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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May 10. 2021

오, 캐나다

O  Canada!  Our home and native land!

록키의 봄은 유난스럽다. 긴 겨울을 숨어지낸 겨울잠에서 억지로라도 깨어나야 한다. 여행 책자나 달력에서 보는 눈덮인 호숫가의 캐나다는 사실 겨울 사진이 아니다. 정말 한겨울에는 고속도로도 막아버린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록키에서도 안으로 많이 들어간, 현지인들만 아는 비밀스런 곳이다. 매년 이 넓은 산자락에서, 사진 몇장 찍겠다고 헤메다가 영영 고드름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사진 작가가 되려면, 그것도 캐나다 록키에서 그 짓을 하려면, 적어도 영하 3-40도에서도 잘 펌핑 할 수 있는, 강력하고 뜨거운, 캐나다산 심장을 장착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록키가 품은 숨은 보석을 카메라에 담는다.


        *****      


어학연수, 교환학생, 조기유학, 워킹 홀리데이... 남들은 쉽게쉽게 하는 것들이 내게는 십년 장기 계획으로 진행해야 할, 평생의 숙원이었다. 재정적 도움은 커녕, 주위에는 꿀물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굶주린 악어들로 정신 사나웠다. 이유는 딱 세가지다. 첫째는 가난해서, 둘째는 가난해서, 세째는 가난해서... 부끄러웠다. 인정하기 창피하지만, 돈에 벌렁대는 내 심장이 너무 싫었다.


“착실히 저금해서 살면 되지 뭐하러 가서 고생을 해? 나가는 거 자체가 돈이야.”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쳤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미래가 없었다. 이름만 부모였고 형제였다. 늘 형편이 어려웠고, 끼니도 간당간당했으며, 준비물은 눈치 끝에 사는둥 마는둥... 그렇게 제대로 가르치치도 못한 자식들은 도시로 바다로 흩어져 각자 살기에 급급했다. 나도 간신히 기술 학교를 마치고 군대를 갔지만, 공짜 숙식으로 잠시 '연명'했을 뿐, 해결되는 건 없었다. 제대 후 현실로 다가 온 생존 위협에, 낮에는 전기 기사로 일을 다니고 밤에는 택시를 운전했다. 부족한 잠은 짬짬이 차안에서 해결하거나, 그냥 아무데고 구석에 처박혀 머리만 붙이고 쉬는 걸로 대신했다. 힘들었다. 누가 술 한잔 하자해도, 몇번 있던 소개팅도, 전부 거절했다. 앞만 보는 경주마가 되고 싶었다. 절대 잘나거나 멋져서가 아니라, 미친듯이 뛰어야 살 것 같았다.


유학이라고 포장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국가 자격증을 땄으니, 영어만 잘하면, 어디든 다른 나라의 시험을 보고 당당하게 기술 이민을 신청하려고 했다. 어학 과정으로 나가서 대충 1년이면 기본 영어는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먹고 살 돈이 필요했다. 목표는 천만원.. 유혹이 많았다. 혼자 계신 어머니 뿐 아니라 형과 누나도 푼돈에 예민했다. 모두들 내가 얼마 버는지, 얼마나 모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돈의 안부를 궁굼해했다. 1급 비밀이다. 형제들의 전화도 받지않고 완전히 외면했다. 같이 시궁창에 빠질 수는 없다. 전화도 하지 마라.. 건져 줄 생각이 1도 없다... 욕 해도 할 수 없다. 막내라 저만 안다고, 철이 없다고, 홀엄마 불쌍하지 않냐고.. 아무리 궁시렁거려도 듣지 않았다. 없는 것들의 질투다. 내게 베풀지 않은 자여, 너에게 베풀기를 바라지 마라... 새로운 모토였다. 쓰레기 세상에 살다보니 전보다 많이 약아졌다.


엄마께 드리는 생활비 10만원과 출퇴근 교통비 외에는, 정말 한푼도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돈구걸하는 눈물에 약해질까봐, 버는 돈은 그때그때 달러로, 현찰이나 여행자 수표로 바꾸어 보관했다. 두툼해지는 달러를 보며 매일 밤 흐뭇했다. 오롯이 나 하나만을 위한 삶을 준비한다... 금방이라도 새 날이 올 것 같았다. 한겨울 공사판의 전기일도 힘들지 않았다. 공구 가방에 넣어다니던 영어책 한권도 뚝딱 다 외워버렸다. 운전을 할 때도 영어 방송만 들었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속썩이던 게, 역시 닥치니 다 하게 된다. 출국이 코앞이다 생각하니, 꿈에서도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밥을 먹으며 영어로 술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잘 나가다가 가지나물에서 턱 막혔다. 뭐지, 뭐지.. what is 가지, what is.. 젠장.. 그딴게 왜 궁금해... 피식 웃으며 정신차리기는 했지만, 뒤늦게 재능을 찾은 것 같아 희망이 보였다.


자주 가던 룸살롱이 있었다. 당연히 술을 먹으러 가는 건 아니었고, 새벽까지 대기하는 몇 군데 고정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정신을 말끔히 비워내고, 대신 술을 가득 채워 나온다. 시비도 걸지만 술김에 5만원짜리를 턱턱 던지기도 했다. 알고 지내던 직원 하나가 주방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알려주었다. 택시보다 수입이 훨씬 많을 거라며, 파트 타임은 세금을 내지않게 현찰로 준다고 했다. 몸은 정말 힘이 딸렸지만, 출국이 얼마 안 남았을때라 두말없이 시작했다. 빠르게 배웠다. 손재주만큼 눈썰미가 좋아서, 과일 안주 정도는 순식간에 터득했다. 호텔 주방장 부럽지 않은 잔재주가 있었다. 잘못이었다. 전기가 아니라 진작에 요리를 할 걸 그랬다... 주방장 형님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이민을 준비한다는 말에, 식자재 손질부터 비법 양념까지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요즘은 어딜가도 한국 식당이랑 술집이 많아서, 요리만 해도 먹고 산대. 불법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데나 가도 일이 있다더라. 자리 잘 잡으면 연락해라? 따라갈께, 같이 하나 차리자.”                 


한집에 살아도 얼굴 보기 힘들던 엄마에게, 드디어 통보를 했다. 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군대도 갔다왔는데 뭐 별일 있겠냐, 잘 살아라... 건조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문에 나오는 그런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정다감 애정 뿜뿜한 사이도 아니었다. 심한 주사와 놀음.. 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도 막내라 나 하나만은 쌀밥 먹여 키웠다고 우기셨지만, 배불리 먹어본 적 없었다. 식충이가 너무 많았다. 암이 퍼지면서 식사량이 많이 줄어든 아버지 덕(!)에 몇 숟가락 더 먹을 수 있었어도, 그것 마저도 형누나와 나눴다. 그 둘만 없었으면 다 내 몫이었는데, 늘 그만큼씩 뺏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가난이, 가족이.. 이만큼 다 컸으니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온 몸으로는 벗어나고 싶은… 저주 할 만큼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사랑한다는 말 한번 해본적, 들어본적도 없는.. 어쩌다보니 와글와글 모여 살게 된 '아는' 사이.. 우린 서로에게 그런 정도였다.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삼십만원을 건넸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이별 선물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나는 기념이다...


“아무도 주지마. 엄마 다 가져. 형누나는 젊으니까, 알아서 풀칠 할거야.”  


        *****


캐나다로 떠났다. 학생 비자를 받기위해 어학연수 8개월을 신청했다. 왜 8개월이냐 하면,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캐나다는 선불로 학비를 내면, 그 기간만큼만 학생 비자를 준다. 그런데 학교를 6개월 이내로 신청하면, 공항에서 입국 심사 할 때 왕복 항공권을 보여줘야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불법으로 남을까봐 더 꼼꼼히 묻는다고 했다. 잔머리를 굴렸다. 어정쩡하게 8개월 어학원에 비행기는 편도만 끊었다. 돈도 아까웠고, 절/대/로/ 돌아 올 생각이 없었다.


“한국 돌아가는 표 있어요? 언제 귀국합니까?”


밴쿠버 공항에서 이민국 사람이 물었다. 연습한대로 답했다.


“8개월쯤 공부하고, 부족하면 연장을 하던지, 아니면 반대쪽 끝까지 배낭 여행을 할 겁니다. 날짜는 아직 안 정했는데,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1년안에는 돌아가야해요. 현찰은 넉넉히 가져왔습니다.”


속주머니에서 두툼한 여행자 수표책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프린트 한 홈스테이 주소와 선불 영수증도 꺼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전부 선불로 냈어... 별 문제 없이 공항을 통과해 짐을 찾으러 내려갔다. 뱅글뱅글 돌아 나올 가방을 기다리며, 서류를 꼼꼼히 찢었다. 홈스테이..? 가족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개 이름까지 다 적혀 있었다. 식사 포함, 한달에 천불이 넘는다. 미친거야, 돈이 썩어나나... 8개월치 홈스테이 비용를 송금했다는 영수증도 버렸다. 전부 가짜다. 홈스테이를 하는 척 해서 주소와 계산서를 받고난 후, 취소했다. 헤드에 어학원 이름이 버젓이 찍혀있으니, 필요한대로 쓰기 좋았다. 계산서를 여기저기 조금씩 고쳤다. 마치 전액을 선불로 내고 받은 영주증인 척, 스캐너와 프린터 사이를 몇번 왔다갔다 하면서 티나지 않게 잘 위조했다.


대신 차이나 타운으로 갔다. 미리 예약 해 둔 숙소가 거기 있었다. 달세로 내면 하루에 겨우 20불 밖에 안되는, 시내에서 가장 허름한 곳이다. 우범 지역이라 관광객들에게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 인터넷 평가가 아주 안 좋은 최악의 숙소인데, 역시나 동네 약쟁이들이 다 모여있었다. 언제 빨았을지 모를 냄새나는 시트 위에, 한국에서 가져간 침낭을 펼쳤다. 흐릿한 얼룩으로 오염된 베게는, 방문 아래 작은 틈으로 쏙쏙 잘 눌러 꽂았다. 그렇게하고 자야 밤에 혹시 누가 문을 밀어도 열리지 않을거다. 여분의 옷을 돌돌 말아 수건으로 싸서 베게로 썼다. 두궁, 두궁, 두궁… 낮은 레게 송이 흘러도,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만 들려도 긴장되었다. 공동 화장실 한번 가는 것도 한동안 복도를 살피고 나서 조용히, 후다닥 뛰어다녔다. 처음 맡아보는 매캐한 냄새가 건물 안에 가득했다. 복도에는 항상 뿌연 연기가 차있었고, 코딱지만한 작은방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있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여럿이 모여야 대마초 한대를 나눠 피운다고 했다. 캐나다 쓰레기들이구나... 몸이 나른한 게.. 어쩐지 잠이 잘 올 것 같다...


        *****


"캐나다에 온 걸 환영합니다. 현금 카드 여기 있습니다. 뒷면에 싸인 하시구요, 현찰로 입금하신 건 오늘부터 사용 가능하세요. 더 도와드릴 게 있습니까?"


학생 비자로 왔으니, 먼저 할 일들이 있었다. 은행 계좌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바로, 그동안 준비해 온 대로, 운전 면허증을 땄다. 한국보다 훨씬 쉽다. 문제 수도 적고, 주행도 20분만에 끝이다. 이제, 합법적인 신분증도 생겼으니 하나씩 계획대로 진행한다...


“너… 새로 왔지? … 어디서 왔어…? 중국…?”


조용히 물만 끓여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가끔 화장실 앞 복도에서 봤던, 그 사람이다. 서울에서 경기로 나가는 외곽 도로변… 그 길 어딘가에서 자동차 방석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항상 <땡처리>, <공장이 망했어요>, <팔수록 손해> 등등의 큰 종이를 덕지덕지 붙여놓고, 양손에 펄럭거리며 팔던 그 싸구려 가짜 양털 시트… 내게 처음 말을 걸어주던 필립의 머리카락이 딱 그 털뭉치같이 잔뜩 뭉쳐 있었다. 자세히 보면 정말 곱고 예쁜 얼굴이었지만, 눈을 한번 깜빡이는 데에만 1-2초는 걸릴, 세상에서 가장 느린 친구였다.


“아니, 한국.”

“… 아, 그래?... 재미있다, (숨 한번 길게 쉬고) 난… 한국…., 아니 한국 사람… ㅋㅋ 많이 봤어... 친구하자 (숨 또 한번 오~래 쉬고...) 놀러왔어..?”


필립은 온종일, 그리고 그렇게 매일매일, 약에 취해 있었다. 힘이 드는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가끔은 바깥 공기를 느끼려고, 두꺼운 판자를 못질해 놓은 창문 틈새에 코를 처박고 온종일 쪼그리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온화한 얼굴에는 미소인지, 아니면 인공호흡이 필요한 건지.. 헤 벌어진 입술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들숨 반, 날숨 1/3, 영어 아주 조금씩... 내게 말을 걸었다.


“…난, 퀘백에서.. 왔어... *&^%#...  $@@... &!^..  ##..  )(*...?”


이상한 말을 한다. 뭐라고..? 필립이 웃었다. 분명 크게 웃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박자가 늦다. 산소가 많이 모자라는 힘겨운 웃음 소리... 어어... 야, 너 그만 웃어라, 그러다 산소 끊긴다 .. 말이 안돼니 속으로만 철렁했다.


“크크… 너 불어, 하냐고… 물어본거야… 난… 4개국어 해… 영어랑 불어… 스페인어… 또… 뭐더라.. 아, 그래… 이태리어… 그리고 스페인어… 이태리 말도 해… 너, 나한테 영어… 배울래…? 하루에… 1불…”


몇 마디해보니, 보기보다 얌전한, 그리고 '안전한' 아이 같았다. 하루에 1불짜리 과외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필립은 돈이 필요했고, 나는 영어가 필요했다. 그렇게 그는 나의 첫번째 캐나다 친구이자, 선생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유명하다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을 다녔었다고 했다. 당연히 약 때문에 그만뒀겠지 싶었다. 가끔은 함께 먹는 사발면으로 과외비를 퉁치기도 했다. 그는 치사하게 그런 손이익을 따지지 않았다. 어떤때는 과외 시간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무때고 지 편할 때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한참 말을 하다가 픽 잠들어버리기도 했지만, 나도 치사하게.. 그런걸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풍요로운 캐나다에 왔으니, 그정도의 여유는 즐기기로 했다. 친구가 생긴것 같다..


         *****


어학원이 개강하고 1-2주만에, 나는 아프기 시작했다. 영어는 너무 어려웠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고, 원하던 게 이게 아니라며 화를 냈다. 콜라 한 캔을 다 쏟고도 치우지 않았고, 화장실 휴지를 전부 통째로 뽑아다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아 뭉갰다. 남들 보는 앞에서 주먹으로 벽을 치고, 선생님 말에 한국어로 짜증을 부렸다. 일본 학생에게 “쪽바리 고 홈!” 이라고 시비를 걸다가, 며칠간 계속 주의를 주던 담당자에게 또 불려갔다.


"너 원래 아픈 거였니? 한국에서 병원 가 본 적 있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건가, 혹시 우울증일지 모르니 의사한테 가보자."


못 알아듣는 척 몇번을 되묻다가 (사실 반은 정말 못 알아들었지만), 통역을 도와주던 한국인 학생에게 날 미친놈 취급하는 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옆에 있던 선생들이 말리러 왔을때는, 눈물까지 주루룩 흘리며 인종 차별하지 말라고 악을 썼다. 가방을 발로 차며 당장 경찰을 불러 오라고 소리 질렀다. 공포에 싸인 그들이 우르르 옆방으로 몰려가더니, 잠시 후에 원장이 들어왔다.


"사실 지난 며칠동안, 선생님들이 여러번 네 이야기를 했었어. 너 때문에 모두가 불안해 하고, 다른 학생들한테도 안전하지 않아. 이건 아주 큰 문제야. 학비를 다 환불해 줄테니, 우리 학교에서 나가줘. 아니면 정말 경찰을 불러야해."


성공이었다. 1주일간의 연기로,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이제 한 일년은 걱정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한 거였다. 많이 송금해서 넉넉하게 비자를 받고, 편도로 들어와서, 환불 받아 사라진다... 나중에 이민국에서 알게 되어도 별 수 없다. 이미 통장과 면허증이 있으니, 아무데고 취직만 하면 된다. 세금 잘 내고 사고 안치면, 십년에 한번쯤 불법 체류에서 사면해 준다고 했다. 그 전에 캐나다 여자와 결혼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딱 십년만, 안 걸리고 잘 피해다니자... 돈도 벌고 시간도 벌었으니, 이제 잘, 숨어지낼 준비를 한다. 난 그렇게 적응이 빠른, 이기적인 인간이다. 돈 앞에, 비자 앞에.. 뭘 해서라도 내 배 부른게 먼저다. 남한테 피해만 안주면 되는 거 아닌가.


        *****


“이 돈은, 특별히 우리 디저트 셰프한테 주는 팁이래. 어쩜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냐고 난리야.”


꽤 오래된 뷔페 식당에서 막내 셰프로 일했다. 주방 인원의 반정도가 까탈스런 한국 사람들이었는데, 손재주 하나로 인정받았다. 이제껏 툭툭 성의없이 잘려 나가던 수박 한덩어리에, 온갖 기교를 다 부렸다. 공작도 만들고, 쏙쏙 빼먹도록 축구공도 조각했다. 작은 튜브로 수박 세 통을 연결해 과일 화채 퐁듀를 선보였다. 누가 봐도 예술이다. 한국 손님들은 역시나 룸살롱 손기술을 알아봤지만, 외국인들은 너무 신기해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입소문이 퍼지던 끝에, 지역 신문사 기자가 찾아왔다. 밴쿠버에서 가볼만한 식당으로 추천하면서 <아시아의 음식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인터뷰는 거절하고 작품 사진만 제공했다. 지나친 관심은 피한다... 캐나다에 온지 일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합법적인 취업 비자가 없었다.


“별 수 없어. 네가 식당을 차려서 비지니스 비자를 받아야지. 바보냐, 업주들이 해주게? 돈도 들고, 이제와서 하려면 그동안 너 불법으로 쓴 거 다 들통나서 골치 아퍼. 괜히 세금까지 걸려봐, 얼마나 피곤한지..”


하지만 내게는, 식당을 차릴 돈도, 변호사를 쓸 돈도 없었다. 차이나 타운이나 한국 사람들 가게에는, 늘 일자리는 있었지만, 비자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았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그만큼 불법 체류자 단속도 잦았다. 조용하고 작은 곳으로 가야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 호텔하는데… 가볼래…? 멀어… 록키 산 속에… 거기는 .. 비자 검사 없을걸…”


여전히 행복하고 상냥하게, 그리고 느리게.. 필립이 말했다. 예전에 어릴때 일을 한적이 있다며 연락처를 주었다. 필립 말로는, 자기는 초보라서 하루종일 양파만 깠는데, 남는 시간에는 나무를 자르거나 캠핑 준비를 해주고, 겨울에는 눈치우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거의 노는 수준이었다. 많이 외진 곳이라 숙식이 제공되니, 싸게 여행하려는 젊은이들이 한두달씩 일한다고 했다. 한국 식당이 아니라는 게 조금 걱정이었지만, 영어도 많이 늘었고, 무엇보다도 비자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아 오케이 했다. 전화로 연결된 숀이라는 아저씨는, 필립이 마약을 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녀석 친구라니까 부탁하는데, 같이 좀 데리고 올 수 있니? 얼굴 본지 너무 오래되고, 걱정이다. 네 숙식은 확실히 보장할께. 필립하고 같이 오면, 치료소에 보내려고 해.”


나도 내심 걱정하던 때라 열심히 설득했지만, 녀석이 거절했다. 그리로 가는 순간, 자유가 사라진다고 했다.   


“.. 치료 싫어... 지금.. 돈은 없어도 … 많이, 많이… 행복해… 치료는 나중에.. 난 지금이 ... 좋아...”


밀고 당기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과외 같은 건 잊은지 이미 오래였다. 정말 친구로, 이제는 형제같은 이 녀석을 데려가고 싶었다. 자꾸 마음이 쓰였다.


"필립, 난 너랑 같이 가야겠어. 여기 두고가면 영영 널 못보게 될거야. 여기서 죽게 놔둘수는 없어."

"안죽어.. 걱정마... 나 여기서 벌써.... 몇년째더라.. 4년?.. 5년...? 잘 살아... 난 건강해..."

"넌 지금 네가 몇살인지도 까먹었잖아. 이미 넌 건강하지 않아. 같이 가자, 내가 보살펴줄께. 너 좋아하는 사발면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같이 가고, 이제부터 니가 진짜 내 동생 해라."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해파리같이 바짝 말라 흐물흐물 한 놈이, 실실 웃으며 바이바이를 한다. 혼자 떠날 준비를 했다. 거의 일년 동안을, 단 1불도 방세를 올리지 않은 주인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단하다, 여기 애들 중에 마약 안하고 멀쩡하게 나가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잘했어."

"필립이 걱정이에요. 사발면 한 박스 사주고 가려는데, 가끔 좀 챙겨주세요."

"저 녀석, 어차피 경찰 불러야되. 방값 못 낸지도 오래 되었고.. 이젠 길에 구걸하러도 안 가. 걸어다닐 힘도 없는 거지. 쯧쯧, 노숙자 시설로 보내지면 정말 못 견딜텐데..."                 

"그럼 어떻하죠? 절대 같이 안 간다는데.."


아저씨는, 역시 고수였다. 중독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떠나는 날 새벽, 아저씨가 시키는대로 랜트카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저씨와 함께 필립을 가뿐하게 들고 나와서 차에 태웠다. 잠과 약에 취한 필립은 별 반응없이 뒷자리에 누웠다. 쓸만한 걸 좀 챙길까 했지만 방안의 물건들은 죄다 쓰레기 일 뿐, 건질게 하나도 없었다.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배웅했다.


"괜찮아, 경찰 불러도 다들 이렇게 데려가는 거야. 정신없는 애들을 언제 깨워서 설명하고, 동의하고, 싸인하고... 누가 하겠니? 얼른 가라, 한참 걸릴텐데.. 난 저녀석 데려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누가보면 정말 납치겠지만, 목격자도 약쟁이, 납치 당한 사람도 약쟁이라 아무도 신고를 못할테니 다행이다. 깨끗하게 잘 관리된 앨란트라 랜트카를 더럽히지는 않을까 비닐봉지를 몇개 챙겼다.


"같이 가야지.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그래, 이 녀석아.. 다 너 잘되라고 이러는 거지.. 여러번 듣던 말...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백밀러로 편안히 잠든 필립을 살피며 밴쿠버를 벗어났다. 지긋지긋한 고층 건물과 전기줄을 이제 더는 보기 싫다. 늘 축축하고, 뭔가 수상쩍은 냄새가 가득하던 차이나 타운도 끝이다. 그런걸 얻자고 숨어산게 아니었다... 그렇게 살자고 떠나온것도 아니었다. 이제 정말, 사람 살만한, 내가 살만한 캐나다를 보고 싶었다.


작은 마을 몇개를 지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산자락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도로는 하나뿐이니 길 잃을 걱정도 없다. 앞으로만 열심히, 마구 달린다. 한국의 강원도 산등성이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 정도 구비구비로 넘어갈 산세가 아니다. 해발 3천미터라는 게 절대 뻥이 아님을 확인한 건, 유리창 끝으로도 다 뵈지 않는, 하늘까지 닿은 거대한 산 사이사이를 지나면서부터다. 무지막지한 돌산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걸어다니는 산양 몇마리를 본 것 같다. 어어어 하는 사이 홱 지나버렸다. 이럴때 조수석에 누가 있어서 사진도 찍고 비디오도 찍어주면 좋겠지만, 일행이라고는 뒷자리에 정신줄 놓은 아이 하나 뿐이니, 세계 최고의 록키도 이렇게 허무하게 지난다. 복 없기로는 나도 세계 최고인가 보다...


무려 열 다섯시간을 달렸다. 필립이 구토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전히 잠에 취해 약에 취해, 눈도 한번 뜨지않고 목적지까지 왔다. 중간중간 쉴때 뒷자리에 가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살아있었다... 대단한 놈.. 몽롱해도 어딘가 움직이는 걸 느낄테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나보다. 더 들어가면 차를 반납 하는 곳도 없고, 밴프에 내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하는 유명 관광지를.. 해 다 떨어진 오밤중에 도착했다. 건물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속이라 확연히 내려간 밤기온에 저절로 몸이 움추려들었다. 렌트카 키를 반납하면서 주차장을 살폈지만, 아저씨는 아직 안 온 것 같았다.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필립과 주차장에 앉아 아저씨를 기다렸다. 원래 마약을 하면 추위를 더 탄다고 듣긴 했지만, 정신나간 놈.. 어쩌다 이꼴일까..


공짜 여행 안내서를 펼쳤다. 사진만 훑어봤다. 리무진, 캐리어, 밝은 금발 머리의 사람들, 가로등에 매달린 커다란 꽃바구니, 번쩍거리는 관광 버스, 스테이크 집 광고, 박스 초콜렛... 사진 속 사람들의 미소는, 나나 내 가족들이 평생 구경해 본 적 없는 '행복'의 상징이다. 하긴 엄마가 아주 오래전에, 웃는 걸 본 적이 있다. 내가 중학생 때 쯤... 엄마는, 폐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눕혀두고 공장에 나갔고, 야근수당 요구하다가 해고 된 형은 1인 시위를 하느라 길에서 살다시피 했다. 가출처럼 사라져 몰래 결혼했던 누나가 반년만에 돌아왔어도, 반갑기는 커녕 불룩해진 배를 보며 고아원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암울할때 태어난 조카가 앙증맞은 하품을 하고, 사람 소리에 제법 반응 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는 엄마가 자주 웃었었다. 결국은 백일만에 아이도 빼앗기고 누나가 다시 사라졌지만... 아마 그때부터 엄마는 행복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떠난지 일년만에 정말 처음으로, 엄마가 같이 왔으면 지금쯤 여기서 저 사람들처럼 활짝 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나 저제나 비자 소식만 묻는 통에 짜증이 나서, 가뜩이나 안하던 전화도 더 안하고 있을 때 였던 것 같다...


“필립? 거기 필립이니?”


덩치가 커다란, 전화 목소리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자가 검정색 트럭을 타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태희입니다.”

“그래, 테이, 반갑다. 나는 숀이야, 전화로 이야기 했었지? 필립은 자는구나. 내 차로 옮기자... 여기서 한시간 반 더 가야돼. 애가 피곤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같이 와줘서 고맙다...”


아저씨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필립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그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이곳에 얼마나 있을건지...


“통화 할 때, 저 녀석 친구라기에 걱정 많이 했다. 같이 마약 하는 놈인가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맛이 간 놈 같지는 않아서 오라고 했는데, 사실은 필립 때문이야. 한두번이 아니거든. 왔다가 사라지고, 또 한참 있다 나타나고.. 잠깐 사이에 벌써 도망가고.. 저 멍청한 놈이 그래도 살아있으니 정말 다행이야. 이번에는 너무 오래걸려서 못찾는 줄 알았어. 테이 너도 조심해. 남들 다 하는데 나도 하자, 그게 제일 위험한 거야.”


아저씨는 필립만큼이나 좋은 사람 같았다. 큰 길을 벗어나 등 하나 없는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와이파이가 안된다. 아는 사람 아니고는 절대 못 찾을 것 같다. 덜컹거리는 흔들림에 눈을 뜬 필립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집에 왔나요? 숀? 당신이에요?"

"그래, 필립, 나다. 잘 돌아왔어. 보고 싶었다."

"저도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금방 조용해진 것이, 아마 다시 자는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인다..


"전보다 상태가 많이 안좋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걱정 안한다. 일단 좀 쉬고, 바로 입원 시켜야지. 어려서는 똘똘했는데..."

"아저씨는 필립하고 어떻게 아세요? 친척이에요?"


궁금했었다. 필립 말대로 그냥 아는 사람일까... 저런 약쟁이를 걱정 해 줄 만큼 그냥 아는 사람..??


"너한테 아직 말을 안했나보구나. 난 저 녀석의 새아버지야. 필립이 여섯살때, 엄마랑 둘이 와서 내 산장에 묵었어. 앞니가 몇개 빠진 어린 아이가 걸어오는데 너무 귀여웠어. 천사 같았지. 근데 며칠 묵는 동안 보니까, 조그만 자동차 안에 온갖 쓰레기가 천장까지 가득 찼고, 애를 학교도 안보내고 데리고 다니더라고. 게다가 돈도 떨어졌다는 거야. 그래서 애 엄마한테는 일거리를 주고, 필립은 내가 데리고 공부를 가르쳤어. 한동안 잘 지냈는데, 여자가 우울증도 심하고, 알콜 중독에 마약에... 애아빠가 이태리에서 온 유학생이었다는데, 돌아갔으니 연락도 안되고... 어린 놈이 그런걸 다 보며 자라야했어. 최악이었지.."


아저씨가 조금 속도를 늦추는가 할 때, 출렁거리는 헤드라이트 빛 저쪽으로 <Hidden Gem (숨겨진 보석) Lodge> 라 쓰여진 나즈막한 나무 간판이 보였다. 차가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며 마지막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깰까봐 걱정되는지 연신 거울로 필립을 살폈다. 어차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무척이나 신경쓰면서 운전하는 것 같았다.


"치료 좀 하면 좋아지고, 또 다시 심해지고.. 그러다 필립이 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정말 술, 약 다 끊고 잘 살겠다고 나랑 결혼을 했어. 근데 본인은 행복하지 않았나봐. 절대 한 곳에서 살 수가 없대. 길에서 죽더라도 돌아다녀야 숨이 쉬어진다나.. 약간 정신병 같은게 시작됬었나봐. 어느날 아침에 애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대로 사라졌어. 자동차는 밴쿠버에서 팔았다고.. 그러고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거야. 지금쯤 죽었을지도 몰라, 벌써 십년도 더 됬으니까. 필립이 많이 불쌍하지, 열살 이후로 엄마를 본 적도 없고, 아빠는 원래 모르고.. 엄마 찾으려 그랬는지 밴쿠버로 대학을 갔는데, 저렇게 됬어."         


        *****


산장에서의 첫 날이다. 이른 아침의 호수는 감동이다. 거대한 도끼로 쩍 갈라놓은 것 처럼 가파른 절벽에 해 그림자가 떠오른다. 산밑에서만 간신히 뿌리내리는 나무는 갈대를 둘러 빽빽한 숲을 이루고, 막 잠에서 깬 어린 새의 쉼없는 지저귐이 메아리로 흩어진다. 물안개인지 서리인지 모르게 뿌옇게 덮혀진 호숫가는 토끼 발자국 소리도 들릴만큼 고요하다. 모두가 한숨 고 난 평화로움에,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방갈로가 넉넉한 유리창으로 아침을 받아내고, 북풍에 쫒겨 한쪽으로만 자라는 잔가지들은 하나같이 많은 사연을 품었다.       


투박하고 거칠던, 어제 본 록키와는 또 다르다.  


“일찍 일어났구나. 잘 잤니?"


아저씨가 커다란 머그컵을 내밀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커피향에 자동으로 두 손을 쪽 뻗어 받았다. 아저씨 에 눕혔던 필립이 잘 잤을지 걱정되었지만, 먼저 이야기 하실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는 두사람의 '가족' 이야기이니 제 3자는 잠시 빠져야 할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밴프만 왔다가는데, 사실 여기까지 들어와봐야 진짜 록키야. 이름 그대로 캐나다의 숨은 보석이지. 관광객보다는 현지 사람들이 많아. 너 캐나다 맥주 중에 쿠어스 마셔봤어? 예전에 쿠어스 광고를 저기 저 앞 산에서 찍었어. 겨울이라 눈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스키를 타고 헬리콥터에서 뛰어 내리는 거야. 우와, 저 절벽을 수도 없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지금처럼 드론 같은 게 없었잖아. 한 3-4일을 계속 촬영하는데, 정말 대단했지. 올라가서 보면 다들 기절해. 사람 힘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건 지금봐도 불가능하거든.”      


아저씨의 산장은 정말 깊숙히 숨어 있었지만,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진입로가 없어 직접 다지고 깔았다는 자갈길의 끝으로 호수가 열리고, 뚫린 곳 없도록 사방을 몇겹씩, 산으로 둘렀다. 살얼음이라도 둥둥 뜰 것 같은 차가운 쪽빛 호수에 빈 카누가 누워 손님을 기다린다. 필립도 저렇게 엄마를 기다렸겠지... 마법같이 신비한 호숫가 다리 위에서, 아니면 다 얼어붙어 아무것도 없는 잔인한 얼음 위에서, 괜찮은 척, 그립지 않은 척... 하루하루 빨리 어른이 되려고 안간힘 썼을거다. 줄 묶인 카누 옆에 앉아 혼자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가 가여웠던 마음씨 좋은 산장 아저씨.. 어쩌면 이 쓰레기같은 세상에서 가장 진상이었던 건.. 나.. 였나 보다... 내가 제일 쓰레기였다..


"만약 천국에 호수가 있다면, 분명히 이런 모습일 것 같아요."


간지러운 표현에 서툰 발음이었지만, 흐뭇하게 웃으시는 걸 보니 내 말에 동의하는 것 같다. 서늘한 산 공기를 깊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뱃속이 다 비워질때 까지 숨을 내 쉰다... 후우우우우... 산책로를 걷던 일행이 손을 흔든다. 직원인지 손님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입입니다. 어제밤에 밴쿠버에서 왔어요.”

“아, 그렇다면 당신이 이 봄을 우리에게 가져왔군요. 잘했어요. 이제 우리도 봄이 필요했거든요. 록키도 일어날 시간이구요.”


봄... 록키의 봄은 늦다. 속눈썹까지 얼려버리는 눈치없는 겨울이 지나가줘야, 비로소 짧막한 봄을 구경한다.


"아참, 테이, 너, 아까 일어나서, 거실에 걸려 있는 큰 사진 봤어? 곰 머리 이만하게 찍은 거?"

"아니요, 못 봤는데요?"   

“야, 그걸 봐야지, 내가 옛날에 직접 찍은 거야. 내 등짝에 팔뚝만한 흉터가 있는데, 진짜 미쳤었지, 곰한테 너무 가까이 갔었어... 갑자기 확 쫒아 오길래 죽어라 도망갔거든? 차에 막 올라타는 순간에 콱! 그 놈이 뒤에서 할퀴었는데, 정말 죽다 살아났어. 80 바늘을 넘게 꼬매고... 차 시트랑 옷이랑 전부 피범벅에, 친구들 소리 지르고 난리, 난리.. 얼른 들어가자. 사진 보여줄께. 너 진짜 놀랄거야, 정말로 엄청나게 큰 곰을 바로 코앞에까지 가서 찍었다니까…”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아저씨가 벌써 저만큼 앞장 섰다. 저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분명 세가지다. 첫째는 곰 사진을 빨리 보여주려고, 둘째는 지금쯤 알맞게 내려졌을 새 커피를 마시려고, 그리고 세째는, 혹시 필립이 일어났는지 걱정 되어서... 아저씨의 종종걸음에서 엄마가 보였다. 간신히 조카를 재우고 몰래 빠져나와 주방 싱크대에서 도둑 세수를 하던 .. 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아이가 잘 자는지 살그머니 문틈으로 훔쳐보던 뒷모습... 똑같은 이유로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다려요, 같이 가요... 필립이 눈을 뜨고 이 아침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좋겠다, 좋다... 괜찮다, 보고싶다... 처음 느끼는 따뜻함이다. 그래, 이정도 설레임은, 통 크게 인정하자. 나는 지금 캐나다, 여기는 록키니까... 우리는 아마, 가족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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