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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를 보장하는 대학 졸업장

현실적인 대학 졸업장이 효용성

by 스마일펄

서울에 있는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살아보니 대학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좋은 대학 졸업해도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 같은 인생을 통달한 듯한 말을 사람들이 있다(꽤 많다). 이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좋은 대학 나오면 멋지고 폼나게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평범하게 살 줄은 몰랐다’는 일종의 자조 섞인 회한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일에 치이고 집에서는 육아에 시달리고 아파트 대출금 갚느라 허덕이고 100세 시대이니 은퇴 이후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고…… 열심히 살아도 해야 할 일이 끝이 안 난다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30~40대라면 할 만한 보통의 신세한탄이기도 하고. 그런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치여 이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대학교 졸업장 덕분에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현재의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대졸 학력인 사람은 학력 결핍을 느낄만한 경험이 적고, 주변에는 성장 욕구가 강해서 학력 외에 다른 결핍을 채우려고 아등바등 사는 대졸자가 대부분이라 대학 졸업장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도 한다. 가고 싶은 대학을 등록금이 부족해 진학할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돈으로 환산되는 대학의 가치와 포기했을 때의 기회비용을 저울질할 필요도 없어서 대학 졸업장을 당연하게 여겨 그 가치에 더욱 무딜 수도 있다. 한마디로 대졸자의 삶이 기본값이라 대졸자가 아닌 이들이 겪는 또 다른 결핍은 시야에 들어온 적이 없을 확률이 높다. 이들은 ‘어차피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태반이고, 입사하면 일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데 (나도 대졸자이지만) 대학의 필요성에 의문이 든다’는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근무 환경이 좋은 회사에서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한다는 푸념도 실은 대학을 졸업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최근에 채용 사이트를 살펴보다가 지원 자격에서 우연히 ‘2년제 전문학사 이상’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2년제나 3년제 전문학사 소지자는 4년제 대학 졸업자를 자격 요건으로 내세우는 기업에는 지원조차 할 수 없는 건가? 이 말인 즉, 고졸 학력으로는 어지간한 회사에는 아예 도전도 할 수 없다는 말이겠네? 오랫동안 일을 한 출판 업계조차 이제는 나를 경력직으로 채용해 줄지 미지수라서 다른 업계의 일반 회사에 지원한다고 합격할 리도 만무하지만, 만일 내가 학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아서 이름을 들어본 괜찮다 싶은 회사의 지원 자격에 미달돼 이력서조차 제출할 수 없다면 내 신세가 처량해 서글프고, 박탈감에 부아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전문지식이나 경험, 역량 등이 부족해 면접 등을 제대로 못 봐서 원하는 기업에 불합격하거나, 기업에서 개발자나 디자이너 등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직무만을 채용하고 나에게 적합한 직무는 채용하지 않아서 지원을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학력에서 막혀서 문조차 두드릴 수 없는 기업이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며 지금껏 별것 아니라고 당연하게 여긴 대학 졸업장의 효용과 가치가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IT 기업이나 스타트업 중심으로 특히, 개발 직군에서 학력에 상관없이 실무 역량과 업무 관련 경험에 비중을 두고 채용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가 중요한 개발과 디자인 직군은 기업에서 10여 년 전에도 학력보다 실력을 (당연히) 우선시했다. 스타트업은 현재보다 미래 성장가능성에 가치를 두는 기업 성격상, 채용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으면(학력으로 지원 자격을 제한하면) 직원 채용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처럼 경험 또는 경력, 회사에 대한 열정, 업무를 향한 의지 등을 고려해 직원을 채용한 여러 학력이 공존하는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서 근무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100% 일치하지는 않지만, 학력보다 실력이 우선이라는 디자인과 개발 영역에서도 그 분야를 전공한 대졸자의 업무 역량이 높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작업물의 완성도, 업무 요청자의 의도 반영, 업무 처리 속도와 정확도,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함과 효율성 등 대졸자와 일을 할 때 업무 진행이 보다 수월한 편이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결국에 기본기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케팅 직군에서 종사하며 다양한 경력과 학력의 웹 디자이너와 일해온 경험을 이야기해 보면, 이십 대 초반부터 일찍 디자인 업무를 시작해 7~8년의 실무 경력을 앞세운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전공한 4년가량의 실무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가 있었다. 한 명은 실무 경력이 7~8년이고, 다른 한 명은 디자인 교육 4년+실무 경력 4년으로 합치면 총 8년가량으로 두 사람이 디자인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디자인 결과물과 소통 능력 등 업무 역량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직원이 월등한 수준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가만히 관찰하고 생각해 보니, 우선 실무 경력을 앞세운 디자이너는 업무 경험은 풍부할지 몰라도 디자인 기초가 부족해 어떤 디자인을 하더라도 작업물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전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디자인 역량을 요구하는 업무는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디자인 수준을 제대로 평가받거나 피드백을 받은 경험도 드문 것 같았다. 그 결과, 절대적인 디자인 실력이 턱없이 부족한 데도 정작 본인은 일찍 일을 시작해 업무 경력이 많다는 자부심에 갇혀서, 모자란 디자인 실력을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못 미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관련 교육 기관에서 단기적인 디자인 교육을 마치고 이를 바탕으로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해 채용된 사람도 있었는데, 디자인 감도 좋고 실력도 있지만 디자인 학위가 있는 사람에 비해서는 디자인 경험이나 노하우가 부족해서 목표한 작업물을 완성하기까지 시행착오도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약점이 있었다.


디자인 학위가 있다고 누구나 회사생활에 잘 적응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이 아니라) 회사에서 요구하는 디자인 역량을 발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4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지만은 않았을 테니, 디자인 전공자라면 대학에서 다양하고 체계적인 양질의 디자인 교육을 받아서 적어도 (설사 학점이 낮더라도) 디자인의 기초는 갖춰져 있고, 주어진 여러 과제물을 수행하면서 디자인에 대해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수업에서 자신의 작업물을 전문가인 교수님과 준전문가인 친구들에게 수없이 평가받으며 자기객관화를 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를 반복해 어느 정도 디자인 실력이 가다듬어진 상태로 사회에 진출했을 것이다. 이처럼 결과물을 두고 피드백을 주고받거나 공동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소통 능력도 갖추게 되었을 것이고, 디자인 외에 여러 교양수업 등에서 인문학적 소양도 쌓았을 것이며,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게 키워진 능력은 실무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구현하는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을 예로 들었지만, 대졸자라고 창의력이 뛰어나거나 월등한 능력을 갖추진 않아도, 적어도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한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비판적 사고력/문제해결 능력/의사소통 능력/자기 관리/협업하는 능력 등의 기초 역량을 일정 수준은 갖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학력과 이러한 능력이 ‘관련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력보다 경험을 중시하려는 세상이지만, 디자이너 사례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인 역량(실무적 기본기)과 이론적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경험과 경력은 결국 업무적 성장에서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력도 결국에는 상품이기에 노동 시장에서 대졸자는 같이 일하기 전까지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 지는 미지수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의 성능은 보장된 일관성이 있어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상품 같다고 할 수 있다.


과거보다 대학 졸업장의 사회적 가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명문대 간판이면 좋은 회사에 프리패스하고, 조직 내에서도 끼리끼리 뭉쳐서 오직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끌어주는 등의 특혜이자 폐해가 사라진 것이지, 사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싶다. 만일, 여러 이유로 대학이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럼에도, 대학에서 나 스스로 배우고 익힌 역량과 젊은 날의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시야를 넓히면 의외로 평범이라고 믿은 것들이 평범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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