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을 떠나면서
리스본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스트인 앨리에게 11시에 체크아웃을 하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기력이 없어 퀭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포르투갈에서 자유와 낭만을 누리며 나흘 만에 활기를 완전히 되찾았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편한 복장에 운동화를 신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리스본 마지막 날 오전은 상조르제성 Castelo de São Jorge까지 산책하러 다녀오기로 했다.
리스본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상조르제성은 리스본 시내 어디서든지 보인다. 1371년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와 영국 찰스 왕세자의 결혼으로 두 나라는 우호 협정을 맺었다. 이를 기념해 성을 영국의 수호성인 세인트 조지 Saint Gerge에게 바쳐서 포르투갈어로 상조르제성이 되었다. 이 성은 5세기 로마인들이 축성을 시작해 9세기 무렵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이 완성했다. 이후,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알폰수 1세가 무어인에게 리스본을 탈환한 뒤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했다. 상조르제성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뀐 리스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성(古城)이다.
지도상 알파마 숙소에서 상조르제성은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그러나 미로 같은 알파마 골목을 만만하게 본 대가를 바로 치렀다. 분명히 표지판대로 따라갔는데 희한하게 자꾸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오르락내리락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한참을 헤매다 다행히 맞는 길로 접어들었다. 공기 맑은 이른 아침에 가벼운 산책을 기대했는데, 어느덧 이마와 목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역시 울퉁불퉁한 돌로 포장된 언덕길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10유로를 내고 상조르제성을 관람할 생각은 없었다. 리스본에서 가장 높은 이곳은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졌지만, 나에게는 일곱 언덕이 만든 리스본 곳곳이 매혹적인 전망대였다. 입구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관람객 옆으로 높게 솟은 성벽을 한번 올려다본 뒤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낮은 골목 담장과 담장 사이를 연결한 아치 모양 돌문을 지나자 작은 공터에서 아침부터 버스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발길을 재촉했다. 앨리와 약속한 시각에 맞춰서 숙소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올라갈 때는 헤매느라 한참 걸렸는데, 내려오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상조르제성까지 오고 간 산책은 꼭 오르고 내리는 우리 인생 같았다.
앨리와 작별 인사 뒤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늘 리스본 대성당 쪽으로 내려갔는데 오늘은 반대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상조르제성 때문에 막혀서 길을 빙 둘러가야 하지만, 지도상으로 호시우역까지 그 길이 더 가까워 보였다. 아님, 말고. 어쩔 수 없지. 가다가 이 길이 더 멀다고 알게 되더라도, 한번 들어선 이상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걸. 이젠 되돌아서 가는 길이 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던 길을 믿고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툴툴툴툴 소리를 내는 캐리어를 끌고 30분을 걸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벌써 반나절을 걸었는데 쌩쌩한 모습을 보면, 완전히 체력을 회복한 것 같다. 마침내 호시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대하던 신트라 Sintra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