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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Nov 27. 2020

식물 힐러인 나는 한때 식물 킬러였습니다

식물 키우기에 자신감이 생긴 계기

나는 식물 킬러였다. 초등학생 때 처음 난을 보았다. 집에 선물로 들어온 화분이었다. 가는 녹색잎 위로 대롱처럼 얇은 줄기 끝에 나비 모양으로 벌어진 꽃잎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백합보다 더 암술, 수술이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새도 신기했다. 이주쯤 지났을까. 싱싱한 건강미를 뽐내던 난은 꽃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난은 키우기 어렵다며 죽기 전에 식물을 잘 키우는 다른 집으로 보내자고 하셨다. 내 생애 첫 번째 난은 결국 취미로 난을 키우던 체육 선생님 댁으로 입양됐다. 그렇게 내게 식물을 키우는 일은 어렵다고 각인되었다.




이십 대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물은 키우기 어렵다’는 생각은 ‘나는 식물을 못 키우는 사람이다’로 왜곡되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엘사는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해 고립을 자처했다. 자신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엘사처럼 어느새 내 손이 닿는 식물은 모두 죽고 말 것이라는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식물 킬러를 자처했다.


또래들이 많은 젊고 자유로운 회사 조직에 속해있을 때였다. 거래처에서 씨앗과 흙, 화분까지 포장된 식물 키트를 여러 개 얻었다. 동료들과 다 같이 식물을 키워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씨앗을 심은 화분에 각자 지은 이름까지 붙여서 볕이 잘 드는 회의실 창가 한 켠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같은 식물 종류는 아니었지만 같은 환경에서 내 화분만 유난히 성장이 더뎠다. 다른 식물들은 흙을 뚫고 싹을 틔웠으나 내 화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른 식물들이 잎이 무성해지기 시작할 때 겨우 새싹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결국 잎도 제대로 달아보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돌이켜보면 내 식물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과습으로 잘 자라지 못했던 것 같다.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랑이 넘친 안 좋은 결말이었다.


평소 식물 키우기가 취미인 동료에게 ‘어떻게 그렇게 식물을 건강하게 잘 키우냐’고 물었다. 동료는 ‘식물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라는 당시에 나에겐 선문답 같은 비법을 알려줬다. 그런데 나도 이젠 같은 질문을 하는 친구들에게 ‘관심과 사랑과 정성’이라는 무성의해 보이는 뻔한 답변을 하곤 한다. 이제는 동료가 말했던 ‘이해’나 내가 강조하는 ‘관심과 사랑’이 다르지 않은 말임을 잘 알고 있다.




삼십 대가 되었다. 고단한 직장 생활을 소소한 식물 가꾸기로 버티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리마다 녹색 잎과 줄기가 쉽게 눈에 띄었다. 대부분 관엽식물로 선인장부터 작은 화분, 물꽂이까지 종류와 형태는 다양했다. 동료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서로 키우고 있는 식물 자랑과 경험 공유는 단골 주제였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했다. 식물 킬러가 자발적으로 식물을 키울 일은 만무했다. 온갖 서류들이 꽂혀 있는 삭막한 선반 사이에 복福을 불러온다며 선물 받은 작은 해바라기 모형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면 나도 식물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친한 동료에게 작은 신홀리페페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다. 선인장도 죽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화분 선물을 거절했다. 동료는 메신저로 식물 링크를 보내주며 하나 고르라고 했다. 팍팍한 회사 생활에 식물 하나가 가뭄에 단비 같다며 무작정 한번 키워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클로버를 연상시키는 손톱만한 작고 동그란 잎이 예쁜 연둣빛 신홀리페페와 인연을 맺었다.


처음 물을 줄 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말을 못 하고 움직이지 못한다지만 식물도 생명인데. 괜한 짓은 아닐까? 나 때문에 또 식물이 죽으면 어떡하지? 자괴감에 휩싸일 걱정부터 했다. 이번엔 잘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동료의 고마운 성의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식물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 문득 이십 대 시절 동료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식물을 공부해야겠는 마음이 들었다. 우선, 인터넷에서 신홀리페페를 검색했고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었다.


페페로미아의 소형종.

둥그런 잎이 길게 늘어지는 식물

잎에 수분을 저장하는 다육질의 특징을 지님

겉흙이 완전히 마르면 물을 흠뻑 줄 것. 최대한 건조하게 기를 것

겨울 실내에서 물을 주는 주기는 대략 10~15일에 한 번

밝은 빛이 들어오거나 반음지가 적당. 직사광선은 피하기

수경재배 가능


크기에 상관없이 잎이 두툼한 식물은 수분을 저장하고 있다. 따라서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 반면, 잎이 얇은 식물은 자주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난생처음 식물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사실 이런 원리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선인장은 물이 부족한 사막에 적응해서 잎이 가시로 변했다고 배워서 알고 있었으니까. 삼십 년 동안 지식을 머릿속에 가둔 채 제대로 이해하지도, 써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지만 신홀리페페를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흙이 마르진 않았는지, 물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매일 흙을 만져보았다. 덩굴식물처럼 얇은 줄기가 서로 엉키지 않도록 한 가닥 한 가닥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고 빗겨줬다. 선물을 해준 동료의 말처럼 식물은 내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힘든 시절 큰 위안이 되었다. 오로지 신홀리페페에 집중하는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이 삶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식물에게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싱싱하게 쑥쑥 자라더니 마침내 줄기 곳곳에서 꽃을 틔웠다. 내내 봉우리인 줄 알고 꽃이 피길 기다렸는데 뒤늦게 이미 꽃이 만발했다고 알게 되었다. 처음 보는 막대 모양의 독특한 꽃을 보며 어쩌면 나는 식물 킬러가 아니라 식물 힐러가 될 소질을 지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식물을 안겨준 동료에게 진정 감사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평생 스스로를 식물 킬러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테니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기쁨과 행복을 알지 못했을 테니까. 자신감을 얻은 뒤 나는 집에서도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꽤 큰 화분들을 책임지게 되었다.


막대 모양이 신홀리페페 꽃이다. 처음엔 봉우리인 줄 알고 꽃이 피길 기다렸다. 뒤늦에 이미 꽃이 만발했다고 알게 되었다.


길게 늘어진 신홀리페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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