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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Mar 30. 2020

나는 누구인가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


    스무 살 나를 온통 휘감은 질문이었다. 그때 내 대답은 "기억"이었다. 나의 과거, 그러니까 바로 지금까지 나를 나라는 연속성 있는 개체로 구분시켜주는 건 오로지 내 기억뿐이라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 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다고. 그땐 100%에 가깝게 그렇게 확신했다. 그땐 모든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으므로. 이십 년 남짓한 삶에서 나를 스쳐간 사람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 있었고 언제든 손 내밀면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 역시 내 안에서 팔딱팔딱 살아있었다.

    그렇다.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로 알아도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나이였다.  


    기억에 집착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현재를 제대로 붙잡고 싶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행위로 현재를 가득가득 채워 나라는 인간의 기억에 차곡차곡 쌓고 싶었다. 기억만큼 기록에 집착했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적었고 평범한 하루를, 나와 내 옆에 있는 누군가들을 찍었다. 그게 제대로 인생을 사는 방법이라 믿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간을 그렇게 박제해 놓을 수 있다고, 그 시간의 축적이 나를 온전하게 구성하리라고.


    그러나 인간의 뇌의 용량에 비해 시간은 촘촘하게 흐르고 나보다 먼저 앞장서며 나를 끌어당긴다. 기록도 기억을 붙잡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온다. 기록은 기록일 뿐. 기억은 자꾸만 흐려지고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켜켜이 쌓인 기억과 기록들은 내 머리와 책장 어딘가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불시에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기억들은 노트 한 귀퉁이를 거칠게 찢어낸 흔적과 같다. 그때 그 무언가의 일부분일 뿐. 더 이상 내 안에 그게 존재하고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데 기록은 내게 말한다. 그때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지 않았냐고. 오늘의 나는 그 앞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현재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록은 그렇게 내 뒤통수를 친다.


    가령, 십여 년 전 내 수첩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S와 길을 걷는데 갑자기 비가 왔다. 우리는 일단 급한 대로 아무 건물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잠시 후 S는 어디선가 우산을 구해왔다. 나에게 수줍게 우산을 건네는 S의 표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니. 어째서 그런 말을 쓴 것일까. S가 그때 나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오늘의 나는 전혀 떠올릴 수 없다. 저 기록은 어떤 것도 나에게 상기시켜주지 못한다. 물론 S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건 S의 이름일 뿐, 내가 S를 알고 있긴 한 걸까? 지금도 어디선가 S는 잘 살고 있겠지만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란 당시의 나의 말은 오늘 내 뒤통수를 때리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기록에 집착했던 것일까? 기록은 곧 기억이 아닌 것을. 설령 그렇다한들 그 기억들을 모두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코로나 19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두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읽는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그렇게 읽었다.


    화자인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탐정이다. 기억을 잃은 자신에게 신분과 이름 "기 롤랑"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준 탐정 "위트"가 은퇴하고 니스로 돌아가자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보려 한다. 탐정답게 그는 단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단서들을 수집하며 과연 내가 누구였는지 찾아나간다.


    처음 소설을 다 읽고 당혹스러웠다. 모름지기 완성된 소설에서 질문을 던졌으면 답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책을 다 읽었지만 그래서 "기 롤랑"이라고 불리는 기억을 잃은 "내"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호하다. 많은 것들이 비어있고 흐릿하게 우리를 바라볼 뿐. 이름 전화번호 등의 기록은 불완전하며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린 말들 역시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결국 이 소설을 읽으며 나름대로 조합해나간 "나"의 정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읽자마자 다시 한번 앞으로 돌아가 읽었다. 이번엔 반드시 행간에 답이 있을 거란 믿음으로 밑줄을 치고 단서와 정보에 페이지를 매겨 연결하며 앞 뒤로 왔다 갔다 하며 읽었다. 선형적으로 흐른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쓰였고 독자인 나는 나름의 규칙과 순서를 부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순서를 파괴하며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확실히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을 뿐.  


    나의 과거를 알고 있을 거라 추정되는 사람들, 곧 내 생의 한 때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저 먼 어딘가에 있다. 마치 다가가려 할수록 더 멀어지고 흩어지는 파도 같은 존재들이다. 심지어 그들을 만난다 해도 내가 누구였는지 명확해지기는 커녕 더 흐릿해질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시간에서 많이 흘러왔고 그만큼 과거의 기억은 계속해서 조금씩 지워져 간다. 나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결국 나는 마지막 기록에 의지하여 새로운 여정을 떠나려 마음먹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과거의 한 때 내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나"도,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도 알고 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어디에도 나는 없을 것이란 것을. 그럼에도 또한 알고 있다. "나"와 "나"는 내 과거를 끊임없이 헤집고 나란 누구인가란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것임을. 바로 오늘을 살기 위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183p



    이 소설을 읽으며 기억 속 한 사람을 떠올렸다. 과거의 한 때 나와 함께 했던 사람이고 내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나의 과거의 한 부분이 그렇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강남역 교보문고에서 나는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오늘 이 소설을 읽으며 그를 기억해 본다.


    다른 누군가들도 우연히 어떤 계기로, 그들의 삶을 스쳐 지나갔던 나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우산 아래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는 어느 순간 문득 말이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75~76p 일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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