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시 먼 곳을 여행할 수 있을까
여행이란 다른 소리에 귀를 열어놓는 일인지도 모른다. 낮은 발소리와 웅성거림, 낯선 언어와 음성들, 시끄러운 음악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이상한 고요, 광장과 카페의 부산함 같은 것들은 풍경 이전의 소리이고 그런 소리들을 쫓아서 발길을 옮기게 된다. 나와 함께 어떤 소리를 들으러 떠나겠어요? 이렇게 청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조그만 가방을 들고 따라나설 것이다.
고독할 권리, 여행이라는 몹쓸 짓, 이근화, 80p
얼마 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생겼다. 그건 조금 무서운 경험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을 처음 써본 지인은 내게 '어지럽지 않냐'라고 물었다. 어지러움을 느끼진 못했지만 어떤 느낌 때문에 어지러움으로 이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한 순간 나를 휘감고 있는 소리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 눈앞에 있는 풍경은 그대로인데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던 소리가 "쓰읍" 하고 사라진다. 마치 풍경과 내가 차단된 느낌이다. 나를 둘러싸고 달걀 껍데기 같은 얇은 막이 덧씌워지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정적은 나에게 이상한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눈앞에 차가 달리고 있는데 그 소리는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것만 같다.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마치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것처럼 작고 가까이 들린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으면 그런 이상한 세계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소리를 통해 나와 사물, 풍경의 거리감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묘한 위화감을 통해 새삼스럽게 느꼈다.
확실히 여행지에선 사소한 소리에도 더 크게 반응한다. 풍경이 낯선 만큼 소리가 주는 정보에도 민감해지는 느낌이다. 낯선 도시의 신호등 소리, 전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 사람들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 그들의 언어로 일상을 이어나가는 소리, 지나가는 새나 고양이 소리. 일상의 공간이었더라면 백색소음으로 치부되었을 소리들이 낯선 풍경과 어우러져 독특한 그곳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본의 한 전차 안에서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 두 명이 나란히 전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 맨 가방을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고 손잡이를 잡고 빙그르 돌기도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기도 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서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대화를 왠지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 명이 입을 쩍 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헤~? 하즈까시이~네"
약간은 익살스럽고 어딘지 의뭉스런 표정과 함께 저 말이 귀에 들어왔다. 조용히 입 안에서 읊조려보았다. 무슨 뜻일까? 나중에 그것이 부끄럽다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부끄러웠던 것인지, 누가 부끄러웠던 것인지 대화의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에만 의존해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부끄러울 만한 어떤 일이 무엇일지. 낯선 말 하나에 의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여행 중의 지루함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다.
오늘의 나는 익숙한 테이블에 앉아 익숙한 소리에 휩싸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잠깐의 외출도 마스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지금. 또다시 낯선 소리를 들으러 먼 곳을 떠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