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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쉴만한 물가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20131018 - 국화 옆에서


서정주 시인의 이야기가 맞다면 올해 천둥의 몸부림은 이제 끝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선물해 준 국화꽃 화분을 보며, 길거리 화원을 지나면서 보는 각양각색의 국화꽃들을 보면서 문득 국화 옆에서 노래한 시가 생각이 났다. 가을에 코스모스처럼 많이 피는 꽃이 국화가 아니던가!


고향집 마당 난간에 있었던 노란색 주먹 만한 국화는 필자가 중학교 때까지 알고 있었던 최고의 국화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 학교 원예실에서 만난 국화는 그 종류에서부터 모양과 기르는 방식에 따라서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로 예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국화가 얼마나 많았던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국화의 종류도 종류지만 소국이나 대국을 기르는 방식을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데 입국이라 하여 잔 순을 잘 따내서 한 두 송이를 커다란 밥그릇 모양으로 키운 국화는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고 싶은 국화였다. 목부작이나 석부작은 말 그대로 고목나무나 예쁜 돌 등에 국화를 붙여 키워서 마치 고목나무나 돌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국화였다. 입국과는 달리 잔 순을 따주어서 오히려 잔가지들을 많이 나오게 하는 재배방식이 있었는데 하나의 가지에서 수십 개의 국화를 피워내서 그것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국화도 있었다. 커다란 지구본 같은 모양이랑 지도 모양 여타 할 수 있는 모든 모양들은 다 만드는 것이었다.


다양한 꽃 박람회장들을 다니면서 만나는 국화를 비롯한 많은 꽃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하다 보면 괜스레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전시장이나 실내에 그런 국화 화분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탄성을 자아내기까지는 그만큼 수없이 많은 이들의 손이 가고 거름을 주는 누군가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묵내뢰’(默內雷)라는 말이 있다. 황대권 님의 ‘야생초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겉으론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속으론 우뢰와 같다”는 말이다.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 평형의 상태다"라고 말한다. 마치 물 위에 떠다니는 백조가 그렇게 물 위를 유유히 평화롭게 떠 있기 위해 물 밑에서는 두 발을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과도 같다. 또 늘 미소 짓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열 번의 울음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울음을 삼키고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 그것을 느꼈고 소쩍새와 천둥이 봄부터 몸부림친 모습으로 국화의 ‘묵내뢰’를 표현하지 않았을까? 가슴 졸이던 젊은 날을 지나온 지긋한 누님으로, 그리고 내내 잠 못 이루는 무서리 같은 고뇌의 시간들을 지나고 난 후에 핀 그 꽃을 노래했나 보다.


사람 사는 일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천둥번개 치는 것 같은 일을 겪지 않은 이가 있을까? 모든 일과 관계 속에서는 늘 갈등의 연속이다. 자기 자신과도 싸우고 일과도 싸우고 친구와 동료와 상하 관계 속에서도 발생하고 세상과 부조리와도 갈등의 벼락은 친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지난 후에라야 꽃이 피고 마침내 단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회피, 외면, 무시가 아니라 품고 감내하고 또 넘어가며 빚어져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내 마음의 천둥을 다스려 본다. 내가 피우고 싶고, 피워야 하고, 피울 한 송이 국화꽃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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