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페리항 방향의 다리 위에서 새벽녘 하늘의 모습과 항구의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멈춰서서 경치에 흠뻑 빠지다.
도쿠시마 가톨릭교회를 찾았다.
어제 주일 미사를 못 드려 못내 아쉬웠는데 다행히도 숙소에서 멀지 않아 자전거 타고 가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7시 미사라고 안내되어 있었는데, 미사가 없다. 마쓰야마 성당에서도 당일 축일이어서 미사가 없다는 걸 신부님을 만나서야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선 아예 안내문구도 보이질 않다. 할 수 없이 기도만 드린다.
원망과 미움의 감정을 내려놓게 하시고 새로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사랑을 온전히 쏟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사랑의 마음을 얻게 되어 감사하다.
아쉬움이 그나마 좀 위로를 받고 자전거를 타고 정문을 나서려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옆 작은 건물로 뛰어 들어가신다. 혹시나 해서 따라 들어갔는데 거기가 소성당이다. 이제 막 영성체가 끝나 성체를 감실로 넣는 순서에 내가 들어섰다. 영성체 성사를 못한 게 아쉽긴 했으나 순서에 맞게 조용히 기도하며 영성체의식을 한 거나 진배없다는 마음으로 끝마쳤다. 신자는 세 분밖에 없어 단촐했다.
미사가 끝나 나서려다 나를 안내해준 분과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마쓰야마 성당과 이곳 성당을 오면서 2주간 미사를 못 드리고 기도만 드려 밀떡을 못 먹었다는 것과 영성체하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원한다고 했더니 신부님께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더니 신부님께서 갈아입은 평상복을 신부복장으로 다시 입으시더니, 감실의 밀떡을 내오셔서 제대상에 올려놓으셨다. 이런저런 기도를 봉사자와 같이 외시는 게 나 하나만을 위해서 해주신다고 생각하니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계갑마냥 작은 밀떡케이스를 여시더니 거기서 밀떡을 하나 쥐고는 '그리스의 몸' 하시길래 '아멘'으로 화답하며 성체를 받아 뫼시었다. 축성 기도를 해주시는 동안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스르르 내게 녹아드는 듯하다. 노르웨이 트론헤임 대성당에서 받은 은사만큼이나 감동이었다. 감사와 기쁨이 내게 넘친다.
봉사와 안내를 해주신 분이다
되돌아 오는 길이 활기차다.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들과 8시까지 등교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늦었는지 눈에 불을 키고 쌩쌩 달린다. 치마가 펄력거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위에도 목도리만 두른 채 열심히 패달을 밟는다.
게하 비용을 현금으로만 받는다고 해서 부랴부랴 은행을 돌아다녔는데 시코쿠, 백십사, 도쿠시마 은행이 다 안 된다. 마루나가에 있는 은행인출기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3일을 더 체류해야 하는데 돈이 다 떨어져서 어떡하지? 다행히 우체국의 인출기에서는 작동되어 그나마 안삼이 되었다. 돈을 찾으러 갔다 오는데 1시간이나 소요되었다.
게하 비용을 지불하고 1번 료젠지로 향하는 기차에 오른다. 바로 다음 역인 도쿠시마 역에 내려 환승 열차가 오기까지 잠시 몸을 녹일 플랫폼 내 우동 가게로 들어가 제일 저렴한 걸 선택했다.
밥에 어묵류 3개들이 포함 180엔.
11시 9분 출발하는 반도행 1량짜리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점시 고민에 빠졌다.
난카이 페리항에서 와카야마항까지 가는 배시간을 보니 13시 40분.
고야산까지의 시간을 보면 6시가 넘을 듯. 료젠지를 들렀다 가기엔 무리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료젠지로 가는 걸 포기하고 열차에서 내려 난카이 페리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도쿠시마역 앞 6번 플랫폼에서 탈 수 있다.
오카야마행 배 시간표
페리 승선료만 2,000엔인데 이 가격으로 고야산 역까지 갈 수 있는 기획상품이 있어 잘 됐다는 생각을 할 즈음, 문제가 발생했다.
부킹닷컴에서 예약한 세키쇼인 료칸의 체크인 마감시간이 17시인데, 내 도착 예정 시간이 19시 20분.
숙소측과 연락을 해보니 오후 5시 이후엔 체크인이 안 된다며 캔슬시킨다고 한다.
배와 버스 이용 기획상품은 오늘 하루만 유용한 거라 고야마을까진 갈 수 있겠지만 숙소 마련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고야산 가는 기차가 2월 28일까지 운행하지 않고 버스로 대행해서 도착 시간이 많이 늦어진 것 같다.)
고야산에 있는 오쿠노인 근처에 노숙 장소가 있다는데, 산 위라 추울 것 같아 걱정되기도 하고...
15:40 와카야마항에 도착.
작은 쪽지에 인쇄된 경로를 따라 기차가 대기하고 있다.
열차 배차 시간이 정확한 일본이라서 그런지 환승에 따른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 읺는다.
첫번째 환승을 무난히, 난바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기차역명들이 낯설다.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시코쿠 사람마냥 순박하게만 보이지 않다. 더 세련된 모습들이고 차내는 시끌시끌하며 대화를 주고받는 속도도 빠르다. 차창밖 왼쪽으로는 오사카만이 펼쳐져서 그런 대로 볼만 했지만 반대쪽 주거단지를 보면 확실히 여유가 없이 빼곡히 들어선 집들을 볼 수가 있다. 갑갑하다. 후유증인가. 걸어다닐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먼 산들이 시코쿠를 떠올리게 해주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잠시 눈을 감는다.
텐가차야에서 내려 난카이고야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기다린다. 노선도를 보니 눈이 팽팽 돌아간다.
하시모토행 급행 열차에 오르니 완전 우리나라 지하철 모습 그대로다. 지금까지 기차를 타면서 한번도 서서 간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서서 간다.
부킹닷컴으로 잡은 숙소가 캔슬되어 어디에 숙소를 정할 지 막막한데, 생각해보니 굳이 하시모토에서 대행버스를 타고 다이몬까지 갈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어차피 숙소가 없다면 내일 걸어가더라도 고쿠라쿠바시 역내에서 잠을 자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내엔 잘 공간이 없고. 게다가 역무원이 있어 머물러 있기도 어려운 역이다)
곤고 역을 지날 무렵, 차창밖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차창에 빗방울들이 옆으로 가로질러 흐른다. 어느 정도 외곽으로 온 건지 빈 자리도 생겨 여유롭게 앉아서 간다.
하시모토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구글맵은 5번 홈을 가리킨다. 잠시 배가 고프려고 해서 젤리를 오물거리며 먹는데, 먹는 사람이 나뿐이라 약간은 어색하다. 차창에 비쳐진 하쿠이를 입고 입는 내 모습도 약간은 낯선 듯도 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벗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잠시 졸린다. 계속 긴장하면서 왔더니 피곤했던가 보다.
하시모토 역에서 고쿠라쿠바시 역으로 가는 마지막 환승. 5번 홈이 아니고 내린 그 자리 4번 홈이다. 역무원이 고야산 역 가는 대행 버스를 안내해주었지만 그냥 고쿠라쿠바시 역까지 간다고 말했다. 구글맵도 그 주변에 별다른 건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걸어서 오르면 되지 뭐.
차내는 그래도 아까 탔던 지하철보다는 훨씬 좋은 2량짜리 기차다. 앞으로 40여분을 가면 도착이다.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제법 비가 내리는데 여기선 우산을 빌릴 데도 없고...
아까 탔던 승객들이 대부분 내리고 이제 열차 안은 텅 빈 채로 고쿠라쿠바시로 간다.
역무원이 내가 타고 내린 기차를 하시모토로 보내고는, 나를 붙잡아 두고 다짜고짜로 막 뭐라 거칠게 말한다.
"난 여기 대합실에서 잘 거고, 내일 아침 걸어 올라갈 겁니다"
"안 된다. 여긴 잘 데가 없다. 고야산 역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여기서 머물다 내일 아침에 오른다고 하니 그럼 어디서 잘 거냐고 하면서도 택시를 내려오라고 했단다. 무료라고 하면서. 그러고 보니 나한테 잘해 주려고 하는 건데, 왜 그렇게 떽떽거리며 말해서 오해하게 만드는 거냐구.
"대단히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절을 깊게 올려드렸다.
사실은 하시모토 역에서 역무원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탔으면 편히 갔겠지만, 숙소도 캔슬되어 머물 곳이 없게 되는 바람에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택시까지라도 동원하여 기어코 고야산 마을 역까지 데려다 주시려네. 그렇다고 숙소가 있을 거라 보장된 것도 아닌데...그래도 역무원이 무뚝뚝한 말투에 비해 여간 친절한 게 아니다.
20분을 한데서 기다리니(그래도 역무원은 역무원실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택시가 당도했다.
택시비 비싼 것을 잘 알기에 재차 무료임을 확인받고 택시에 오른다.
차안이 따뜻하니 좋다.
부드럽게 출발하였지만 곧이어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데 약간 겁이 난다. 어두컴컴한 밤길인데다 900미터급을 오르니 눈길이 나타났고, 안개까지 자욱하였기 때문에 초행인 나로서는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이 길을 잘 아는 베테랑 기사는 여유가 만만하다.
다이몬을 지나 임시 역사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신 기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곧바로 간이 대합실로 들어섰다. 여기서 밤을 세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관리하시는 분들이 8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와서 고야마을을 운행(오쿠노인까지 운행)하는 버스에 무작정 오른다. 다이몬을 지나 숙소지역으로 진입, 훼미리마트가 보여 일단 안심했다. 여차하면 마트에서 지새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환하게 불 밝힌 곤고부지 입구를 지나 두 정거장 뒤에 일단 내렸다.
고야산 시내
곤고부지로 걷는 도중에 밤을 지샐 장소를 물색하던 중, 화장실을 발견해서 너무 좋았다.
됐다고 판단하고, 눈 덮인 고야마을을 답습하기 시작했다. 왔다리갔다리 하다 보면 날도 새겠지?
정적의 마을. 다들 날씨가 추워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갔나 보다.
곤고부지 내 도착. 까만 밤, 하얀 눈 위에 빨간 건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 경내다.
9시가 되니 타종을 울리는데, 20여 발. 사진 찍고, 녹음하고, 동영상 찍느라 손가락이 어는 것같다.
타종 소리를 들으며 종각으로 가까이 오시는 분이 있어 함께 종소리에 귀기울였다.
이 시각에 이곳을 찾아나서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의아하게 여기며 타종이 끝난 뒤, 사진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찍어주신다.
그리고는 이 한 밤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또 한 분의 귀인을 만나게 된다.
마쓰야마에서 온 분이신데 불심이 깊은 듯, 지금 오쿠노인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이다.
숙소 문제가 취소되기까지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전화기를 꺼내들고 근처 혜광원(ekoin)에 숙소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숙박비를 벌 기회를 놓칠까봐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스도마리로 5,000엔에 흥정을 하여 예약하는데 성공하였다.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사천인왕상께 기도도 대신 해주셨다.
그리곤 숙소있는 데로 안내까지 해주셨다.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그분의 손을 꼭 쥐어드리고 싶었다. 차가운 날씨에 장갑을 낀 내 손은 차가웠지만, 아까부터 계속해서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핸드폰을 들고서 숙소를 검색하고, 예약하느라 전화도 수차례 거는 등 옆에서 보기에도 꽤나 손이 시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배웅해 드리려고 하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레를 치시면서, 혼자 가시겠다고 하면서 총총 걸음으로 문을 나선다.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작은 배낭을 짊어진 뒷모습이 바랑 걸친 비구니 같은 모습이어서 그분을 향하여 합장하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눈 내린 겨울밤 고야산 마을에서 다시 한번 귀인을 만났는데, 넋이 다 나간 듯했다.
고야산 마을에서 혼자서 밤새 이 일대를 서성거릴 나를 안타깝게 생각해주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고쿠라쿠바시(극락교)를 넘어 들어온 이 곳이 극락이로구나!
혜광원(ekoin) 숙소 내부, 외부 정원이 예쁘다.
목욕(오후로)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23:30 욕탕에 들어가니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