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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19. 2024

진정한 여행은 사랑이다

중국 시안 답사를 다녀온 이유 - 여행을 세 번 한다는 의미

# 여행에 대한 기존의 생각

2019년 가을, 동생과 스위스 여행을 한 뒤로 5년 만의 해외여행이다. 스무 살 이후로 2박 3일이라도 좋으니 일 년에 한 번은 관광이든, 휴양이든, 봉사활동이든 가리지 말고 꼭 외국으로 나가자는 생활신조를 지켜왔다. 취업 준비에 전념하느라고, 무슨 이유인지 해외여행에 흥미가 떨어져 나 자신과의 약속을 몇 년 어긴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해외여행은 몇 안 되게 꾸준히 유지해 온 활동이다.


코로나가 일상을 지배한 시기, 해외여행을 하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깨달았다. 지금껏 나에게 여행은 외부로부터 억눌리고 구속되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완전한 자율성과 자기 결정력의 회복, 그 어떤 얽매임도 없는 해방과 자유를 의미했다고 알게 되었다. 기혼에서 다시 미혼 상태가 되고, 회사원에서 프리랜서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자율성의 범위가 넓어지자 기존의 여행 효용이 더는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이란 어디를 가는가 보다 내가 얼마만큼 수용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중요하단 생각이 들자, 코로나가 잦아들어도 예전만큼 외국을 가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지도 않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깊이를 더하는 새로운 면모를 알아가는 일상을 보내던 중 ‘임용한 박사와 함께하는 서안 답사’를 알게 되었다. 일정표 하단에 적힌 ‘인생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 왜 중국 시안인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이기고 진령산맥을 넘어 그토록 정복하고 싶어 한 장안,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자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 인구가 번성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도시, 미스터리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하는 수천 년 간 잠들어 있던 진시황의 병마용이 모습을 드러낸 곳 - 중국어를 잠시 배우기도 했고 중국 드라마를 가끔 즐길 만큼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있기에 시안은 한번 즈음 가보고 싶었다. 혼자 가기는 엄두가 나지 않던 오랜 버킷리스트 병마용갱을 여럿이서 갈 수 있고, 중국 역사 초기부터 1,000년 넘게 번창하던 도시가 어쩌다 쇄락하고 수도의 역할을 차츰 베이징으로 넘겨줬는지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단순 단체 관광이 아니라 ‘역사학자와 함께하는 답사’라는, 나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새로운 여행 형식은 긴장되면서도 가장 설레는 점이었다. ‘인생 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것을 축하한다’라는 안내글은 그저 그런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4박 5일의 시안 답사는 내 인생에서 손에 꼽는 잘한 선택이었다.

대안탑에서 바라본 대당불야성과 시안 거리


# 임용한 박사에 대해서

이번 답사를 기획한 임용한 박사님은 나에게는 유튜브에서 삼국지를 재해석한 의견을 들려주는 삼국지 아저씨로 익숙했다. 유비, 조조, 손권, 관우, 장비, 여포, 제갈량, 조자룡, 주유, 마초, 육손, 사마의 등 매력적인 삼국지연의의 인물을, 드러난 사실과 삼국지 정사에 기반해 당시의 시대상과 인식을 반영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오늘날 현대인이 얻을 수 있는 혜안을 포착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가령, 유비의 경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렸다고 알려져 있다. 임용한 박사는 이 내용만으로는 유비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정말로 가난하고 열악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오늘날로 보자면 짚신과 멍석을 만드는 공장을 소유해 일꾼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유비를 흔히 간웅 조조와 비교해 인의를 중시하는 진중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노식 문하에서 공부한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을 좋아했으며,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당시에 개나 말을 좋아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냥과 놀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며, 값비싼 좋은 말은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고, 누구나 노식을 스승으로 둘 수도 없었다. 유비는 비록 말수는 적고 공손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부유하고 대접받는 환경에서 공부나 자기 수양보다는 놀거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했고, 이러한 성격 덕분에 관우와 장비를 사귈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는 임용한 박사님의 근거 있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삼국지뿐만 아니라 임용한 박사님은 여러 역사를 다룰 때 섣부른 가치 판단과 무조건적인 현대적 시각을 배제하고, 지금껏 드러난 역사적 사실과 당시의 시대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다. 더불어 보편적이고 속물적인 인간 본성과 세상 이치, 현실 원리에 입각한 분석과 해석을 내놓기 때문에 설득력 있고 공감이 간다. 표피적인 분석에 머물지 않고 현상과 맥락을 다각도로 살펴 본질과 이면을 꿰뚫는 능력은 해박하고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에서의 통찰, 감정 이입하는 능력,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작 바퀴 하나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 글쓰기도, 여행도 ‘사랑’이다

글을 쓸수록 글쓰기는 ‘사랑’이란 생각을 한다. 사랑을 하면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우선은 장점이나 잠재력 같은 긍정적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상대의 말과 행동의 맥락을 좀 더 이해하면 타인의 시선에서는 이상해 보이거나 오해할 만한 겉모습도 수용한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면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 같은 부족한 면모조차 상대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따뜻하게 감싸게 된다. (치명적인 허물이나 잘못을 무조건 덮고 감싸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글쓰기는 일종의 기술이고 수련(학습)이지만,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해야 사람들이 감동하고 위로받고 설득되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해야 인간과 세상, 사회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말로 ‘통찰’, ‘본질에 다가서고 싶은 욕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임용한 박사님이 주도하는 답사라면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맥락을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살펴 본질을 꿰뚫는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그런 돌멩이 하나를 보고도 이토록 해맑은 표정으로 행복할 수도 있구나’ 답사 내내 임용한 박사님께 받은 인상이다. 온 세상이 마냥 신기한 어린아이처럼 나이 든 어른도 얼마든지 천진난만해질 수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려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마음에 좀 더 다가간 나날이었다.

화산에서 임용한 박사님과


# 결국, 여행의 기억은 좋고 싫은 사람들

이번 시안 답사는 약 서른 명 정도 동행했는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말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기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으며,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유쾌하고 유익한지도 느낀 시간이다. 셴양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강한 통제에서 느낀 당혹감, 산 전체가 무덤인 건릉이 풍기는 경이로움, 대당불야성에서 당나라 복장을 한 여성들 사이를 지나가는 기괴함, 화산 트레킹에서의 벅찬 감동, 한국과는 다른 중국 사람들과 음식에 대한 소감 등…… 함께이기에 나와는 다른 시각과 생각, 느낌을 알 수 있어서 여행이 더없이 풍성하고 색달라졌고, 같이 있기에 순간순간의 비슷한 감정을 나누고 공감하는 행복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수용받을 수 있는 안락하고 검증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머물다 낯설고 다르고 예측불가한 사람들을 직면할 용기를 냈다. 이번 답사는 새로운 사람들과 원만함 이상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관계에서의 (소모적인) 불안감을 불식하고,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 진정한 여행이란

마지막으로 여행은 준비하면서 한 번 하고, 가서 경험하고, 다녀와서 추억한다는 ‘여행을 세 번 한다’는 의미를 실천한 계기가 되었다. 우선 화산 트레킹에서 낙오돼 다른 분들께 짐이 될까 봐 염려해 답사 약 열흘 전부터 매일 2~3시간씩 난생처음 산 등산화를 신고 서울의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체력을 기르고 자체 적응 훈련을 했다. 나 자신을 타고나길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강도 있는 운동을 매일 하면 체력이 좋아질 수 있음을 경험했고, 크게 관심 없던 등산의 즐거움을 알 것도 같았다.


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이 아까워 전혀 계획에 없던 <중국 시안에 다녀왔습니다>를 제목으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답사지에서 깨닫지 못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과 관심을 확장할 수 있었다. 답사는 4박 5일이었지만 체력을 기르기 위한 준비 과정과 이후에 글을 쓴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여행을 약 석 달 즈음은 한 셈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2024년은 내 안에서 여행이 다시 태어난 해로 기억할 것 같다.

밤의 버스에서 바라 본 시안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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