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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공학도 Jun 10. 2023

좋은 삶은 무엇인가

책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1. 민감해져야 할 때와 둔감해져야 할 때.


최근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주변에 매우 둔감한 사람인데, 우리 아내는 엄청 민감한 사람이라 이제야 내 주변을 돌아보게 돼."


살다 보면, 그 민감함과 둔감함 그 사이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절하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한다.

너무 둔감할 때는 내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과 내 선택의 의미를 충분히 곱씹을 수 없게 되고,

또 너무 민감하면 정작 내 선택을 믿고 나아가야 할 때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간다.


정답은 역시나 이번에도 그 사이 어디쯤인가. 

본인의 상황과 시점에 맞는 그 지점을 모르면, 마지막 눈 감는 그 순간 '아... 그건 아니었...나?' 되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2.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은 시대를 관통한다. 이 책은 1886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 그래서 어떻게 살래?"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이반 일리치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며, 아마 그때도 SNS가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받는 삶이지 않았을까. 


고위직 공무원, 아름다운 아내와 자녀들, 큰 집. 


하지만 작가는 어김없이 표면적으로 성공으로 보이는 이 삶에 문학적 현미경을 들이민다. 

그리고 그 삶의 내면을 깊숙이 탐구한다. 

(이것이 문학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이번에도 책은 도끼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19세기의 어느 장면은 우리 시대의 장면과 겹쳐진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쯤, 멀리서 봤을 때 성공적으로만 보이던 그 삶이 어딘가 찝찝하게 느껴진다. 

혹시 우리 내면에 있는 비슷한 욕망과 그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3. '목적'으로서의 삶

오늘 하루를 그 자체의 목적으로서 사는 시간보다, 

또 다른 하루를 위한 도구로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는 것 같은 것은 내 기분 탓일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조 속에서 한 개인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시대가 공유하는 여러 문제에서 개인이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개인의 취향 껏 최대한 그 하루를 온전히 목적으로 대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야 되지 않을까.


문득 공원을 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하루 30분씩 달리기를 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더 좋아질까.

달리기는 하나의 예시고, 꼭 달리기일 필요는 없다. 

그저 취향껏 온전히 그 시간을 대할 수 있는 시간.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이 웃고, 조금 더 많이 삶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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