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강세황의 괴석도, 우-허련의 괴석도. 괴석은 특별한 돌이라는 뜻이지만 멋있고 빛나는 돌이 아니다. 오히려 못나고 볼품없다.]
최영(崔瑩) 장군은 고려 말의 사람이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최영은 병서와 무술을 익혀 장교의 길을 걷는다.
최영 장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위로는 중국의 홍건족 잔당의 침입을 물리치고, 아래로는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을 소탕했다.
왜구들은 최영 장군이 나타나면 ‘백발 최가 나타났다!’를 외치며 도망가기 급급했다.
당연히 백성들에게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세상은 어지러웠고 고려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놓여있었다.
최영 장군은 망해가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최영 장군은 어릴 적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최영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을 평범하게 해석하면,
황금이 뜻하는 권세와 부귀, 허영 따위를 하찮은 돌처럼 여겨 얽매이지 말고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이 된다.
황금을 돌처럼 여긴다는 말은 권력과 재물, 부귀를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딸은 영부인이었다. 당연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을 멀리한다면서 돈과 권력을 가진다는 말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황금보다 중요한 돌의 상징
사람들은 돌을 흔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유학문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돌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돌의 가치를 통해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출세, 권력, 사랑,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돌을 애지중지 아끼고 심지어는 돌을 소재로 그림까지 그렸다.
돌로 집안을 장식했으며 진정으로 돌처럼 살기를 바랐다.
이런 돌을 괴석(怪石)이라고 부른다.
괴석은 뛰어나고 특별한 돌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한 돌이라고 하면 아주 멋있고 귀한 돌을 떠올린다. 동물의 형상을 닮았거나 산수화 무늬가 새겨진 돌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이다.
선비들이 사랑했던 괴석은 못나고 형편없는 돌이다.
괴석을 황금보다 소중하게 여긴 이유는 유학적 가치와 상징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인격적 완성체를 군자라고 한다.
괴석은 군자를 추구하는 사람의 상징인 것이다.
군자와 괴석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군자는 변치 않는 양심을 가지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괴석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군자는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낸다.
괴석은 비바람에 몸이 깎이고 구멍이 뚫릴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양심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양심의 씨앗을 키워 사회적 열매를 맺는 과정이 삶이며 인간의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이 흔하고 평범한 돌과 가장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괴석은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지조와 절개는 뭔가를 지키고자 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은 뭘까?
지조와 절개의 대상은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풀이한다.
양심은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다.
만약 양심이 없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르지 않은 하찮은 존재가 되고 사회는 부정부패와 약탈, 살육이 판치는 지옥이 될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철학으로 나라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을 우주적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진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인의예지가 곧 양심이 된다.
양심이 없다면 조선이라는 국가도 존립기반을 잃는다.
무엇보다 인간 존재 자체의 가치가 무너진다고 여겼다.
인류문명은 밥이 아니라 철학이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철학이 밥 먹여 주냐?’며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사람은 밥보다 철학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
인류문명은 밥이 아니라 철학으로 이뤘기 때문이다.
최근에 주목할만한 인류학적 발굴이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 유적지 일부]
당초 학계는 인류문명이 ‘농사’에서 시작했을 것으로 봤다.
사냥·채집활동으로 연명하던 인류가 쌀·밀 등 곡물을 인위적으로 발육시키는 기술을 발견함에 따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출현해 가장 많은 재력을 가진 자가 왕(王) 등 권력자에 올라 안정적 통치를 위해 종교를 탄생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런데 1963년 터키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 지역에서 이 같은 통념을 뒤엎는 유적이 발견됐다. 바로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다.
여느 고대 유적과 다름없이 돌무더기로 이뤄져 있던 이 유적이 본격 연구되기 시작한 건 1994년이다.
발굴팀을 이끈 독일 고고학자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등을 통해 충격적 사실을 알아낸다.
이 유적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 2000년’ 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지하에 묻힌 유적은 레이더로 스캔한 결과 매머드가 활동하던 플라이스토세에 해당하는 ‘1만 4000~1만 5000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명은 수메르 문명이다.
그런데 수메르 문명과 지금의 간격(약 5000년)보다 괴베클리 테페 문명과 수메르 문명 간 간극(약 7000년)이 훨씬 더 크다.
1만 년 전은 이제 겨우 식물 몇 포기 심었다가 죄다 말라죽는 원시적 농업이 시작되는 신석기시대 초기였다.
당시는 인류가 말(馬)을 길들이지도 못하고 수레바퀴조차도 발명하지 못한 채 오로지 도보에 의지해 육식동물 습격, 추위, 더위, 질병, 굶주림 등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높이 5.5m, 무게 10~20t의 거대한 돌기둥을 수없이 세울 정도로 대단히 많은 인구가 한 곳에 결집할 수 있었던 배경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학계는 고민을 거듭하다 충격적인 가설을 내놨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해 인류를 불리고 종교에 빠져든 게 아니라, 종교 등 모종의 이유로 집단을 형성한 뒤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농업을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코리아 투데이/박진영 기자 2018.6.21.)
인류문명은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주장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떨어져 사는 것보다 함께 집단을 이루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인간은 혈연을 중심으로 한 부족 단위로 생활했다.
하지만 부족 단위로는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시키지 못한다.
소집단을 통합하여 거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이나 음식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철학과 종교가 있어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주고, 철학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예술은 삶의 태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 문명은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이나 종교가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흔하고 못난 돌은 세상 모든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수많은 사물 중에서 돌을 선택하여 양심의 가치를 투영한 이유는 뭘까?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가장 흔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형체를 이루는 사물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돌이다.
이렇게 흔한 돌은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한다.
저마다의 모양을 가진 돌은 저마다의 모습인 사람들이다.
잘났든 못났든, 모든 사람들은 우주적 본성인 양심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둘째, 돌이 곧 땅이다.
돌이 잘게 부서지면 흙이 되고, 흙이 뭉쳐서 굳으면 돌이 된다.
땅은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양심은 땅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나 우주의 미생물과 양심은 아무 관계가 없다.
셋째, 돌의 단단함이다.
돌은 단단해서 좀처럼 형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변치 않음, 영원함’의 상징을 붙였다.
양심은 변치 않아야 하기에 돌의 성질과 잘 맞는다.
선조들의 괴석 사랑
조선시대, 괴석은 변함없이 지켜야 할 양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문인화(文人畵)는 선비들이 수양용으로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문인화의 단골 소재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따위이다.
여기에 괴석도 빠지지 않았다.
화가들도 괴석을 아주 많이 그렸다.
겸재 정선, 강세황과 같은 선비화가부터 단원 김홍도, 신윤복을 비롯한 궁중화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괴석 그림을 남겼다.
괴석 그림은 우리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서양화에서 기초를 배울 때 인물을 그리는 것처럼, 우리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괴석을 먼저 그렸다.
우리 전통 그림에는 온통 괴석으로 채워져 있다. 괴석을 잘 그리지 못하면 화가가 될 수 없었다.
[김홍도/봉래 선경/23.2*30.3/수묵담채/연도미상.
실내가 아닌 실외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작은 폭포가 있고 울타리 안쪽으로 넓은 상이 놓여있다. 상 위에는 도자기가 있고 그 안에는 산호로 보이는 것과 종이가 꽂혀있다. 그 앞에는 파초와 괴석이 있고 학이 노닐고 있는 풍경이다. 봉래는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한 산이며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의 중심은 인간의 양심을 뜻하는 괴석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괴석에 차별이 생겼다.
부자나 일부 권력자들은 괴석으로 허세를 부렸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면서도 빛깔이 좋은 커다란 돌을 찾았다.
특히 중국의 큰 호수에서 있다는 태호석이나 개성 근처 골짜기에서 나는 침향석, 제주도의 수포석이 인기가 높았다.
짝퉁이나 위조 돌이 나돌고, 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했다.
유려한 괴석으로 집안을 장식하면 마치 양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괴석은 점점 사물의 형상을 닮은 수석으로 변해갔다.
최영 가문은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낼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최영 장군은 괴석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제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황금은 그야말로 권세, 재물, 부귀 따위를 뜻한다.
괴석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굳건히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연결하면 권력과 재물을 사회적 양심에 맞게 수용하고 인간의 존엄이나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사용하라는 의미가 된다.
최영 장군은 항상 못난 돌을 곁에 두어 권력의 남용과 재물의 허영을 경계하면서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황금을 얻거든 양심의 돌을 생각해라. 황금을 잘못 쓰면 인생을 망친다. 물질 재부와 권력은 양심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황금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사랑받는다. 돈을 벌고 쓰는 것도 결국은 사랑받기 위함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