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좋아한 색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마치 혈액형이나 독서 취향을 묻는 것처럼.
물론 나의 성격이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저 화가는 뭔가 특별한 색을 좋아할 것 같은 얇은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색은 없습니다.”
실망하는 눈치이다.
대화를 이어가거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 내놓아야 한다.
“어릴 적에는 보라색을 좋아했습니다. 보라색 중에서도 청보라가 좋았지요.”
“특별한 이유라도?”
“그냥 보라색을 보고 있으면 몽환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요즘도 보라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니요, 앞서 말한 것처럼 특별히 선호하는 색은 없습니다.”
특별한 한가지 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선호하는 색조는 있다.
젊었을 때는 칙칙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갈회색, 청회색 색조가 좋았다.
이것은 슬픈 발라드나 헤비메탈 노래를 좋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이런 음악이나 색조에 끌렸는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아무튼 색은 직관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정치세력이나 기업이 이용하기도 한다.
러시아,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피와 열정을 연상시키는 붉은색이나 오렌지색, 녹색을 전면에 내세운 혁명도 있다.
또한 정당의 상징을 노란색, 파란색, 다홍색 따위로 규정하기도 한다.
특정 색을 각인시켜 상품판촉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맥주는 짙은 갈색, 소주는 녹색이나 하늘색, 어린이용품은 노란색, 여성용품은 분홍색(핑크)으로 고정되어 있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 사람들은 붉은색과 노란색을 특별히 선호한다.
붉은색은 액막이를, 노란색은 황금, 부귀를 뜻하기 때문이다. 중국음식점이나 술의 포장은 대부분 이 두 가지 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미신(迷信)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나 정치집단, 조직이 정하는 색은 철학, 사상을 반영한다.
프랑스 국기의 색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고, 태극기는 우주의 본성을 담고 있는 색을 사용하며 미국 국기는 순결, 용맹, 정의라는 상징이 붙은 색을 사용한다.
일장기의 경우는 일본민족의 꽃인 무궁화의 흰색과 붉은색을 차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 우리 민족은 어떤 색을 좋아했을까?
위의 사례대로 조선시대의 철학과 이에 따른 미학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청색, 하얀색, 다홍색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색은 청색이다. 물론 청색은 녹색과 파란색의 혼용이다.
청색의 현실적인 색이 옥색이다. 청색은 철학적 개념인 맑은 청에서 유추된 색이다.
양심을 눈이 보이게 표현한 색인 것이다.]
청색(靑色)은 군자의 상징인 맑은 청(淸)에서 유추된 색이다.
지극히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색이다.
관념적인 청색은 현실적인 옥색과 연결된다.
옥색은 은은한 청색(파랑과 녹색의 결합)이다.
옥색은 의복이나 장신구, 생활용품에서 두드러진다. 도포, 치마, 저고리, 옥가락지, 노리개, 자개농, 붓통, 청화백자 따위가 있다.
하얀색은 선비의 상징에서 유추된 색이다.
‘백의민족’ 따위는 개구라이다. 철학적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백성들이 흰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염색한 옷을 입으라고 장려했다.
불필요한 노동력과 재원이 낭비되는 흰옷을 고집한 이유는 순전히 멋내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흰색 옷은 때가 쉽게 묻기에 자주 빨래를 해야 하고, 잿물에 방망이로 두드려 세탁하는 방식은 옷감을 빨리 훼손시킨다.)
[학창의는 공부하는 유생이나 선비들이 입었던 옷이다. 심의에서 변형된 말이다. 학창의는 학의 날개를 닮은 옷이란 뜻이다. 선비학춤도 학을 흉내낸 것이다. 학은 신선의 상징이다.
학춤을 춘다는 것은 자신이 곧 신선, 군자를 추구한다는 말과 같다.
도포의 소매가 길어진 이유도 학의 날개를 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이 땅을 신선에 사는 곳으로 여기고,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신선이라고 여겼다.
신선의 상징은 학(鶴)이다.
학은 몸통이 하얀색이고 목의 일부와 꼬리는 검정색이다.
이런 학의 생태를 이용하여 학창의(鶴氅衣)를 입었고, 하얀색 도포를 입고 학춤을 추었다.
의복 말고도 생활용품인 백자, 백모란, 백목련 따위가 있다.
[겸재 정선, 정홍래의 그림에 나타나는 아침해, 붉은 해는 단심을 뜻한다. 즉 붉은 마음의 상징이다.
붉은 마음은 지조와 절개를 뜻한다.
이런 아침해의 색이 현실에서 다홍색 댕기나 치마, 노리개로 구체화되었다.]
다홍색은 노란색이 살짝 들어간 밝은 빨강색이다.
다홍색은 의례복이나 장신구, 댕기, 가마, 신발 따위에 다양하게 쓰였다.
다홍색의 사상적 연원은 단심(丹心)이다.
단심, ‘붉은 마음’은 ‘지조와 절개’의 뜻이다.
미술작품은 색의 혼색, 명도, 채도, 색조 따위에 의해 표현하기 때문에 특정 색만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청색, 하얀색, 다홍색은 미술작품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는다.
또한 백성들의 삶 속에서 특정 색을 선호했다는 증거도 없다.
다만, 온갖 색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근본적인 색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색이 뭐냐고 묻는다면,
가장 철학적이면서 군자의 색인 청색, 흰색, 다홍색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주저 없이 청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