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2월29일

4화. 숨은 그림 찾기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에 숨겼나

by 신소운

4.1 수배


"임산부를 놓쳐? 야!!! 너 미쳤지? 네가 제 정신이면, 혼자 걷기도 힘든 여자를, 낼모레 애 낳는 여자를 도주시켜? 불쌍해서 놔줬냐?"

석호가 전화를 뺏는다.

"위치가 어딥니까? ... 지원 요청하고 기다리세요. 부근에 CCTV 있는지 파악하고, 경비실 연락해서 차량통제합니다..."


넋 나간 얼굴로 실실 웃고마는 종태. 조용히 남은 양주병을 챙겨 넣는 시환. 때마침 흰장갑을 끼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지율.

"뭐 놓쳤습니까?"

"선배, 쉬는 날 아니에요?"

시환이 반가움을 애써 참으며 반긴다. 아는 체도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쉴만하면 띵, 쉴만하면 띵.. 계속 문자가 오잖아요. 신경쓰여서... 차라리 현장에 와있는게 낫지... 누군데 놓쳐요?"


종태의 눈치를 살피며 시환이 조용조용 답한다.

"여기 사장 부인이요. 예정일 얼마 안남은 임산부인데, 병원 가는 길에 사라졌대요."

"바디체크는 하고 내보낸거죠?"

무심히 한마디 던지는 지율, 시환을 도와 몇개 남은 양주를 박스에 담는다. 긴 한숨과 함께 무너지는 종태... 허공에서 답을 찾는 석호... 두 사람을 돌아보고 분위기 파악한 지율. 종태를 향한 건지, 석호를 향한 건지, 애매하게 한소리 한다.

"범죄 현장에서 살던 사람을, 바디체크도 안하고 고이 내보냈습니까? 벌써 다 처분했겠네."


"야, 내가.. 임산부를 바디체크 할 일이 뭐가 있어? 그것도 멀쩡히 살아있는 걸.. 이런 젠장..."

종태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담배 한대가 절실히 땡기지만, 대신 또 한번의 긴 한숨으로 참는다.

"죽은 사람만 해보셨어요?"

시환이 묻는다. 지율이 툭툭 치며 입막음 시킨다. 종태가 중얼중얼 자책한다.

"당연하지. 죽은 임산부야 많이 했지. 신분증도 찾아야하고, 팔다리도 찾아야하고, 맞은거, 부러진거, 멍든거... 귀금속, 증거, 단서... 다 뒤져봤지. 이런... 제발로 걸어다니는 임산부를 세워놓고 뒤질일은 한번도 없었잖아.. 빌어먹을... 애 가졌다고 방심했어..."


"문 형사님, 아까 제일 먼저 들어오셨을때, 여자가 아이 방에 있었다 그랬죠? 거기 수색하셨습니까?"

석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종태. 쏜살같이 작은 방으로 뛰어간다.

"류 형사, 밖에 폴리스라인 치구요, 과학 수사대 연락하세요. 지원 필요합니다. 강 형사님, 여자 신원 파악하고, 근처 병원, 조산원, 보건소와 약국까지 전부 공문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려는 석호를 종태가 문 앞에서 막아선다.

"스톱... 생각해봐요, 팀장님. 아까 내가, 여기서 이렇게 들어가려고 했을때, 여자가 저쪽편을 보고 앉아있었어요. 저 가방도 지금하고 똑같이 열려 있었고, 방은 아주 깨끗했어.. 그러면 물건을 가방에 넣고 있는 중이었을까요, 꺼내고 있는 중이었을까요?"

"꺼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부피가 크지 않다면, 옷 속으로 넣었을겁니다. 아무도 임부복을 들춰보지는 않았을테니까요. 그래도 뭐라도 남았을거에요. 다 가져갔으면 이렇게 빨리 도망가지 않아도 되죠. 저라면, 어디에 일단 숨겨놓고, 아이 낳고, 몰랐던 척, 자기도 속은 척 했을 겁니다. 여기에 뭔가 못 가져간게 있으니까, 이렇게 급하게 사라졌겠죠."


"역시, 머리 좋아요. 현장 경험 까짓거 좀 없어도 잘 하시네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죄송하지만 이 방은, 저나 팀장님 말고, 류시환이가 들어갔으면 합니다. 여기서 뭐 하나 더 망치면, 형사 인생에 제대로 똥칠합니다. 우리가 거실을 맡고, 류형사가 이 방을 맡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죠. 그래도, 문 형사님... 너무 자책하지 마시구요, 임산부 일은, 아무도 생각 못했습니다."

석호의 위로에 종태가 웃는다.


"자책으로 들렸나요? 내가 너무 착하게 말했나.. 팀장님 욕한건데.."

뒤돌아 거실로 가는 종태, 큰 소리로 시환을 부른다. 뒤늦게 알아들은 석호, 씁쓸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도구함을 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시환에게 길을 비켜준다.

"외사과 특별팀 이석호입니다. 급하게 협조 공문 부탁 드립니다.... 예, 지금 바로 보낼거구요..."



4.2 경찰서


새벽 두시, 야간 근무하는 경찰들. 얼굴에 피곤과 짜증이 가득하다. 술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가 계속되고, 싸우고 뻗은 아이를 데리러 오는 부모의 모습도 보인다. 자기들끼리 투닥투닥 해보지만, 주먹도 못 휘두를만큼 다리가 풀린 남자, 누구한테인가 계속 소리 지르는 여자,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잠바를 덮고 졸고 있는 남자 - 고시원의 존 바울이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다. 잠꼬대를 한다.


"... 우리 나라 좀 찾아주세요... 우리 나라 최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존, 경찰이 다가간다.

"선생님, 댁으로 가세요. 집 있으시잖아요. 모셔다 드려요?"

"없어요, 우리 나라 없으면, 집도 없어요... 나 혼자 안가요..."

"또 오셨어요? 이젠 술만 취하면 여기 오시네."

다른 경찰이 다가와 커피 한잔을 건넨다.


"길거리보다는 안전하지만, 무슨 여인숙도 아니고.. 자기 발로 걸어들어와서 자는 사람들 꼭 있어."

"놔둬, 나가서 죽으면 더 복잡해져. 여기서 재워."

"자리가 없어요, 꼭 바쁠때 오더라."

"그럼 대낮에 오냐? 이 와중에 잠이라도 조용히 자는게 어디야."

경찰서 안을 한바퀴 둘러보는 두 사람..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중에 자식 키우면, 절대 술은 못먹게 할거야. 해 있을때는 멀쩡하다가 해떨어지면 다들 왜 저래?"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우리 나라 예쁜 나라...!"

존 바울이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시작한다.

"에휴, 우리 선생님, 드디어 시작하셨다, 불쌍해.."

"사기 당하셨다면서요?"

"응, 안됬어.. 우리 큰애 초등학교 다닐때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원어민 교사 있잖아, 그거였는데.. 여자가 홀랑 다 들고 튀었지."


"그 여자, 혼인 빙자로 여러 건 있잖아요. 아직 안 잡혔죠?"

"아유, 그 여자는 빙자 정도가 아니야. 서류 위조해서 결혼한 척 해서 안심시키고 살다가 휙 사라져. 지는 벌써 다 큰 애들이 둘이나 있는 유부녀인데, 현재 법적 남편이 저 선생님도 고소했을 거야, 난리였는데... 상간남 위자료 소송한다고. 참 나, 하나 둘이어야 말이지."

저쪽에서 바닥에 쏟은 토사물을 치우는 경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둥글게 둥글게 손으로 비비며 그림을 그리는 남자..

"아우, 드러워... 하지 마시라고요! 저쪽으로 가서 앉아있어요!"

간신히 입만 갖다대었던 커피를 내려놓고 도우러 간다. 물티슈를 다 쓰고 없다. 신고 전화를 받던 경찰이 묻지도 않고 무심히 휙 던진다. 한손으로 캐치해 남자를 닦는다. 이쯤이야... 일상이다.


갑자기 시끄러워지며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피가 덜 나는 쪽이 잡은 놈, 더 나는 쪽이 잡힌 놈...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들어 하나씩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데스크로 간 진우가 엉망이 된 얼굴을 닦는다.

"넷이요. 둘이나 셋 쯤은 놓친것 같아요. 확실한건 둘... 아야아..."

"귀 뒤에서 흐릅니다. 이쪽에..."

서류를 작성하던 경찰이 대신 손을 뻗어 안보이는 곳을 휴지로 꾸욱 누른다.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찡그리는 진우.


"아우, 귀 떨어질 뻔 했어. 뭘로 맞은거야..?"

다친 곳을 살피는 경찰.

"칼 같지는 않은데, 다른 날카로운거에 베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넷 잡으셨으면, 이정도 값은 치루셔야죠."

"야이 씨, 니가 해. 귀 한쪽 떼어주고 올 뻔 했다니까..."

"강형사! 바쁘다, 대충하고 와라!"

강력팀 조 팀장이 부른다. 어이없는 표정의 진우.


"아무도 내 귀에 관심 없어? 한 쪽 없으면 안들릴 수도 있는데?"

"못듣고 출동 안 가면 좋죠. 저랑 여기 계십시오, 여기도 바쁩니다."

"아, 뭐해? 빨리와!"

"아, 진짜 아프다고요~"

조 팀장의 재촉에 엄살부리는 진우. 피에 젖은 휴지를 던지고 새로 둘둘말아 귀 뒤를 누른다. 투덜거리면서도 종종 거리며 따라가는 모습에 웃는 경찰들이 환호해준다.

"강진우 잘했다! 멋있다!"


"저 정도면 깨끗한거지. 많이 안 다쳤네... 특별팀은 오늘 완전 새 됬다며?"

"첫 출동이었잖아, 뭘 알겠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여자 하나 그냥 보냈대, 임산부라고... 근데 그게 공범인거야. 마약 들고 튀었대."

"아이구야, 크다..."


"크지.. 근데 그게, 꼭 하나씩 그렇게 망한다? 임산부, 할머니, 선생님... 절대 아닐것 같은데, 뒤통수 빡! 깨뜨리는 여자들이 있어."

"문 형사님 완전 꼭지 돌았을거야. 모르는 척 해."

"그러니까, 리더가 중요한거야... 이석호 팀장은 뭘 안다고 갑자기 현장 나와서 팀장 달았어? 진짜 위에서 내리 꽂은거야?"


"그렇다잖아? 경찰 출신의 검사가 필요하다는데... 정말 우리를 위한건지, 윗대가리들을 위한 건지 모르겠지만, 두고 봐야지."

"협조들 해줘. 있어서 나쁠건 없잖아?"

"두고봐, 오늘 공범 날리고도 문책 안 당하면, 정말 큰 빽이 있는거야..."

"야, 야.. 이 팀장 부모님 두분 다 검찰청 계시잖아. 한명은 판사, 한명은 부장검사...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근데 왜 아들은 경찰대를 갔어요? 서울 법대 가는 거 아닌가? 경찰 체질도 아니신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집에서 쫒겨난거잖아. 아직도 사이가 안 좋고 연 딱! 끊었대."

"에이, 설마... 검사 집안이 그런 걸로 자식을 쫒아낼까요?"

"검사 집안이니까 가능하지! 그러니까 그런 걸로 쫒아내고!? 우리같이 보통 사람들은 이해 못하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는거야!"



4.3 주치의


고급 레스토랑의 작은 방. 차분한 조명 아래 식사하는 석호와 한 여자. 오세영 - 지율의 주치의다.


"... 미국에 임상 1년짜리 실습 자리가 났어요. 범죄 피해자가 많은 곳이라서 내가 원하는 걸 할수 있겠다 싶어서 얼른 갔죠. 거기 닥터가 자기 상사를 소개시켜줬어요. 그 분이, 자기 애들은 다 키우고, 한국에서 애들 셋을 입양했대요. 막내 아이가 아주 흥미로운 케이스였다고, 한번 만나보라 그래서 갔었어요. 그게 강형사였어요.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다 큰 성인이었는데, 그 양어머니가 정신과 의사시니까, 아이가 자라는 걸 쭉 지켜보면서, 논문을 쓰신게 있더라구요. 범죄 피해 아동의 심리, 반응, 행동, 증상, 부작용, 갈등, 극복 혹은 그냥 끝도 한도 없는 도전.. 그런 거. 제일 가까이에 계셨으니까 정말 세세한 것 까지 다 기록하셨대요. 내 오피스에 찾아보면 아직 있을 거에요. 하나 보내드려요?"


"글쎄, 거기에 내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나? 너무 개인적인것까지 알아내는 것 같아서 좀.."

"지금의 행동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죠. 어릴때랑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사건 자체가 이 사람 인생에 너무 큰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번 읽어볼만 해요. 치료 과정에서 혼란이 많았던 케이스에요. 보통의 피해자들하고는 확실히 달라요."


"보통 피해자라면, 최대한 잊으려고 하잖아. 현실 도피나 부정.. 어린 아이가 그정도 충격을 받았으면, 직접 목격한 것도 혼돈될만큼 심하게 망가졌을텐데?"

"그런데 강 형사는, 정 반대로, 어린 나이였는데 사건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컸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잊어버릴까봐 계속 되새겼어요. 지금도 몸에 문신이 있어요, 봤어요? 강도 진압하다가 칼을 맞았는데, 그게 흉터로 남잖아요? 거기에다가 엄마 이름하고 살해 당하신 날짜를 새겨 넣었어요. 다음 상처에 오빠 이름하고 죽은 날짜, 그 다음에 계속 하나씩, 하나씩, 자기가 알아야하는 뭔가를 덮어썼어요. 언제 또 사고같은게 생겨서 자기가 기억을 잃게 되면, 그걸 봐야 한다고, 이매일이랑 노트, 자기 몸에다 써 놓는대요."


"양어머니가 쓰신 논문에도 보면, 어린 시절의 그 아이도 하루종일 그림을 그려요. 근데 그게 흔히 보여지는 범죄 이후의 공포나 분노, 피해망상.. 이런게 아니라, 자기가 본 범인의 얼굴 일부, 문틈으로 보였던 그 사람의 왼쪽 눈하고 뺨, 흉터, 머리카락, 야구 모자, 우비... 도주할때 타고 간 오토바이... 그걸 수백장, 수천장을 그려요. 안잊어버리려고요.


그것 때문에 더 심한 악몽을 꾸고, 음식물을 토하거나 자해를 해도, 그래도 계속 반복하면서 범인이랑, 문틈으로 목격한 오빠가 살해 당하는 장면, 거실에서 있던 시신을 담은 바디백의 위치.. 마치 몽타주나 사건 파일 만들듯이 꼼꼼하고 아주 정확해요. 논문에 올린 사진을 보면, 그림 여러장에 피 묻은 발자국이 있는데, 그 위치랑 크기가, 수없이 많은 그 그림들 속에 완벽하게 일치해요. 어떤건 신발 밑창, 어떤건 그냥 발... 바닥이랑 벽에 묻은 혈흔... 어질러진 거실, 가구... 잠깐 지나가면서 봤을텐데 머릿속에 뚜렷하게 박혀있어요. 그만큼 수많은 반복과 암기를 해 온거죠."


오세영이 잠깐 말을 멈춘다. 석호를 살핀다. 식사를 하던 손이 멈추고 눈이 마주친다.

"근데 선배, 정말 이상한게 뭔지 알아요?"

세영이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을 못했대요. 예를들면, 살인 사건이 났던 자기 집 주소, 다니던 학교, 친구들 이름, 할아버지 할머니나 다른 친인척, 학원... 그때 태권도를 다녔다는데, 그런 것도 기억을 못하더래요. 이상하죠?"


"충격이 너무 크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잖아? 나이도 어릴때니까.. "

"해리 증후군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사건을 기억 못해요. 실제로 기절했거나 경황이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가장 충격이고, 놀라고, 무서우니까.. 심리적으로 딱 그 순간만 기억을 못하고 건너 뛰는거에요. 심한 경우는, 몇 시간? 한나절? 며칠까지도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범죄를 당한 사실 자체를 모르기도 하구요.


근데 강형사를 보면, 하필 제일 무서웠을 그 순간만 기억하고,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자기 형제가 몇명인지도 몰랐대요. 오죽하면 아버지가, 전에 찍었던 사진이랑 영상이랑 계속 보내주고, 기억 돌아오게 해볼려고요.. 그걸 자꾸 보니까 학습의 효과로, 아 오빠가 있었구나, 엄마랑 이렇게 놀았구나, 이런 정도지, 어린 시절이 없어요. 물론, 당시에 열두살이었고, 사건 이후로 한동안 말을 안해서, 그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거에요."


"말을 안했어? 실어증 같은 거 였나?"

"그건 아니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선택적 자폐라고 봐야죠.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거... 스스로 닫아 거는 거에요. 말을 안 할 이유가 있거나, 못 할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거기에 너무 빠져서 다른 게 다 그냥 관심없거나.. 사건 발생 직후 며칠동안은 수사에 협조도 하고, 증언도 했는데, 갑자기 입을 닫았대요. 이유는 모르구요. 아마 사건 파일 보시면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요? 유일한 생존자이고 목격자인데..


아무튼 지금도, 강 형사, 세상일에 관심없고, 다른 사람하고 공감을 잘 못해요. 남의 감정을 이해할만큼, 자기가 여유 있지 않아서 그래요. 무관심, 무감정... 자기 사건 속에서만 살아요. 근데 그런 모습들이 당시에는 아마... 처음에는 다들, 아이가 무서워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했을거에요. 거기를 떠나서, 좀 멀리가서 잊어버리면 낫겠지 하셨겠죠. 그래서 아버지가 데리고 나오셨을거구요."


"근데, 왜 친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입양을 갔어?"

"아버지도 애를 케어할 정신이 없었을거에요. 어쩌면 오히려 잘 된게, 강 형사 때문에 급히 나가느라고 본인이 학생으로, 아는 분 밑으로 유학을 가신건데, 그 교수님이 한국 아이 셋 입양하신 그 분이세요. 부인이 제가 만나게 된 그 정신과 의사고.. 그 분들이 먼저 제안 하셨대요. 아이 상태도 안 좋고, 돌아가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자기들한테 맡겨보라고...


그래서 아예 입양을 해서 치료 받게했는데, 초반에는 장기 입원도 많아서, 학교 대신 집에서 혼자 공부해서 대학도 좀 일찍 가고... 친아버지는 한국에서 살아도 연락 계속하고, 몇번 방문도 하셨구요. 어떻게 보면, 치료를 목적으로 한, 입양이라기 보다는 위탁 정도가 맞는 것 같아요."

"한국에 다시 들어온 건 뭐 때문이야? 범인 잡으려고..?"

"그런 건 기대도 안한다 그러는데... 직접적인 계기는, 2년 전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15년 넘도록 한국에 와본 적이 한번도 없다가, 사실, 살인사건 말고는 한국에 대한 기억도 없구요. 고국이라고 처음 와본 게 아버지 병원인거죠.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왔다갔다 했는데, 어느 날, 일이 생겨서 응급실을 갔대요.


근데, 갑자기, 누가 어린 시절의 자기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들어가던 기억이 나면서, 엄마랑 오빠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대요. 한국에 있어서, 그동안 잊었던 걸 하나씩 회복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돌아가자마자 한국에 국적 회복 신청하고, 작년에 여기 경찰 특채 되면서, 완전히 들어왔어요. 뭔가 기억 날 것 같다고.."


"기억은, 정말 돌아오고?"

"아니요. 아직... 지금까지 저랑 꾸준히 상담은 하는데.. 전에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전부에요. 그나마 이젠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말씀도 못하시고.. 더 이상 들을 이야기도 없을거에요."

석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영.

"지율이, 아직도 많이 불안정하죠? 못 자고, 못 먹고.. 걔, 울지도 않아요, 알아요?"

"...?"


"양어머니가 쓰신 논문에서 봤어요. 한번도 울거나, 화를 내거나...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다고.. 감정이 없는 거죠. 아무것도 못 느껴요. 너무 큰 일이 있었기때문에, 어떤 일이 생겨도 별거 아니에요. 그게 폭행이든, 방화든, 살인이든... 아직 자기 충격이 훨씬 더 커요. 아마 경찰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 때문일수도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강심장이다, 무모하다, 그정도겠지만, 사실은, 어떤 사태의 심각성이나 위험성을 잘 못 느끼는 거에요. 사람이 죽었다 그래도, '아, 그래? 죽었구나, 왜?'... 그렇게 밖에 안돼요."


세영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잇는다.

"... 선배처럼.."

석호가 의아한 얼굴로 세영을 본다. 어색함에 살짝 웃어보인다.

"내가...? 그런 적 없는데?"

"남 일에 관심 없고, 멍 때리고, 뭐든 비밀이고.. 혼자 사라져 잠수탔다가, 멀쩡한 척 돌아와서 아무일 없는 척 하고."

"성격이야."

"그래서 내가 채였나?"

"무슨 소리야, 사귄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사귄적이 없다고요. 이상하지않아요? 인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한번도 여자를 사귄적이 없어. 선배후배 안 가리고 여자애들이 줄로 섰는데.. 왜죠? 소문만 많았지, 여자 검사랑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확 때려치고 유학을 간 것도 아니고..."


"바빴어. 안되는 거 억지로 따라가느라 힘들었잖아. 지금도 매일 노력 중이야."

"적성에도 안맞는 걸 왜 붙잡고 있을까, 능력도 좋은 사람이...? 때려치고 갈 길 가지?"

"정신과 아니고, 점집이냐?"

"원래 촉이 좋잖아요. 나 같은 애가 경찰 계속해야 되는데, 선배는 밍기적거리고, 나는 뛰쳐나오고."


"강 형사나 잘 부탁해. 다행이다, 네가 언니 해 줘. 한국에 알고 지낼 사람이 있어야지."

"나 말고도 있던데? 삼촌하고 같은 팀이래요. 어... 문.. 형사님..? 가끔 얘기 해."

"문종태...?"

"이름까지는 잘 모르겠고.. 자기는 아는데, 그쪽이 자기를 못알아본대요. 그래서 요새 되게 재미있어하던데? 놀려먹느라고... 삼촌이라고 부르는 거 보면, 친했었나봐요."


"삼촌이면, 우리 어렸을때 보통, 아버지 친구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나?"

"그랬죠. 친 조카를 못 알아볼리는 없으니까, 아버지랑 친한 사람일거고, 경찰이셨으니까, 맞겠지."

"경찰? 아버지가? 친아버지?"

"친아버지, 양아버지, 두 분 다 경찰... 걔는 경찰에 관련된 거... 경찰관, 경찰서 마당, 경찰서 주차장, 경찰차... 경찰 들어가는 건 뭐든지,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안전하고, 좋대요."




4.4 사무실


바쁘게 메세지를 확인하며 계단을 오르는 석호.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무슨 일 있습니까?"

대답 없는 팀원들. 눈치만 살피는 시환. 석호 책상위의 서류를 가르킨다. 압수수색 결과다. 집안에서는 원하는 걸 찾지 못했고, 희망을 걸었던 양주에서도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다... GHB, 케다민, 졸피템, LSD...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집안을 몽땅 뒤지고도 또 허탕이다.


"거기 없으면 다른 데에 있겠지요. 이것 때문에 다운 되신 겁니까?"

"..."

"식사는 하셨어요? 나갈까요, 시킬까요?"

"팀장님, 아까 서장님이 찾으셨습니다. 아직 안 들어 오셨냐고.."

시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아, 그거요.. 괜찮아요, 전화 몇번 하셨는데 못받았어요. 다른 일이 있어서.. 어제 수색 건 때문에 부르시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리고, 저기.. 마약반에서도, 심증만 가지고는 자기들이 맡을 수 없다고.."

"메세지 확인했어요. 바쁘겠죠, 일이 많아서."

"그럼 저희는요..?"


"다른 일들 보세요. 할 일 없어요? 류 형사, 필리핀 실종 여성, 집에 가봤어요?"

"아직이요, 오전에 가려 그랬는데, 병원 진료가 있어서 두분 다 나가신대요. 있다가 오후에,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서 가 볼 생각입니다. 애하고도 직접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강 형사 같이 가실거고, 여청에서 누구 나와야죠, 아이가 어린데?"

"예, 그 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수고해요, 바쁘겠네.. 차 형사님, 문 형사님은, 게이브 조사 다 하신겁니까?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내보내기 전에 뭐 좀 알아내야 할텐데요."

"증거가 안 나올걸 아니까 꿈쩍도 안해요. 여자는 긴급 체포 받았는데, 이 사람은.."


"일단은 출국 금지는 요청 했습니다. 이 사람, 국적이 아직 벨기에고, 마약이나 강력으로 넘기기에는 증거가 없으니까, 문 형사님이 맡아서 진행하세요. 그리고, 조금 전에 연락이 왔는데, 신한 은행이랑 경기 은행에 여자 이름으로 계좌가 있습니다. 특히 신한 은행 명동 지점에서 VIP 개인 금고를 사용 합니다. 미리 연락 해 놨으니까, 바로 가셔서 안에 뭘 넣어놨는지 내용물 확인하세요. 다른 기관들도 요청은 했는데, 다른 사람 명의로 거래했다면,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기대 하기가 힘듭니다."


조금 의외라는 표정의 문종태. 메모 하는 손이 바쁘다.

"국내에 있는 외국계 은행들은, 아무래도 개인 정보라 그런지, 협조가 좀 늦습니다. 홍콩 HSBC 는 계좌가 있다고만 답이 왔고, 자세한 것은 알려줄수 없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아예 답도 없구요.. 이 사람이 외국인 신분인걸 감안하면, 아무래도 해외 은행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데, 단서를 하나라도 잡아야 공식적으로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건 여기까지이고, 다른 사항 있습니까? 제가 알아야 할..?"


"별거 없습니다. 아파트 부근에서 임산부를 태웠다는 택시 기사가 있었는데, 다른 여자였고.. 거기가 재개발 직전의 임대 아파트라서 CCTV가 별로 없습니다. 도로변하고 놀이터, 경비실에 있는데, 여자는 안 보입니다."

은석이 답한다.

"아직 아파트 안에, 지인이나 누구 다른 사람 집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시구요, 순찰 인원 줄이지 말고 계속 살펴 주세요."


"그런데, 팀장님.."

종태가 부른다.

"예."

"나온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은행에 협조 요청을 한다는 게, 그냥 혼자 덤빈다고 되지가 않아서요.. 정말 이걸 다 혼자 하셨습니까?"


메모하던 손들이 멈추고 시선이 석호에게 향한다.

"혼자 덤비니까... 되던데요? 아마, 문형사님 생각보다, 제가 조금은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태가 웃는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그맣게 박수를 친다.

"잘하셨습니다. 꽉 막혀서 답답했는데, 아, 진도가 좀 나가는 것 같아요."

"이제, 물증 부탁드립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야죠... 찾아야죠."


먼저 나서는 은석을 따라가던 종태가 잠시 멈추고 돌아본다.

"감사합니다. 심증만 가지고 일을 벌였는데, 믿어주시네요."

"문형사님 심증은, 도주자가 생겼으니 이제부터 확증입니다. 제가 감사드려야죠. 이 사건 잡은 것도, 저희 팀에 와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 우리 서장님이 머리가 좋아요. 사람을 은근히 잘 꼬득여... 그렇죠?"

석호가 웃는다. 역시 문종태는 눈치 백단이다.

"앉혀놓고 내 욕 했나? 성질 더러우니까 살살 달래서 잘 데리고 있으라고?"

"아닙니다. 강력에서 힘들게 모셔왔다고, 저보고 잘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나랑 인생의 반을 같이 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간질간질한 사이가 아니야. 이 팀장님, 거짓말을 진짜처럼 하시네. 은행 뒤지러 갑니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종태가 나가고, 한숨 돌린 석호가 지율을 본다.

"강 형사님, 점심은요? 식사 하고 가야죠?"

시환과 눈을 마주치는 지율.

"그게, 저희는.. 먹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책상을 보는 석호. 먹다 남은 바나나 우유와 빵 봉지, 과자 껍데기...


"강 형사는 습관이라고 해도, 류 형사까지 그렇게 먹고 괜찮아요?"

"저는 나가서 뭐, 잘 사먹습니다. 핫도그, 김밥.. 아직 초딩 입맛이에요."

시환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난다. 맞다, 아직도 그때 그 꼬맹이다...

"그래요, 좋아하는 거 먹어요. 강 형사님, 같이 다니면서 먹는 연습 좀 해요. 에너지 소모도 많은데, 한입씩 뺏어먹으면 되겠네. 파트너가 먹는 거는 안심해도 되잖아요."

"책임지고! 잘 먹이겠습니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나가는 두 사람. 석호는 닫힌 문 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강지율, 경찰 가족이었나... 서류를 찾아본다. 강지율... 가족란에 양부모 이름만 적혀있다. 이걸 찾는게 아니다... 이력... 서울 출생, 초등학생때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 16살에 GED (검정고시)... 뉴욕 NYU 에서 심리학 전공, 펜실베니아아에서 경찰 교육 과정 이수, 그리고 마지막에 필라델피아 경찰서에서 6년.. 경찰청 지원으로 범죄 심리 석사와 프로파일러 과정 이수... 거기까지다. 병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한국으로 귀화, 외사과 경위 특별채용, 특기는 외국어와 무도, 범죄 심리 상담... 상담이라... 지율의 과잉진압으로 병원으로 이송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개를 흔드는 석호..

"상담은 무슨... 범죄자 상담 두번만 시켰다가는..."


서류 맨 아래, 비상시 연락처를 본다. 가족관계가 아닌 두 사람의 이름 - 주치의 오세영, 그리고 문종태...! 정말 대한민국에서 아는 사람이 이 둘 밖에 없었을까... 지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아야 할 사람 치고는, 강지율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종태... 무슨 사이 일까..

/...그쪽은 자기를 못 알아본다고 재미있어하던데... 친했나봐,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세영의 말이 생각난다. 석호는 문종태와 비슷한 연배의 전직 경찰들을 검색했다. 아직 살아있고, 최소 2년 전이나 그 이전부터 일을 하지 못했고, 강 씨 성을 가진 남자... 경찰 가족을 상대로 한 보복 범죄도 검색해보지만, 원하는 걸 찾을 수가 없다.. 최소한 동 이름이나 사건이 난 연도는 알아야 한다..

핸드폰이 울린다. 서장이다. 아차.. 잊고 있었다..

"예, 서장님... 아닙니다,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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