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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May 10. 2021

내 남자의 여자

그리고 내 여자의 남자

“지윤아, 이진혁이 한국 온대. 기억나지, 내 동기? 우리 과 조교하던 애있잖아. 학교 연구소로 온대.”

“왠 연구소? 미국에서 교수 한다더니?”

“돈 엄청 주고 데려오나봐. 연구소장에 교수 겸임. 성공했지? 열심히 하더니.”

이진혁. 나와.. 나랑.. 나하고... 음... 그랬었다… 공부는 열심히 했었다.

“얼굴 한번 봐야지, 꽤 친했었는데.. 언제였더라, 마지막 본 게? 걔 우리 동아리였잖아.”

우리가 다 같이, 남편이랑 나랑 그랑, '다 같이' 만났던 건 언제인지 기억에 없지만, ‘나’랑 그랑 마지막 본 건, 2002년이었다. 무려 십구년 전, 잘나가던 윤지윤의 전성기. 참 예쁘던 그 시절…


철없이 신나기만 하던 첫 직장, 나는 연예인 많기로 유명한 안양 예고의 새내기 무용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지나서 있던 지하철 역.. 절대 잊을 수 없는 2번 출구 앞 건물 1층 커피숍... 진혁 선배와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반팔은 이르고 긴팔은 귀찮아지던 5월초의 햇살 좋은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갓 졸업한 초짜 선생의 아슬아슬한 하루를 마칠 무렵이었다. 교감 선생님의 호출보다 더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여기 일하는 걸 알고 있었나?


복학 후 처음만나 2년을 같은 동아리에서 보냈으면서도, 나와는 가까운 듯 아닌듯, 썸에서 요만큼 떨어져 겉돌며 바늘귀만큼의 틈도 안내주던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건 그랬다. 조금은 쌀쌀한 냉기마저 감돌아, 어쩌다 함께 어울리기라도하면 친구들도 많이 조심스러워했다. 졸업 동기였지만, 나는 서울에서 안양까지 출퇴근해야했고, 그는 대학원에 남아 조교로 일했다.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안부를 물을 만큼 각별한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혼자서만, 소심한 첫사랑으로 남기기로 했었다. 친구들을 통해 그가 유학 준비로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가나보다. 고백도 못했네...


그런 그의 전화를 받고 번개같이 날아 들어간 커피 숍에는, 현실로! 그가 앉아 있었다! 지독하게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묘한 감정이 한방에 되살아났다. 갸름한 흰 얼굴에 잘 어울리던 금테 안경, 늘 같은 톤의 셔츠... 공부만 하느라 노는 자리에는 관심없던 장학생이었다. 동아리에도 간간히 얼굴만 비추고 사라지던 조용한 사람.. 술담배도 안해서 모임때면 유독 눈치가 보이던 까칠한 선배였기에, 주위에 늘 여자들이 맴돌았지만, 한번도 누구와 사귀는 걸 본적은 없다.


“막연히 생각만 했었어. 정말 유학을 갈 수는 있을지 확실치 않아서 너한테도 애매했고… 가을 학기라서, 다음달에 미리 나가게 될 거야. 지금 비자 인터뷰 하고 오는 길인데, 사실 오래전부터 궁금했었어. 네 생각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들렀어.”

“원하시던대로 되서 다행이에요. 내 생각 같은게 뭐, 중요한가?”

“유학 말고, 네 생각… ‘나’에 대한 ‘네’ 생각.”


그가 멍하니 앉은 날 바라봤다.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었다. 옷 깃 한번 스친 적 없다. 꼬박 2년을, 걸을때도 앉을때도, 기본 1미터는 뚝 뚝 떨어져 있던, 친한 듯 절대 아닌 듯, 먼 듯, 정말 먼 듯, 깍듯하던 선배.. 우연인 척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도 막상 마주치면 긴 말 못하고 각자 갈 길 가던 유치한 사이… 그런 그가 내게 물었다.

“너희 아버님 병원에 젊은 의사들, 너랑 소개팅 하려고 줄 선다며? 난 비교도 안되고 자격도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먼저 가서 잘 알아볼께. 너도 유학가고 싶어했잖아. 대충 자리 잡으면, 다음 방학에 들어와서 양쪽에 인사 드리고, 같이 나갔으면 하는데, 어때?”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 만약에… 이 사람이라면, 내년이라…?

“왜? 아, 혹시, 내가 착각했나? 난, 너도 나한테 마음 좀 있는 줄 알았는데?”

웃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머리를 쓸어 올리며 괜히 옆자리를 두리번 거렸다. 누가 듣고 있을까 신경 쓰였다.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못하고 그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뺨이 빨개지는 것 같다. 나보다 더 당황한 그가 귀여웠다.


“왜? 진짜 아니었어? 괜찮아, 솔직히 말해봐. 내가 잘못 생각한 거면, 별 수 없고.”

“오빠 오늘, 많이 이상해요. 순서가 이게 아니잖아요... 보통은, 나 너 좋아, 너 나 좋아, 우리 사귈까… 뭐 이렇지 않아요? 그러고 나서 좀 사귀어 보고, 같이 나가든 들어가든, 하는 거고?”

“아, 그거.. 남들은 그렇겠지, 근데 타이밍 한번 놓치니까 나중에 물어보기가 좀 이상하더라. 그럼, 지금 다시 해볼까? 흠, 윤지윤씨, 나 너 좋은데, 너도 나 좋은 거 맞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가 같이 웃어주었다. 어색하게 부끄럽게..

"그럼 이제 사귄다?"

설레였다. 놀랍고도 다행스럽던 그 날, 짝사랑이다 포기했던 사람이 찾아와 고백했다. 처음이었다. 처음 잡아 본 그의 손이, 내 손을 꼭 감싸고도 남을 만큼 크고 따뜻했다.


출국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있었다. 퇴근 후 시간만으로는 아쉬워, 밤늦게까지 까페와 술집을 전전하며 앉아있었다. 새벽 두 시, 갑자기 단골이 되어버린 아파트 상가 술집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면, 경비 아저씨 눈치를 살피며 계단에 숨어앉아 최대한 작별을 미루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잔뜩 밀려있었다. 멀리서만 바라보며 지나치던 일, 방학동안 볼 수 없어 서운했던 일, 자존심에 먼저 만나자 전화하지 못한 일,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라든가, 소문들, 궁금했던 것들… 숨겨놓고 모른 척 하던 속마음까지 다 꺼내보고 싶었다.


“누구한테 그렇게 설레는 건 처음이었어. 학교에서 너만 보이는데, 거절당할까봐 말을 못했어.”

“나도 신경 많이 쓰였는데, 알고 있었죠? 티 났을건데? 일부러 모른 척 한거지?”

“그냥, 조금 눈치 정도? 다른 애들한테는 다 반말하면서 나한테만 존대말 했잖아. 맞지? 불편했나?”

“다들 잘해주는데, 오빠는 좀 어렵고, 처음에는 나 별로 안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말도 안걸고, 맨날 딴데 보고 그러길래.”

“좋아해서 그랬지, 진짜야. 좋은데, 긴장하고 떨리니까, 들킬까봐 가까이도 못가고, 바보 같지? 너무 서두르다가 잘못 될까봐, 그냥 아닌척 아끼면서 오래 두고 볼려고..”


2년간의 썸을 한번에 정리하기에는 남은 날들이 너무 적었다. 온전히 내게만 내어주는 단단한 어깨, 거기서 전해오는 그의 체온에 피곤을 녹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마음을 숨길 줄도 몰랐다. 보폭을 맞춰 걸어주는 그의 구두 소리도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사귈 걸, 일찌감치 시작 해 볼 걸… 후회속에, 내 평생에서 가장 짧았던 한달이 지났다. 평일 아침 비행기라 배웅도 못하고 출근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잠깐 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요란스럽지 않은 톤, 발라드 처럼 자꾸 듣고 싶은 목소리..


“가서 연락 할께. 전화 개통하고 뭐 하고.. 며칠 걸릴지도 몰라. 이매일로 먼저 할께.”

“나 지금 그냥 병가내고 조퇴할까? 얼른 공항가면 잠깐 볼 수 있지?”

“아냐, 됐어, 일 해. 아주 가는 것 도 아닌데 뭘.”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뭘…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때까지는, 아주 가는 것도 아니었고, 아주 보낼 생각도 없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펼쳐질 거라 믿었던 그 짧은 연애는 그게 다였다. 낯선 곳에서 담담히 적응해 가는 그를 응원하며, 매일 전화하고 이매일했다. 떠나기 전날 딱 한번 꼭 안으며 입맞추던 그가 그리웠고, 행복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내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그리고 최악이기까지 한 믿기지않는 그 날이 오기까지는…


내 잘못이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않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도록 혈압오르는, 내, 나의, 내가 저지른, 내가 나에게 저지른, ‘실수’였다. 이진혁과는 비교도 안되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던 대학가의 흔한 남자, 그와 같은 과 동기이던 한 인간이 내 인생에 난입했다. 그는 내게 사랑이다 했지만, 그저 날 다독이기 위한 위로이자 변명이라는 걸 안다. 우린 그저 2002년 월드컵에 취해 사고를 쳐버린, 가쉽거리로 대대손손 오르내릴, 바보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진혁이 떠나고 몇 주 되지 않아, 2002년 월드컵을 시작했다. 머리도 마음도 온통 그에게 가있을 때라, 공을 차던 말던 관심도 없었지만, 친구들이 응원을 가야한다며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그 사람 많던 시청 앞에,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진혁의 동기인 '그'가 있었다. 아무 개성없이, 그저 허허실실 사람 좋기만 하던, 밥때 술때 우르르 찾아 다니던 동아리 선배 중 하나였다. 쉽고 편해 모두에게 친구같던, 필요하다면 신발짝도 벗어 줄, 친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외모, 평범한 꿈, 평범한 일상… 모든게 너무 평범해 눈에 보이지도 않던 사람..


늦게 군대를 간 그가 어쩌다 운좋게 한국팀 날짜에 맞춰 휴가를 나왔고, 함께 응원에 나섰다. 모이고 보니, 예전에 몰려다니던 그 맴버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안정환의 헤딩슛으로 사람들이 미쳐갈때, 오랜만에 뭉친 우리도 미쳤다. 대중교통이 끊어진 밤거리를 활보했다. 겨우 1년차 직장인이던 내가 통크게 4차를 쏘았을 때는, 이미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풀린 눈으로 각자의 방향대로 흩어졌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그가 동행했고, 휘청거리며 저만큼 큰 길까지 나가 택시를 잡으려 했던 것 까지 봤다. 그리고는 그도, 나도, 아무 기억이 없다.


두 달 후 외박 나온 그는, 죄인같은 자세로 상견례에 앉아 있었고, 한달 후 어찌저찌 휴가를 얻어 간신히 결혼식을 올렸다. 배는 별로 티나지 않았지만, 잔뜩 예민해진 탓에 입덧이 심했다. 꾹 참으며 굳은 얼굴로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결혼에 친구들은 ‘축하해’ 가 아닌, ‘무슨 일이야?’라며 수근거렸다. 부모님 중 어느 한분도, 예의상으로라도 한번 웃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시방석처럼 불편하던 식이 끝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남편’이라는 사람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신혼여행도, 신혼 집도 없었다. 나는, 실망감에 잠도 제대로 못주무시던 부모님 집으로, 그는 저멀리 떨어진 부대로 복귀했다.


“아직도 일년이나 남았으면, 애 낳고, 돌도 다 지나고 제대야? 거 참, 뭐 이런…”

“그래도 졸업은 하고 갔으니까 나오면 뭐라도 먹고 살겠지요.”

“누가 그 놈 걱정하나? 내 딸 말이야, 내 딸! 한 1-2년 일하고 유학 간다며? 박사 받고 교수하겠다던 애가, 어이구…”

“…”


초스피드로 가족이 되어버린 아이 아빠라는 사람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신혼 같지않은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게 한순간에 뒤엎어졌다. 출산 전 부터 심한 우울증이 왔다. 바깥 출입은 일절 안하고,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었다. 미혼모나 다름없던 결혼 생활에 지쳐갈 즈음 아이가 태어나고, 신기한 모습에 조금씩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갔다. 남편도 제대와 동시에 집 앞에 동물병원을 차리면서, 조금씩 '가족'의 모습은 흉내 낼수 있었다. 그는 겸손하고 자상한, 착한 사람이었다. 장인이 쓰는 돈에 감사할 줄 알았고, 제 자식 아끼고 사랑했고, 내 우울증을 이해하고 치료에 적극 협조해 주는 사람이었다. 정말 많은 걸 포기했지만, 그렇게 잘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 계획해서, 축복 속에, 둘째를 낳았다.


단 하나,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스트레스가 있었다면, 그의 오랜 여자 동기... 그도 알고 나도 아는 - 내 임신 때문에 갑자기 헤어지게 된, 그의 전 여자친구였다. 죽어라 공부하다 혼기는 놓쳤지만, 어디 교수라고 했다. 목구멍에 걸린, 반쯤 씹다 넘긴 생선 가시처럼, 끝까지 날 괴롭혔다. 나와 사고 치기 전부터, 신입생때부터 캠퍼스 커플 소리를 듣던 여자는, 갑작스러운 우리 결혼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었다. 축하선물을 들고 신부 대기실로 직접 찾아올만큼 쿨하더니, 둘은 아직도 여전히, 무척이나 친한 사이였다. 수시로, 둘은 참 다정하게, 대화를 했다.


여: 우울증 무서워. 약 좋아도 소용없어

남: 늘 미안하지, 나 때문인것 같아

여: 핑계야. 그땐 다 어렸어. 누구랑 결혼 할지 확신 있었나

남: 애 생기니까 확신되더라.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여: 팔자나 운명이나 둘 다 니 복. 이왕 그렇게 된 거 멋지게 받아들이시게

남: 멋지긴 개뿔. 너 잘되서 다행


남편 폰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길게 없다고 생각하는지, 없는 척 하는 건지, 그 여자와의 카톡창을 닫지도 않았다. 한두번쯤 슬쩍, 톡이 자주오네 하고 던져봤지만,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일 이야기도 많고, 혼자만 빠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바람의 증거가 없는 한, 모든 게 미련스런 집착이나 질투로 보일거라는 생각에, 일단은 조용히 지켜보는 척 했다.


여: 동창회 와야지. 마눌 눈치보여 안됨?

남: 늦게까지 못 놀아. 잠잘때만 애들 얼굴 보거든ㅎ

여: 다 커서 편하지. 좋겠네

남: 그러게.. 근데 집에 가도 아기자기한 맛이 없어

여: 와이프랑 아직도 그래?

남: 더 사무적이지.. 맹숭X2. 어쩔땐 정략결혼했나 싶음. 룸메이트 같애.

여: 니가 엎지른 물

남: 알어, 죄값 중. 애들보고 산다는 게 맞나봐

여: 애 없었으면 그렇게 살 일도 없었지 ㅍㅎㅎ


남편도, 나와의 일을 후회하는 게 분명하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나면 병원 오픈때까지 느긋하게 둘이 산책도 가고, 함께 아침도 먹는다. 내 몫의 커피와 빵, 바나나까지 꺼내 놓는 걸 보면, 이상한 낌새는 전혀 없는데… 첫사랑 그녀와의 카톡을 다 사진 찍어 놓았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남편이 뭘 하고 있는지 병원 CCTV 를 살핀다. 텅 빈 데스크만 보이는 병원 입구. 가끔 유리 문 밖으로 그림자만 지난다. 카톡을 보냈다.

/한가해 보이네. 치료중..?/

답이 없다. 남편 병원 CCTV는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만 기록하지, 안쪽은 볼수가 없다. 가끔 피 흘리거나 시끄러운 일도 있어서 딸들을 못 보게 한다. 아마 안쪽에서 치료중이거나 간단히 요기라도 하는 중 일거다.

/몇시에 들어와?/

한번 더 톡을 보냈다. 뒤에 뭐라 하나, 하트 이모콘을 보내볼까 망설이다 그만 두었다. 하트를 보내는 건 늘 남편이다. 밥먹었어? , 이제 좀 한가하네 ♡, 면담 몇시야? , 저녁에 치킨 사갈까? 


여전히 답이 없는 폰을 내려놓고 블로그를 열었다. 우울증으로 힘들때부터 조금씩 키워오던 내 아바타다. 우리 아이 좋은 생활 습관 만들어주기 – 건강 댄스, 블로거 윤지윤, 현 반포 롯데 문화센터 강사/ 전 아름 유치원 교사/ 전 신반포 중학교 무용 강사/ 전 양재 스포츠 센터 강사/ 전 EBS 모닝 요가 강사… 나는 전직만 많다. 아이때문에 고정으로 일을 할 수 없다. 어려서야 부모님이 봐주시고 여기저기 맡길곳이 많아 더 쉬웠다. 어느 순간 다 접고 학부형으로만 살게 되었다. 아이들 뒷바라지가 본업이고 일은 취미… 아무리 좋게 표현해봐도 쏟아지는 허무함, 자포자기…


뻥 뚫린 가슴속 공간을 채워주는 건 블로그 밖에 없다. 늘 가상의 공간에서 무용을 가르친다. 그 안에서는, 아직도 내가 최고다. 이 모든게, 남편 때문이다...! 나도 한때는 대회를 휩쓸고, 장학금으로 학교 다녔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매력없는 아저씨와 사는, 가장 매력없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아줌마가 잠시나마 잊었던 꿈을 다시 꾸는 건, 역시나 나의 가상 세계, 거짓으로 꾸미는 블로그 뿐이다. 오늘도 내 블로그에는 벌써 수십명이 왔다갔다. 회원수 1800명… 아이들 댄스 뿐 아니라 연령별 다이어트 방법, 건강 간식 요리법, 혈액순환을 위한 마사지, 커플 요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했다. 이게 정말 내 스튜디오라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이 운영하는 동물병원 윗층에 한 5-60평만 되어도 충분한데… 꿈… 이다. 서울 안에 두세곳쯤 센터도 내고, 입시 전문이나 다이어트 전문도 좋다. 아버지 병원과 잘 엮어서 재활치료도 노려볼만 하다. 비지니스 아이템은 이렇게 많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존심에 단 한번도 입밖으로 낸 적이 없는 사업…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죄로 찍소리 못하고 손한번 벌리지 못하는 나... 가족만 아는 성실한 남편을 차마 쥐어짜지 못해 행복한 척 웃고 있다. 엄마 닮아 팔다리 길쭉길쭉한 딸래미에게 예체능은 안된다 세뇌시키며, 대놓고 이공계로 꼬시는 우울한 엄마다.


/꼬마들은 배에 너무 힘주지 않게 해주세요. 허리가 뻣뻣하면 다음 동작이 힘들어요/

/다른 노래도 괜찮아요, 아이가 좋아하는 걸로 틀어주세요. 최고로 업 되도록!/

/엄마아빠가 같이 하면 더 좋아해요. 둘이 다정하게 춤추는 센스!/


벌써 수년째, 비슷비슷한 질문들에 그 비슷비슷한 답글을 달아준다. 정작 나는 이 중 아무것도 내 아이에게 해 준 적이 없지만, 좋은 엄마인 척, 행복한 가족인척, 이런 건 눈 감고도 올린다. 이젠 앞줄 몇 단어만 읽어도 질문이 뭔지 보인다. 열혈 팬들의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예쁘세요 하는 댓글들을 보며 현실에 없는 행복을 찾았다.


/댄스 뿐 아니라 뭐든 다 잘 하실것 같아요. 부러워요. 전 언제 그렇게 될까요?/

/가족이 함께 하는 댄스라니, 아이디어 좋아요. 목하신가봐요 ^^/

/남편 분은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을거에요. 잉꼬부부시죠? 선생님 화이팅!/


남편… 사실 내 속 마음은, 남편이 정말 그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그의 표현대로, 아마 나도 그를 룸메이트 쯤으로 여기고 있나 보다. 아이들의 아빠라 해도,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그냥 오랜 친구로 남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벌써 다 알지. 남편 말로는, 이진혁 선배 준다고 연구실 리모델링하느라 정신 없대. 미국에서 연구비를 몇 백억을 가져온다던데? 학과장으로 바로 온다는 얘기도 있고…”

학교 사정에 훤한 친구와 통화를 했다.

“들어오면 거하게 한번 모여야지. 동문회를 하든지.. 흑석동 아파트 얻는다는데, 너희 집하고 가깝겠다.”

“안그래도 우리 아저씨는 벌써 보고 싶단다. 뭐 그리 친했다고...”

“역시 너네 남편이 사람 참 좋아. 우리도 불러줘, 전공 달라도 같은 학교잖아.”

“귀찮어, 만날 일이 있을까. 뭐 대충 얼굴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한데..”


거짓말이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모르게, 그의 페이스 북과 인스타그램은 물론, 재직중인 미국 대학 홈페이지까지 들어가 근황을 살피고 있었다.

“당연히 기억 해야지, 그 선배가 인물은 제일 괜찮았잖아. 야, 너 솔직히, 둘이 좀 좋아했었지? 둘이 있으면 좀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그치?"

아차, 뜨끔하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무슨, 말도 몇번 못 해봤었어. 어쨌든 잘 되서 오니까 좋네. 조만간 보자, 오랜만에 모이면 반갑겠다.”


버릇처럼, 또다시 진혁의 페이스 북을 살폈다. 벌써 몇년째 하루에도 몇번씩을 체크한다. 아이는 없는지 사진이 한장도 없다. 내 딸들을 보면 예뻐할까? 2-3년 전부터 보이던 결혼, 가정 관련한 댓글들... 부인 사진도 못 본 것 같다. 추측이지만, 혹은 바램이겠지만, 나이 먹고 등 떠밀려 시작한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일 얘기만 가득한 거다. 박사 마치고 교수 임용, 캐나다 학회, (아, 나도 캐나다 놀러 갔었는데...) 재미 한국인 과학자 상 수상, 논문 발표... (내가 없다..! 나는 있지도 않는 댄스 학원이 아니라, 이 사람 옆에, 이 시상식에 꽃다발을 들고 함께 서있어야 했다...) 휴가에는 알라스카에 갔었다.. 덴버의 모임은 산자락이 보이는 건물에서 했구나...  


바빠보였다. 내 이름, 내 사진 한번 나오지 않는 진혁의 페이스 북을 매일같이 뒤졌다. 집구석에 망가져있는 나와는 다르다. 갑자기 결혼 해 버린 나한테 실망해서 공부만 하다가 늦게 결혼 했나? 내가 혼전임신으로 애 낳은 것도 동창 한두명쯤은 말했으니 알겠지. 혹시 일부러 나 보라고, 이렇게 꼬박꼬박 근황을 올리나? 지금도 날 생각할까? 일부러 본명으로 했으니, 내 블로그도 찾아 봤겠지. 어떤 기분일까? 그리운가.. 다시 한국에 오는구나… 만나자고 전화라도 오면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 딱 한번의 연애, 밤새 설레던 유일한 남자, 내 짧은 첫 사랑...똥 밟아 깨져 버린, 아, 정말 한탄스러운 그날... 그 놈...    


"와이프님, 다녀왔어요."

남편이 들어왔다. 황급히 노트북을 덮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카 케이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밤중에 왠 케잌?"

“그냥, 단게 먹고 싶어서. 한조각 괜찮아?"

“그래, 홍차 내릴께.”

남편이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물을 올리고, 바로 전화기부터 확인한다. 역시나, 그녀와의 대화창이 열려있다.


남: 특별한 날이잖아. 진짜로 깜짝 놀랄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좋아하려나

여: 새삼스럽게 무슨. 돈으로 줘

남: 니가 그래서 시집을 못가는거야

여: ㅋㅋㅋ 왜? 꽃다발이라도 받고 감동하길 바라나? 꿈 깨

남: 향수 좋은 거?

여: 안써봐서 모름. 가뜩이나 약품냄새 진동하는데 향수까지?

남: 여자 너무 어렵다

여: 머리 좀 굴려. 와이프한테 슬쩍 물어보던지? 뭘 선물하든 감동 예정 중. 정성이 갸륵 흑흑


남편은 결국 그 여자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 줄 모양이다. 내용을 보니 여자는 좀 튕기는데 혼자 열심히 매달리는 것 같다. 창피하다. 좋지 않은 부부사이를 떠벌리는 것도, 다 큰 딸을 둘이나 둔 애비가 한눈 파는 것도… 정말, 이만큼을 살면서도, 단 하루도 이 남자가 맘에 든 적이 없다. 그래, 좋다, 이참에 보내달라면, 깨끗하게 보내준다. 가라. 그토록 애틋한 첫 사랑에게…


“안 자고 있었어? 블로그 했구나?”

남편이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와 앉았다. 완전 아저씨다. 빗질 좀 하고 나오래도 꼭 말을 안 듣는다.

“응, 그냥 심심해서.”

“나도 요새 그런데.. 우리 내일, 병원 하루 닫고 드라이브 가자.”

“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케이크 조각을 잘라 건네며 물었다. 본인이 아파도 쉰 적 없던 사람이다.

“내일은, 둘이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다른 약속 없지?”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왜? 뭔데?”


나도 모르게 짜증이 팍 올랐다. 드디어 왔구나.. 그 여자 이야기를 할거다. 침착하자… 별거? 이혼? 졸혼 먼저...?? 말만 꺼내봐라, 내가 먼저 나가라고 소리를 빽 질러 줄거다... 찻잔을 들던 남편이 웃는다. 가벼운 한숨처럼 한번 후 불고 그냥 내려 놓는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해? 나는, 마누라랑 데이트도 못하나?”

안경 너머로 잔주름이 눈에 띄었다. 구석구석 별 개성없게만 생겼던 얼굴에 제법 점잖은 분위기가 스친다. 줄어든 머리 숱 대신, 여유가 늘었다. 이제는 왠만큼 쏘아붙여서는 쫄지 않는다. 남편이 식탁 옆에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 꺼낸다.

“열어봐. 아는 것도 없고, 난 아직 그 향이 제일 좋아서…”


에스테 로더의 장미향… 그 여자에게 물어 보던, 그 향수..? 결국은 이걸 샀나? 그래서 이거 뭐? 어쩌라고? 별 말 없이 다시 박스에 넣었다. 탕 소리가 나게 테이블 한가운데에 세우고, 진정하려 홍차 한 모금을 마셨다.   

“내일이, 우리 그 날이야, 우리 기념일. 잊었지?”

그 날이라면, 그 초초초대형 사고를 치고 내 인생을 쫑냈던, 2002년 월드컵.. 안정환이 골 넣던 그 쓸데없이 뜨겁던 여름 날…!

“알어, 넌 기억하기 싫겠지만, 나한테는, 널 얻은 날이고.. 딸래미가 생겨난 날이고… 이제는 좀 기념하고 싶어. 왜? 아직도 그렇게 싫어?”

할 말이 없다. 그럼 그 여자 주려던게 아니라..  


“지윤아, 나는, 지금도 많이 미안해. 누가봐도 과분하고.. 너는 나 만나서 다 망쳤고… 그래서 노력한다고 했는데, 네 맘에 드는게 너무 힘들어. 여러번 얘기 했잖아. 그날은 어쩌다 실수였지만, 그 훨씬 전부터 많이 좋아했었다고. 오늘, 진짜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할께. 그때, 네가 진혁이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둘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사귈것 같기도 해서, 내가 고백 못하고, 혼자서 좋아했었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을까.. 무슨 답을 기다리나..


"그리고, 사실 네가 아직도 걔 못 잊는 거 알아. 홈페이지 맨날 들어가고, 여기저기 걔 이름, 사진.. 하루 종일 구글가서 찾고 있는 거 다 아는데, 실망이고, 화도 나지만, 내가 끼어든거니까, 아무말 못했어. 너 나 때문에 우울증 앓고 했던 거잖아, 책임도 있으니까..”

남편은 침묵하는 내 쪽으로 향수 박스를 밀었다.


“넌 아마 기억 못할거고, 뭐, 하기도 싫겠지만, 그날 너 이거 뿌렸었다. 경기 끝나고 전부 술 많이 취했는데, 네가 이 향수 제일 좋아한다면서, 막 쫒아 다니면서 뿌리고 다녔어. 애들 다 술취해가지고 막 뛰다가 바닥에 구르고.. 나중에 우리 다 냄새가 똑같았잖아.."

기억에 없다. 처음 듣는 얘기..?? 이미 많이 취한 다음인가보다...


"빈 향수병 버리면서, 내가 다음에 돈 벌어서, 새거 사준다고 약속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지금까지 사준적도 없고, 사실 네가 그날 이후로 향수 같은 거 뿌린 적도 없잖아. 그리고, 그날처럼 깔깔거리고 웃는 것도 다시는 못 봤고... 그게 다 나 때문이라, 많이 미안해.”


그만 자려고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남편이 뒤에서 안는다. 축축한 머리카락에 흠칫 놀랐다.

“내가 본 것 중에, 너, 그날이 제일 예뻤다. 요새도, 그때만큼 이뻐.”

"아유, 차가워, 이거 놔."

“윤지윤, 나 노안 왔어. 눈이 침침해서 잘 안보여. 그래서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응? 진짜야.”

남편이 웃었다. 같이 피식 웃었다. 팔을 풀어 남편을 떼어냈다.


"저리가, 잘거야."

“야, 너 때문에 나 늙는거 안보여? 인제 나 좀 봐줘라, 응? 아, 이진혁이 한국 온대잖아! 나 어떻해?”

쿵 닫힌 방문 밖에서 징징거린다.

"너 인제 그 자식.. 그만 검색해! 또 그러면 나도 가서 악플 달거야!"

달그락 달그락.. 찻잔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남편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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