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경찰서
휴게실을 나와 터벅터벅 계단으로 올라가는 시환. 반쯤 올라가다가 돌아내려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간다. 몇걸음 안걸었는데 팔다리도 저리는 것 같고, 숨도 짧아진다.
"힘들어요? 잠 못 잤죠?"
아침거리를 사들고 오던 은석이 양갱을 건넨다. 머뭇거리는 시환의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알아요, 웃긴데... 진짜 피곤할때는, 이게 최고에요. 지금처럼 뭐 씹는것도 귀찮을때 있잖아요. 문 형사님이 야근하시면, 이것만 드세요."
하염없이 엘리베이터만 바라본다. 매층마다 서면서 자꾸 위로만 갈 뿐, 내려올 생각이 없다. 힘이 없어 벽에 기댄다.
"으아, 이것도 맘대로 안되고... 그냥 걸어갈까요?"
"힘든데 기다려봐요. 곧 내려오겠죠.. 오늘은 다들 일찍 출근하는지..."
갈아만든 배를 하나 꺼내준다. 원샷으로 들이붓는다. 해장하듯이, 드디어 좀 살 것 같다. 그제서야 은석의 몰골이 보인다. 그도 출근길은 아닌 것 같다. 옷도 엉망이고, 머리도 헝클어졌지만, 역시 존경스럽도록 멋있다...!
"차 형사님도 못 들어가셨어요?"
"예. 퇴근하려는데 수배자 제보가 들어와서, 진우랑 같이 갔다 왔어요."
"원래 그렇게 막 이팀 저팀 같이 다녀요?"
"우리는 신생팀이잖아요. 아직 다른 팀에 비해서 업무량도 많지 않고... 강력은, 얼마전까지 하던 거니까, 같이 가자 그래서 갔어요. 진우가 도와준것도 있고, 저도 가서 품앗이 해야죠."
엘리베이터가 내려온다... 재빨리 빈 캔을 버리고 앞에 서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다 탈 수 있을까...
"근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깡패들 많이 잡아오셨다고.."
은석이 조용히 계단을 가르킨다. 그래, 그게 낫다... 걷기로 한다. 남들이 듣지않게 소근소근 이야기하며 계단을 오른다.
"리버타운 카지노요. 작년에, 소유주랑 투자자 몇명이 지분이랑 채무 때문에 다툼이 있었어요. 한 세번정도 크게 붙었는데, 합해서 한 여덟명 이상 사상자가 나왔고, 그때 수배 된 두명이 어제 나타난다 그래서 데리러 갔었어요."
"'데리러' 가요? 모시러?"
시환이 웃는다. 은석도 빙긋 웃어보인다.
"우리끼리는 '포기 캔다'고도 해요. 한포기, 두 포기.. 조폭이 캐러 간다구요."
"아, 조폭이.. 조, 포기..ㅎㅎ 아까 선배들 말하는 거 들었어요. 진우형이 세 포기 했다고.."
"강진우 잘 해요. 안 지쳐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가 똑같고... 진우는 아까 일 끝나자마자 강 형사한테 갔다던데, 시환씨는 아직 못 간거에요?"
"안그래도 가봐야되는데, 하필 딱 갈려 그러는데 지금 올라오라 그래서.. 에이.."
"누구요? 레드문은 이대로 그냥 묻어야 될 것 같던데.."
"예, 그건 그렇게 됬구요... 그 초등학생 엄마요, 필리핀 여자.. 온라인에서 찾았다는데 다른 사건이랑 얽혀 있대요."
"6층 가요? 사이버? 뭐라도 좀 먹고 하죠?"
"괜찮아요. 사건 맡으신 여청과 분이 지금 오고 계신대요. 같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보다 많이 아시니까."
"그래요, 살살 하고... 있다 봐요. 강 형사한테 가게 되면, 수고했다고 전해줘요."
은석이 4층에서 사무실로 향하고, 시환은 더 가야한다.
"내가 미쳤지.. 아, 힘든데 6층을 왜 걸어 올라간다고..."
띵...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잇... 지금 타서 금방 내리면 이상하겠지..? 까짓거 두 층인데.."
"시환씨?"
이석호다. 어제밤 클럽에 갔던, 병원에 갔던 그 차림 그대로다.
"어? 팀장님! 오셨어요? 지율 선배는요?"
반가움에 쪼르르 다가선다.
"아직 안 깨어났어요. 진우가 교대해줘서 들어왔어요. 보고 할 일도 있고.."
"정말 그냥 수면제래요? 다른 건 없구요?"
"아직 결과는 안 나왔는데, 의료진들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정량보다 많이 먹어서 실려왔을때, 증상이 딱 그렇대요. 증거물 채취하느라 검사 몇가지는 했는데, 다른 처치 필요없고, 가만 놔두면 8시간에서 10시간정도 지나서 일어난대요."
"수면제 먹인 놈 찾아야죠? 불법인데."
"문 형사님이 거의 찾으셨어요. 강 형사가 찍은 영상을 밤새 돌려보셨는데, 다른 거 먹거나 마신건 하나도 없고, 룸에 올라가기 직전에 마신 생수가 의심스러우시대요. VIP방에서 나온 빈 병들 다 검사 맡겼으니까, 오늘중에 연락 올거에요. 그 주변에 왔다갔다하던 웨이터들 찾느라고, 지금 화면이랑 사람이랑 대조 중이세요."
"어쨌든, 확실히 방에 들어가기 전에 마셨다는 건가요? 그 놈들이 먹인게 아니고?"
"일단은 그렇게 추정하는데, 거기있던 사람들 불러다 참고인 조사 해봐야하고, 그 사람들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시켰을수도 있어서요. 룸으로 보내기 전에 먼저 약부터 먹여놓느라고.."
"그런데, 그 약이, 다행이든 불행이든, 우리가 찾는 종류는 아닌 것 같고... 완전 별도의 사건이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마 피해도 크지 않고, 이정도는 생활안전이나 여청에서 종결하게 될거에요. 있다가 여청과 이정아 경사 출근하면 같이 이야기 좀 해요. 웨이터 찾는대로 속도 붙으면, 필리핀 여성 건이랑 병행해서 진행 하게요."
"안그래도 지금 사이버팀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경사도 거기로 올거구요."
"그래요, 일 보고, 사무실로 와요. 저도 얼른 씻고, 서장님 잠깐 뵙고 내려 올께요. 수고해요!"
석호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간다. 다시 계단을 오르려던 시환이 멈칫한다... 사이버팀 갔다가 다시 사무실로 와라...
"아이 C, 병원은 언제 가...?"
한번에 서너칸씩 계단을 오른다. 허벅지가 땡기지만 서두른다.
5.1.2 서장실
불편한 얼굴로 앉아있는 강력팀 조팀장. 커피가 다 식도록 입에도 대지 않고 있다. 역시나 유쾌하지 않은 표정의 서장이 입을 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찰은 조직이야. 서열이 중요해. 정 형사가 원인 제공을 했고, 충분히 경고 정도는 받을 일인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후배인 강진우가 주먹질을 하는 건 안돼지. 자네 생각은 어때?"
"가볍게 주의는 주겠습니다만, 그 이상은 안됩니다. 정상원이 그 자식이 먼저 헛소리했고, 강진우가 어디 다른데 불러서 팬것도 아니고, 공개된 장소에서 선배들 묵인 하에 한대 친거는, 교육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왜 지가 해? 위에 보고하고, 정상적인 절차 밟아서 징계를 주던가 해야지!"
서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이른 아침부터 보고 받은 주먹다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여자 경찰 하나 놓고 히히덕거렸다고, 그게 징계 받을만큼의 수위는 아니지 않습니까? 보나마나 흐지부지 시간만 끌다 처벌 피할거고, 문형사랑 다들 잘 아니까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했겠지요. 저는 그냥, 사내 놈들끼리 일하다가 생길수 있는, 별 일 아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당사자인 정상원이도 가만있는데, 어떤 놈이 고자질을 해서.."
"고자질? 야, 보는 눈이 있고, CCTV가 몇개인데? 바로 말 쫙 돌지 너 이게 조용할 거 같아?"
"잘 됐네요, 그럼 이참에 서장님이 정상원이 먼저 징계하세요. 걔 안그래도 여직원들 어쩌고 말 많잖아요! 품위 손상은, 강진우 하극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식이 윗사람 처신 못해서 생긴 거에요. 차은석이한테 안끌려간게 다행이지.. 대가리 두쪽나서 돌아올뻔 했구만.."
"그걸 말이라고 지금..?"
조 팀장이 슬그머니 서장 눈치를 살핀다.
"그러면 서장님, 진우요... 한 며칠.. 쉬게 하시죠?"
"무슨 소리야, 갑자기? 지금가지 애 편 들다가, 밑도 끝도없이 쉬래?"
"징계로 쉬는게 아니라, 그냥 뭐... 근신이나 자기 반성 정도..?? 휴가 비슷하게 머리나 식히라고.."
"미친 놈, 그게 지금 팀장이 할 소리야? 사고 친놈을 뭐 이쁘다고 휴가를 줘? 맨날 인원 없다고 징징거리면서.."
"서장님, 그게... 강진우... 곧 그날입니다."
멀뚱히 조 팀장을 바라보던 서장이 서서히 위자 뒤로 기댄다... 아이고... 낮은 한숨.
"벌써 또... 그래서 지금 전초전 인거야?"
"모르겠습니다. 근데 요즘 진우가, 강지율이한테 뭐가 좀 있는 거 같습니다. 어쩌면 지율이한테 신경쓰느라 무사히 지나갈지도 모릅니다. 이 녀석한테 동질감 비슷한, 그런걸거... 왜 그렇잖아요, 지율이는 오빠가 죽었고, 진우는 여동생이 죽었고... 그래서 좀 심적으로 챙기고 아끼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럴수도 있지. 같은 범죄 피해자 가족이고, 경찰 가족이니까..."
"강지율도 경찰 가족이에요? 그럼 오빠가 죽은 게 단순 강도가 아니라, 가족을 노린 보복 범죄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범죄자들만 보면 눈이 훽 돌아서 그런.."
"아직 몰라. 이석호가 강지율이 주치의를 만났는데, 친아버지가 경찰이었다 그러더대. 이름은 모르고.. 자네 누구 생각 나는 사람 없어? 지율이만한 딸이 있고, 일찍 퇴직한 전직 경찰 중에, 한 16년, 7년 전에 부인이랑 아들이 같은 날 살해 당한.. 내가 아는 강 씨 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어."
잠시 생각해보려던 조팀장이 이내 투덜거린다.
"아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찾습니까? 강씨 성 가진 경찰이 하나둘인가.. 뭐, 나중에 생각날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진우가 지금 지율이 병원에 가있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푹 자라고 할 거였으니까, 호출 안 합니다.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아마 며칠.. 지나도, 안 보일 수도 있구요.."
"야, 근데 그거... 언제까지 그렇게 놔둬야 돼냐? 강진우 일 잘하고, 예의 바르고 잘 알지, 다 좋은데... 너무 걔만 특별 대우하는 것 같잖아. 매번 병가 쓰고, 휴가 쓰고, 덮어주고, 쉬쉬하고... 남들 눈에 공평하지 않아. 내가 다 눈치가 보여, 알어?"
"그럼 어쩌시게요? 불러다 앉혀놓고 여기서 펑 저기서 펑, 폭탄 터뜨리게 하실거에요? 오늘도 봐요, 날밤 새고 들어오자마자 선배한테 주먹질 하지, 수배자 딱 두명 떴으니까 잘 데려오라고 보냈더니, 눈에 보이는 대로 아주 후두려 패가지고 9명을 엮어 왔지. 지금 아랫층에 자리가 없어요. 지율이 약먹인 레드문인가, 클럽 애들까지 다 몰고 와가지고.."
"그래서 어쩌라고? 강제 휴가라도 주라고?"
"이참에, 저쪽 정형사도 경고 한번 주시고요, 우리 진우는.. 하루이틀 근신시킨다 생각하고, 휴가 처리 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좀 봐주세요, 걔 불러봤자 사고나요. 차라리 잘됐잖아요? 지율이 옆에 붙여놓고, 거기만 신경쓰게 놔두면, 혹시 압니까? 동생 같은 애 챙기다가 올해는 조용히 넘어갈지? 아우, 저는 그 자식, 그날이 제일 무서워요."
서장이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눈을 마사지한다. 겨우 출근했는데, 벌써 피곤하다.
"어이구... 아니, 창창한 놈들이 왜 이렇게, 도데체 멀쩡한 것들이 없어...?"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린다. 이석호다. 조팀장이 시계를 보고는 벌떡 일어선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서장님, 우리 진우 잘.. 꼭, 부탁 드려요? 예? 갑니다.."
인사하는 석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조 팀장. 석호가 가까이 온다.
"부르셨습니까?"
"응, 앉아. 류시환이 보고서 올렸어. 레드문이랑 초콜렛, 같이 엮을 수가 없어서 허탈하겠지만, 그래도 수고 했어. 만든 놈은 잡아 넣었으니까, 특별팀으로서는 첫번째 종결 사건이야. 잘했어."
"강지율 경위가 입원 중입니다. 수사 중에 경구 투약된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것도 보고 받았지. 수면제라고?"
"예. 보통 7시간에서 10시간까지 잔다니까, 오늘 늦게나 일어날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몰라. 재워. 뭐가 걱정이야? 맨날 사무실에서 쪽잠 잔다며? 이참에, 그동안 못 잔거 좀 푹 자라 그래... 강진우가 옆에 있다고?"
"예, 안그래도 오전 업무 마치면 류시환 경위를 보낼까 합니.."
"아냐, 아냐, 놔둬. 안그래도 진우가 며칠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지율이 옆에 붙어 있으라고 해. 류시환이는 다른 업무 주고... 파트너 없으면 지가 더 바빠야지, 할 일이 두 배가 되는 건데.. 정신 멀쩡한 놈이 일하는거야. 그리고 자네는.."
목이 탄다. 서장이 다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셔버린다.
"지난번에 나랑 얘기했던 거 말이야, 강지율이 걱정되면, 심리 검사 받게 하자는 거...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여기저기 물어도 보고.. 그걸로는 아무것도 안 나올거야. 우리가 하는 검사라는 게, 거의 다 미국 꺼 그대로 가져온 거잖아. 그 녀석은 거기서 경찰 교육을 받았고, 그것도 하필 범죄 심리 전공이야. 모범 답안을 다 알고 있을테니까, 지한테 불리한건 언제든지 싹싹 피할수 있어."
석호가 끄덕끄덕 동의한다. 충분히 가능하다.
"일단은, 자네가 책임지고 잘 지켜보는 수밖에 없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빼. 특별팀에서 하는 일이 언어소통 도와주라는 거지, 누구 때려 죽이라는 게 아니잖아. 몸 쓰는 건 마약반이나 강력에서 다 해주는걸, 외사팀 특채씩이나 들어온 엘리트가 그렇게 주먹부터 나가면 곤란해. 안그래도 조 팀장이 자꾸 지율이 달라는데, 봐서 그쪽이 더 잘 맞으면 보내. 문종태랑 차은석이면 충분하지, 강지율이까지 거기 있을 필요는 없잖아? 마침 진우하고도 친하다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봐. 거기가도 잘 할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지율이 친아버지라는 사람은... 왜 찾아도 나오지 않는거지? 어느 동네였는지, 아버지 이름이나 피해자인 어머니나 오빠 이름 정도는 더 알아내.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 내가 더 궁금해서 안되겠어. 류시환이 한테 슬쩍 물어보게 하던가. 파트너 잖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 지율이랑 진우는 며칠 쉬는 걸로 알어. 일에 차질없게 인원 잘 돌리고, 당분간은 여청과 이정아 경사가 그 팀으로 출근할거야. 길어야 몇달이겠지만, 불편한 거 없이 잘 해주고."
5.1.3 사무실
똥 씹은 얼굴로 앉은 종태. 한손에는 핸드폰, 다른 한 손에는 볼펜을 돌리며 딴짓이다. 사이버팀과의 미팅을 석호에게 브리핑하는 시환과 정아.
"그러면 이 여자는 실종도 아니고, 범죄 피해자도 아니고... 불법 성매매 사이트의 실제적 운영자라는 거죠? 일회성 성매매가 아니라 회원제로 운영하고요?"
"그렇습니다. 흐엉씨는 이미 필리핀에서는 여러차례 처벌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십대때 길거리 성매매로 시작해서, 대학생이던 20대 초반에, 이미 카지노와 골프장 측의 소개로 외국인 재력가들을 상대하는 고급 윤락녀였습니다. 그런데, 피해 신고가 늘면서 한국으로 도망을 온 것 같습니다."
"피해 신고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마약류 강제 투약이 가장 많았습니다. 일자리를 준다고 속여서 여성들을 모집하고, 이들에게 약을 먹이거나 주사하는 방법으로 성매매를 시켰는데, 그 중 두명을 약물 과다로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약 2년 전에, 수배령이 내려지던 시점에 운좋게 홍콩에 있었는데요, 수배 사실을 듣고, 필리핀으로 귀국하는 대신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급하게 결혼을 합니다. 불법으로 국제 결혼을 알선하는 업체를 통해서, 지금의 남편 김형원씨와 혼인 신고를 했는데, 그때 사용한 여권도 가짜라고 하고요,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박선'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도 했습니다."
"남편의 개입 정황은 전혀 없습니까?"
시환이 답한다.
"개입이라기 보다는 모른 척 했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 알아봤는데, 남편 김형원씨는 어려서 뇌수염을 심하게 앓고 영구 장애가 남았습니다. 거동이 불편하고, 장애 수당외에는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머니 정씨 역시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두 사람 다, 흐엉씨가 제안하는 돈을 거절하지 못했을겁니다."
"돈을 받고 결혼만 해줬다..? 아이는요?"
"필리핀에서 혼자 낳았습니다. 한국계 혼혈이고, 아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습니다. 이쪽에서 혼인 신고를 먼저하고나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정아가 답한다.
"일단 알려진 직업이 없는 흐엉씨가, 생활비를 가져왔다는 증거는 있는 겁니까?"
"동네 분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김형원씨 가족은, 음식을 거의 다 배달 시켜 먹었고, 병원을 가거나 시장을 갈때에도 콜택시를 이용했습니다. 평소에도, 며느리가 사업을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번다고 자랑을 많이 했답니다."
"사이버 팀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거 이미 수사 중인 사건인거죠?"
"흐엉이 사용하는 이름과 신분증이 여러개라서 수사에 혼란이 좀 있었지만, 분명히 흐엉과 박선씨는 동일 인물이라고 합니다. 사이트를 여러개 운영하는데, 그중에는 모델 에이전시도 있고, 연예인 기획사도 있습니다. 주로 동남아 여성들을 공급해 온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 그동안 동남아 지역 신용카드 위조 건으로도 지능팀에서 찾고 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입니다."
"동남아 신용 카드요.. 그건 무슨 일이었죠?"
"5년 쯤 전부터, 한국 부유층 남성들의 신용카드가 해외에서 마구 사용된다는 신고가 늘었습니다. 이 분들을 추적해보니, 모두 신고 이전 4-5개월에서 1년 안쪽으로, 동남아로 성매매 골프 관광을 갔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관광 자체가 비밀이었던 사람도 많았고, 위조한 카드를 바로 쓴게 아니라 몇개월 후에 사용하는 방법을 썼기때문에, 주위 사람들이나 본인들도 그 관광과 연관이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또 여러개의 카드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는, 불법으로 사용 된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외환관리법 위반이라는 통보를 받고나서야, 뒤늦게 신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시환이 자료를 건넨다.
"액수가 엄청 나네요... 이 사람 현재 위치는요?"
"출입국 기록에 보면 나흘 전에 한국에 들어왔고, 한국 여권을 사용했습니다. 어제부터 출국 금지 상태구요, 자택과 아이 학교 주변에 순찰 요청했습니다."
"일단 지켜보고, 그럼 이제 여청에서는 아이 방임 문제만 진행하시면 되고, 흐엉씨 사건 자체는 계속 지능에서 맡겠네요. 류 형사는 사이버와 지능에 연락해서, 협조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하시라고 해주세요."
"저희는 또 손 떼는 겁니까?"
시환이 묻는다.
"이 사람은 이미 법적으로 한국 사람입니다. 따로 명령이 있지않는 한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알선 사이트가 다국적 회원을 상대로 하는 큰 조직이고, 서버도 해외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저희를 비롯해 여러 부서의 공조가 필요할겁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 한국 사람들의 피해 신고가 들어온다면, 그때는, 필리핀 경찰과의 합동 수사도 고려해야 할 거고, 그렇게 되면 저희가 수사권을 넘겨 받게 되겠죠."
"어느 세월에? 어떤놈이 성매매하고 제발로 피해자라고 신고를 해? 여청이 아동 학대나 처리하고 털어."
종태가 툴툴 거린다. 유난히 신경질이다. 석호가 분위기를 풀어보려 말을 자른다.
"임시로라도 이정아 경사가 파견 와줘서 다행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아직 기본 인원도 안 찼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팀장님. 제가 잘 부탁 드립니다."
"이정아가 팀장보다 경력이 많을 걸? 얘 무지 오래 됬어."
종태가 또 시비조로 아무말이고 던진다.
"아, 서로 아십니까? 잘 됐네요. 어쟀든 환영하고, 차에서 짐 내릴거 있죠? 제가 지금 나가봐야해서, 류 형사님, 시간 괜찮으시면 좀 도와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정아가 거절한다. 은석이 나선다.
"류 형사님은 그만 병원 가봐요. 짐은 제가 할께요."
돌리던 볼펜을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은석을 노려보는 종태.
"야, 네가 왜 나서? 각자 알아서 하는거지, 언제부터 쫄따구 짐가방을 날라줬다고? 봐봐, 류시환이도 안하는 걸, 왜 니가 해?"
당황한 정아가 만류한다.
"차 형사님, 그냥 계세요. 문 형사님 말씀이 맞으세요, 제가 할께요. 그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저랑 같이 나가요, 가는 길이에요."
정아와 함께 나가는 석호와 그 뒤를 따라가는 은석... 종태가 소리친다.
"야! 차은석! 넌 밸도 없냐? 야 이 썩을 놈아!"
문이 닫히고, 멀뚱히 서있는 시환.
"문형사님 아까부터 왜 그래요? 잠 못자서 피곤해요? 우리 다 못잤는데?"
"안 피곤해! 잠이 확 깼어! 너는 수면제 먹고 자는 애를 왜 자꾸 보러간다 그래서 이 사단이야? 그냥 자게 놔두지?"
"걱정도 안됩니까? 약물 검사 결과가 나왔는지, 의사 소견은 어떤지.."
"문제 있으면 전화 오겠지! 우리때는 임마, 마누라가 애를 낳아도 못들어갔어!"
"아우, 도데체 언제적 이야기야? 안 들려요, 저 갈거에요. 선배 깨어나면 다 이를거야."
"너 가서 애 자는데 종알종알 떠들어서 깨우지 마! 푹 자게 놔둬? 알았어?"
"알았어요, 안깨워요.. 아, 진짜... 내가 두살이에요? 별걸 다.."
"그리고 들어올때 아이스크림이나 잔뜩 사와. 아, 성질 나... 차은석이 저 정신줄 밥말아 먹은 놈 진짜.."
5.1.4 병실
헐레벌떡 뛰어 올라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시환. 병실을 찾았다. 문 옆에 붙은 명패를 확인한다.
/강*율/
숨소리가 너무 크다. 잠깐 그대로 서서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조용조용 소리나지 않게, 지율이 깰까봐 조심하며, 딱 한 뼘만큼만 열고 안쪽을 살핀다...그런데... ? 블라인드를 다 내려 어두침침한 병실에 침대에 누운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불도 없이 등을 보이고 누운 건... 남자..?
'...진우형...? 형이 왜 침대에서 자..? 지율 선배는 어디가고..?'
진우를 깨워 물어보려고 한발, 한발, 조용히 다가간다.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얇은 손목... 진우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놓칠세라 웃도리 등짝을 꽉 움켜쥐고있는 여자 손.. 지율이다. 좁은 환자용 침대에서, 둘이 꼭 끌어안고 자고 있다... 일정하고 고른 두 사람의 숨소리에 비해, 점점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 멍하니 서있던 시환이 애써 발소리를 죽이며 혼자 병실을 나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