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마일펄 Apr 13. 2024

험준한 산길과 아찔한 급경사를 오르내리다

화산(华山) 2편 - 중국 시안

‘내가 드디어 화산에 왔구나’ 싶은 현실감은 케이블카에 탔을 때 느낄 수 있다. 장엄한 화산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신선이 노닐 것 같은 신비로운 세계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 판타지가 아니라 현존하고 있었다. 회백색의 장대한 화강암을 캔버스 삼아 군데군데 운치를 더하고 있는 짙고 옅은 분홍빛 꽃들은 대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한 폭의 몽환적인 풍경화가 족자 밖으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만개하기보다 바위틈을 드문드문 메꾸며 조화를 꾀하는 덜 핀 꽃들이 더 귀하고 갸륵하게 느껴졌다. 막상 현실 속 무릉도원을 실제로 마주하자 이 또한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모를 다른 세계에 머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단연코 지금까지 경험한 최고의 봄 꽃놀이였다.

케이블카를 타자마자 펼쳐진 화산 풍경


더 놀라운 사실은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꽃이 핀 무릉도원 지대를 지나자 기가 막힌 첩첩산중의 신묘한 풍광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며 장대하고 수려한 화산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반듯하게 깎아 세운 웅장한 기암괴석이 겹치고 겹쳐 숨이 멎을 것 같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산 중턱에 얕게 깔린 안개가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화산은 아무리 위대한 장인도 빚어낼 수 없는 웅장한 바위산의 성대한 위용과 빼어난 기세를 한껏 떨치고 있었다. 거대한 화강암이 햇빛에 반사돼 눈이 부셔서 ‘빛나다 화(간체차 华, 번체자 華)’를 써서 ‘화산’이라고 부른다는 설은 설득력이 있었다.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꼈는데도 조각 같은 절경을 자랑하는 거룩한 화산은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꽃이 핀 산을 넘어가자 웅장한 화산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말문이 막힐 만큼 경이로운 화산은 의외로 고압적이기보다 아늑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아마도 험준한 산세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협지를 읽은 적이 없는데도 이 산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 속 인물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어디선가 실제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화산 곳곳에 보이는 까만 점 같은 동굴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고뇌하고 갈등하며, 좌절하고 성장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 한때 밤을 꼴딱 지새울 만큼 무협지를 사랑한,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표정은 순수하던 십 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잔뜩 상기되었다. 사회적 가면에 익숙해진 나이에도 결코 감출 수 없는 소년들, 소녀들의 해맑은 표정에 나도 괜스레 가슴이 설레고 행복해졌다. 나 또한 비현실적인 능력을 과시하던 무협지 속의 협객들처럼 철없는 특권을 누리던 그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간 것 같았다.

신선이 노닐거나 도인이 머물 것 같은 신비로운 화산의 풍경




우리는 이미 한껏 감격한 가슴을 안고 마침내 서봉에 도착했다. 화산에서는 동봉(조양봉, 2,090m), 남봉(낙안봉, 2,160m), 서봉(연화봉, 2,080m), 북봉(운대봉, 1,614m), 가운데 중봉(옥녀봉)의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우리는 서봉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북봉까지 한 시간 반~두 시간 정도 트래킹을 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케이블카는 서봉과 북봉 두 곳에서 운행을 하며, 고도가 더 높아서 더 수려한 절경을 선보이는 서봉(2,080m)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북봉(1,614m)까지 산행을 하고 케이블타를 타고 하산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이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급경사를 어떻게 오르내리나 싶지만, 주변 사람들을 따라서 조심해서 한걸음씩 옮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 정상에 올라서 선거운 절경에 취해 있고, 또 어느덧 중간중간 마련된 뷰포인트이자 휴식공간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풍광을 즐기고 있다. 험준한 산길과 가파른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복부와 허벅지에 힘을 딱 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속도대로 강약을 조절하며 한걸음씩 옮기면 생각만큼 어렵거나 위험하지 않다. 아니, 수월하다.

암석 구간은 양쪽의 줄을 잡고 천천히 조심해서 오르면 된다.
사진처럼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다.
가파른 계단을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 노인도 쉽게 눈에 띈다.


현지 가이드님 말씀으로는 아흔 살 어르신도 모시고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중간에 결국 아드님이 엎고 내려가셨다고는 하지만…… 건강한 아흔 살 어르신도 어느 정도는 트래킹이 가능하고, 성인 남성이라면 (불가피한 상황에서) 사람 한 명을 업고 내려갈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지답게 관광용 코스를 잘 정비해 놓아서 사진만큼 무섭거나 험하지는 않다. 물론, 길이 잘 닦여있고 철난간이 완비돼 있어도 계단의 경사가 급하고 폭이 좁은 아슬아슬한 구간이 이어지므로 분명히 매 순간 집중해서 조심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실제로 암석을 딛고 올라야 하는 북한산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평이했고,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북악산 트래킹보다도 안 힘들었다.

복을 기원하는 붉은 리본을 화산 이곳저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산 중에 EBS 다큐멘터리에서 본 화산의 짐꾼과도 몇 번을 마주쳤다. 영상에서는 식당에 납품할 쌀과 물, 각종 식재료 등을 가득 짊어진 짐꾼들이 위태위태해 보였는데, 이번에 실제로 마주친 장대 끝에 생수를 2~3개 들이씩 매단 짐꾼들은 제법 안정적으로 보였다. 10여 년 전의 영상에서 팔 한쪽을 잃어 먹고살 길이 막막했는데 다행히 짐꾼으로 일할 수 있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인터뷰한 허티엔 씨도 여전히 짐꾼으로서 화산을 지키고 있을까. 속도와 기술 만능 시대에 대체 불가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화산에서 은은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짐꾼들은 대단한 인물들이다.




난생처음 구경하는 화산의 웅장하고 장엄한 경치는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경이로웠지만, 아마도 산 아래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봉우리에 도착한 사람들 만큼의 환희와 감동을 만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발전된 기술에 힘입어 2,000m가 넘는 봉우리를 몇십 분만에 손쉽게 오르내리고, 비교적 잘 정비된 계단길로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시시하다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산하는 북봉 케이블카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아찔한 경사가 이어지는 화산을 양옆의 난간에 의지해 한발 한발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들은 고되고 혹독한 여정을 견디고,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한 만큼 화산의 정상에 올라서 탁 트인 진귀한 정경을 바라볼 때 얼마나 뿌듯하고 감격스러울까. 땀을 식히는 솔솔바람은 또 얼마나 달콤하고 시원할까.

가파른 경사를 따라 한발 한발 화산을 오르는 사람들


세상 모든 것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얻을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귀한 것도 애정을 쏟고 노력을 기울인 만큼 가치가 커지는 진리를 부정할 순 없다. 절대적으로 얼마나 값지고 귀한가 보다 비록 주관적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 그 무엇이든 간에 가치의 진정한 값어치인 것 같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는 잠시 기쁠 수는 있지만 소중함의 값어치가 떨어져 그 만족감이 오래 지속되진 못하는 것 같다. 


만일 시안에 간다면 화산은 꼭 들르기를. 화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꼭 전날 화산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 일찍 등산을 하기를. 그래서 여유롭게 아름다운 화산의 운치를 만끽하기를. 보행로에 암석 구간이 드물지만 없지는 않으니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를 필수로 신고가기를.


시안 시내에서 화산까지 버스로 약 2시간(120km) 정도 걸린다.
겁쟁이인데도 암석을 오르다 카메라를 향해 웃음지을 만큼 생각만큼 무섭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화산(华山) 1편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 오악(五岳) 중 하나인 '화산(华山)'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