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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Jul 29. 2018

여행병이 도졌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여행이었다

 여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목적이나 일행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고 일정이나 방식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녀온 다음에는 좋은 여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로 나눌 수 있다. 나는 가끔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병에 걸린다. 단순히 좋은 정도로는 안되고 너무 좋은 여행일 때 그렇다. 

일본의 흔한 길거리 풍경과 내 그림자. 작게 찍힌 맨홀도 예쁘다.

 오늘 오후 짝꿍 A, 친구 K, 동생 S와 함께한 홋카이도 여행에서 돌아와 짐을 풀고 빨래를 했다. 열 번은 넘게 다녀온 익숙한 일본이다. 홋카이도만 해도 세 번째라 삿포로 시내는 지도 없이 다닐 만큼 눈에 익었다. 9년째 연애 중인 A, 20년 지기 K와 대학 동기인 S가 함께했다. 이 모두와 외국에 다녀온 경험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니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곳에 다녀왔다. 우리들은 랜드마크나 요란한 필수 코스를 따르지 않고 로컬들의 일상을 즐긴다. 삿포로에 세 번째인데 차량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TV타워를 스치며 봤고 나는 맥주 공장도 가보지 않았을 정도다. 느지막이 일어나 책을 읽기도 하고 지도에서 찾아본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주점에 들러 한 잔 기울인다. 숙소, 아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골라온 술을 기울이다 잠들면 하루가 간다. 그런 평범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피곤해서 한 숨 자야만 할 것 같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 핸드폰을 잡아봐도 황망하고 몸을 뉘었더니 막 안달이 난다. 지난 8일간의 여행을 돌이켜보면 꿈이었던 것처럼 희미하다. 사진을 정리하고 블로깅을 시작할까 사진첩에 들어가 첫날의 사진을 봤는데 황급히 닫아버렸다. 며칠을 함께 보낸 일행들이 옆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고 저녁엔 문을 나서 거리를 걷다 주점에 들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옆에는 일행이 없고 나는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왜인지 모르게 안달 난 몸과 마음은 어쩔 줄을 모르겠고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평범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여행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여행이었다. 그냥 좋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너무' 좋은 바람에 여행병이 도졌다.


 여행병에 걸리면 특별한 약이 없다. 바이러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경험과 기억, 마음과 감수성 때문이니 달리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바로 현실로 휙 고개를 돌린다고 낫지 않는다. 낫기는커녕 붕 떠버려 현실로 제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떠있을 수밖에. 그리운 건지 우울한 건지 아련하게 추억하다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우울 아닌 우울함 속에서.

삿포로의 작은 징기스칸집

 지난 2월에 A, 그리고 이번에도 함께한 S와 삿포로에 다녀왔다. 그때 우연히 들렀던 좁은 골목 안 징기스칸집이 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노렌을 걷고 들어서는 순간 세트장 같은 분위기에 압도됐다. 순박하게 웃으시는 친절한 아주머니 마스터가 반겨주셨다. 식사 중 오랜 친구들이라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 무리가 들어와 우리 옆 다찌에 나란히 앉았다. 각자 일행들끼리 대화하던 중 아주머니 몇이 말을 걸어와 일어를 잘하는 S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에게 잘 끼어들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한 일본인들이어서 그랬는지 그 기억이 꽤나 깊이 남았다. 식사는 물론 맛있었고 일본 소주를 좋아하는 내가 연신 잔을 비우자 마스터가 대단하다며 웃으셨다.


 짧은 삿포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몇 주가 지나도록 그 작은 징기스칸집이 내 마음 한편에 있었다. 구글 지도와 블로그에 포스팅했지만 동시에 막 숨겨두고 싶은 집이었다. 나만 알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많아지면 뭔가 뺏길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러니까 그것도 여행병의 한 증상이었다. 그곳을 이번 여행의 첫날과 마지막 날 방문했는데 이번 여행병에 단단히 한몫했다. 한국인들이 종종 찾아오는 게 신기하다 하셨는데 일본어 메뉴밖에 없어서 S가 번역하고 A가 손글씨로 적어드렸다. 한국에서 챙겨간 문배술과 볶음고추장과 함께 계산 후 드리니 너무 좋아하셨다. 파일에 고이 넣으시며 라미네이트 해서 쓰시겠다고. 그 어떤 선물보다 고맙다고 길가까지 나와서 배웅하셨다. 물론 분위기도 맛있는 고기도 그립지만 아마도 사람 때문에 병에 걸리는 거겠지.

북해도 청의호수. 운 좋게 날씨가 도와줬다.

 파란 물빛과 나무, 하늘의 조화가 아름다운 청의호수를 보러 비에이에 갔다. 후라노의 라벤더 밭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에겐 그저 지나다 보면 그만인 정도였다. 버스투어는 싫어 차량을 하나 빌렸다. 오키나와에서 며칠 몰아봤다고 오른쪽 핸들이 제법 손에 익었다. 급히 깜빡이를 켠다고 와이퍼를 조작하는 실수도 한 번 밖에 안 했으니까 제법 괜찮았다. 조수석에 앉은 S는 "형의 엑셀 밟는 느낌이 저번과 달라졌네요."라고 했다. 날씨가 도와 청의호수는 아름다웠고 라벤더는 역시 그냥 그랬다. 아,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참 맛있었다. 어차피 차량도 빌렸겠다 비에이에서 1박을 하고 오려 멜론 농장의 숙소를 잡아뒀다. 오두막 Lodge이라 이름 붙인 그러니까 농장 한편에 나무로 만든 그런 숙소였다.

비에이에서 묵었던 숙소

 가기 전에 딱히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저녁 즈음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근처 갈만한 식당을 물으니 차로 15분 거리의 스시집을 알려줬다. 그 스시집이 저렴하고 맛있었다는 것도 변수이긴 하지만 그 정보를 알려준 미즈노상이 큰 변수였다. 대마 문화 Hemp Culture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멋진 근육을 뽐내던 그. 농장 안을 둘러보니 스케이트보딩, 스노우보딩, 서핑, 클라이밍 등 다양한 스포츠에 심취해 하지 않는 걸 찾는 게 빠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는 스포츠와 농장일 모두 때문이겠지.

미즈노상이 내어준 유바리 멜론과 토마토, 그리고 깊은 밤 풍경

 "만약 원한다면 저녁 먹고 와서 같이 맥주 한 잔 하자."던 미즈노상이 결국 우리와 합석을 하고 꽤나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영어를 잘 못해 옆에서 조용히 맥주만 마시던 부인은 칫솔과 치약을 건네며 양치 꼭 하라고 타박하곤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북해도의 시골 농장에서 일하는 인생 선배 미즈노상은 초면인 우리를 구면처럼 대했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해줬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래 미즈노상도 이번 여행병의 확실한 바이러스다.


 이런저런 얘기 중 다리에 여러 번 수술을 했고 매일 아픈 나를 향해 "아키라멘나.", "Never give up."

 K와 S에게도 "포기하지 마."

アキラメンナ


 여행병이 도져 무어라도 해야겠어 황급히 타자를 두드리는 지금 내 손이 점점 멀리 저 아래로 멀어지는 것 같다. 머리와 몸은 의자에서 붕 떠올라있는 느낌.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이런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 계속 아프겠지. 이번 여행병은 좀 오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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