묵 후 전화가 끊겼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다행이다. 수민이 먼저 떠나줘서. 나를 쉽게 풀어 줘서.
진영이 공항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가벼운 반바지에 곧게 뻗은 종아리… 가볍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살짝 긴장한다. 두근 거린다… 게으르던 심장이 한웅큼 쪼그라진다. 어깨 양 끝으로 넓게 파인 웃옷이 잘 가꿔진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움직일때마다 희끗희끗 반듯한 등짝이 비친다. 팔이라도 둘러 꼭 안고 싶지만 참았다. 아직, 스킨쉽이 어색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갈 곳 잃은 두 손을 어정쩡하니 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짐을 바짝 모아 놓으려 진영이 몸을 숙이자, 옷 속으로 언뜻 뭔가 보였다.
“문신이 있나봐요?”
“아, 이거요?”
망설임없이, 속살이 훤히 보이도록 옷을 잡아내린다. 왼쪽 쇄골과 심장 사이에, 지구 위에 올라 앉은 작은 별이 새겨져있다. 바로 옆을 지나는 새까만 가죽 목걸이, 휑하니 들어난 뽀얀 목선… 의도치 않게 숨이 빨라졌다. 순간이동하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이미 얼굴이 달아 올랐을 거다. 진영은 문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해병대 표시에요. 미국이랑 한국이 비슷해요. 미국 해병대는 독수리가 지구에 앉아 있고, 한국은 별에 앉아 있어요. 독수리는 빼고, 지구하고 별을 합쳐서 새겼는데, 약혼 할 때 둘이 같이 했어요. 그 사람이 해병대였거든요. 저도 해병대구요.”
창용의 놀란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진영이 웃었다.
“알아요, 진짜 안 어울리죠?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근데 저 거기서, 꽤 잘했어요. 조교도 하고, 포상도 많이 받고요. 물론, 거기서는 연애는 안했구요, 어렸을때라, 티가 많이 안났어요. 아마 부대원들 보기에는, 이쁘게 생겨서 그림이나 그리는, 곱게 자란 귀한 집 도련님 정도였을 거에요.”
진영이 옷을 추스린다. 딱 붙는 검은 티가 제자리를 찾는다.
“인기도 많았어요. 해병대 홍보 영상도 찍고, 가볍고 운동 잘하니까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그때는, 스무살 어린 마음에,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남자다운 거, 거친 거, 나도 할 수 있다, 절대 이상한 놈 아니고, 모자란 놈도 아니다… 저희 집안에 군인이 많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정도 노력하면, 조금씩 이해해 주실거라고 생각했었죠.”
“부모님도 다 아시나봐요?”
“아시는데, 싫어하세요. 결혼하면 괜찮다, 병원 다니면 고쳐진다, 여전하세요. 아들이 게이라는 게 쉽나요, 그것도 한국에서, 군인 집안에, 기독교에... 밖에서는 제가 참 괜찮은 놈인데, 집에만 가면, 적군이고 사탄이에요. 아버지는 저 아예 쳐다도 안보시고, 엄마는, 조용히 잘 숨기다가, 놀고 싶은 만큼 다 놀고나서 천천히 결혼 하래요. 그건 안되죠. 저도 불쌍하고, 누가 되든, 그 여자도 불쌍하고요.”
공항 버스에 올랐다. 옆에 앉은 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저없이, 진영의 손가락이 하나씩 하나씩 창용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열고 들어온다. 잃어버릴까, 힘주어 깍지를 낀다. 서로에 기대어 앉은 몸이 맞춤 옷을 입은 듯 편안하다. 몬트리올에 도착하면, 진영에게 꼭 어울리는 반지를 사주고 싶다. 함께 걷는 하늘 위로 촉촉한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
<작가 주>
‘핑크’는 게이를 뜻하는 속어로 쓰이며 무지개 역시 동성애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미국의 버몬트에서는 동성간의 결혼도 합법입니다.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