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와 의도, 시스템, 책임감
현재의 미투는 끌고 가야 할 주체들이 더 고민해야 하지만,
우리 역시 많은 고민을 해야 진짜 미투운동이 지속되고 끌고 나갈 수 있다.
현재 미투운동을 이끌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봤지만,
실질적으로 저들이 미투를 이끌면 안 된다.
미투는 대중이 이끌어야 하고, 갈등 창조론자인 저들이 가장 먼저 반성해야 할 주체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3가지를 고민하지 못했기에 저들에게 이끌려 다닌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주도하자.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가벼워서 조금 덜 가벼운 저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게 저들이 미투의 본질을 가지고 노는 이유다.
저번 포스팅을 본 이들이라면 간략하게나마 미투의 정의를 내려봤을 것이다.
살짝 양념을 쳐서 나만의 미투의 정의를 내려본다면...
자신의 권력을 과대해석하여 수단 삼은
위력을 통해 타인의 자유의지를 제압하여
정상 시스템 하에서 해결이 불가능케 하여
저항의지를 상실시켜 지속적으로 침해한
권력 사용자와 비겁한 시스템에 대한 고발
개인적으로는 미투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위력'은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젠더'라는 개념은 필요 없다.
한 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위력에 의한 불이익을 무기로 불가항력적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시스템에 의해 해결이 불가능한 폐단을 사회적 고발을 통해 공론화해서 해결하는 운동
당사자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비겁한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고발이다.
남녀의 로맨스 문제나, 성인으로서 선택의 문제가 여기 끼면 안 된다.
그게 혼합되면 갈등의 기점이 된다.
당장의 미투운동은 '성적 피해'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 운동이 틀을 잡으면 충분히 더 확산시킬 수 있다.
위의 내용들 역시도 당연히 미투의 대상이 된다.
미투의 본질은
이미 2년 전에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갑질에 대한 해결책이고,
'성적 피해'는 그 로직 속 피해의 한 종류에 대한 얘기다.
미투의 성공을 바란다면 본질을 지켜내야 한다.
본질을 지키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미투를 정의하고 젠더 갈등을 배격해야 한다.
이에 더해 미투운동을 전략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3가지다.
오달수가 미투 고발당했다.
2000년 초반의 일이라고 한다.
물론 이 당시에도 성폭행이나 심각하고 지속적인 성추행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어렸고, 2018년처럼 성관념이 잡힌 때도 아니며, 피해 고발이 100% 사실이라고 쳐도,
찝쩍대다 차이고 포기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한다.
사람들은 실수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물론 그 실수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당연히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에는 단호해야겠지만,
아직 어린 시절의 한 번의 실수에도 정답을 강요하고 악마화를 한다.
어디에서 미투의 정의를 찾아야 하나?
미투와는 별개로 나는 오달수의 후속 대응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이겠지만, 그는 포기했고 이 사회는 오달수에게 낙인을 찍을 것이다.
나는 이것들이 미투운동으로 보도되는 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위력 문제도 없었고, 불가항력의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다.
어떠한 증거도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고, 사실이라고 해도 기분 나쁜 기억이다.
행위가 의도적으로 지속되지 않았다.
이 화면을 보면서 미투란 것이 얼마나 고민 없이 진행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서지현 검사가 미투고발을 한 것은,
여성 검사가 검찰 조직 내에서 위력에 의한 성추행을 당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위력에 의해 불이익을 당했고, 조직의 비겁함에 의해 사건이 은폐됐던 것에 대한 고발이다.
이 혼자서는 감당하기가 힘든 '거대한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용기'를 낸 것이다.
하지만 미투라고 인용됐던 이 사건의 핵심은 '저 정도 성추행'이었다.
어디에서 미투의 정의를 찾아야 하나?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나쁜 기억이 여성에게만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군인들을 매일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까지 위력과 물리력에 의한 그 비굴한 자책은 축적된다.
그때 왜 가만히 있었을까?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인 정봉주 케이스다.
이 기사를 보면 JTBC와 손석희가 얼마나 미투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보인다.
일단 프레시안의 황당한 주장이 100% 확실하다고 가정해보자.
(가정하기조차 싫을 만큼 허술함에 대해서는 눈 딱 감고 견뎌보자.)
100% 사실이라고 치면 위력과 시스템은 어디서 등장하는가?
어디에서 미투의 정의를 찾아야 하나?
정봉주 미투는 진실게임의 측면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하는데(프레시안 측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투의 범주에 드는가이다.
그리고 부디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자.
특정 성별이 아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인에게의 제언이다.
아니다. 표현을 너무 미화했다.
어리광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은 성인이고, 선택의 자유가 있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당신이 불편하다고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불편함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성인이다.
어리광 부리지 마라.
개인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가 성인들의 책임감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법으로, 제도로, 정책으로, 과보호로 성인을 어린아이 취급하는가?
난 그것이 진짜 여혐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 서서 비난에 안주한다면 그것이 PC주의다.
정말로 미투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게으름을 버려야 한다.
아니 버려야만 했다.
개인적으로 미투운동의 들불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면 그 불길을 살리기 힘들 정도로 피로감은 커졌다.
프레시안과 JTBC가 큰 역할 했다.
언론은 정의하고, 해석하고, 판별하고, 고민해야 했다.
언론이 미투를 위해 고민해야 했던 것은 안젤라가 아니라 이 문제들이었다.
조금만 미투를 진지하게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조금만이라도...
정말 당신들은 진지했는가?
나는 자신들의 얄팍한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막말을 쏟아내는 당신들에게서
그 진지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난 당신들의 미투에 위드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