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를 돌면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이다.
태기산(1,261m) 줄기의 해발 700미터 쯤. 푸른 산과 구름 걸린 하늘만 보이던 천옥(天獄) 자리다.
이효석 생가가 있는 봉평의 느릿한 산중 마을 정취를 느껴보거나, 깊은 산중 초대형 리조트 속의 현대적 휴양 문명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이 골프장은 오직 코스 자체로 음미할 만하다.
1999년 잭니클라우스 설계로 문을 열었다.
국내 처음의 잭니클라우스 설계작, 그것도 잭니클라우스의 ‘시그니처 코스’다. (시그니처 코스에 대해서는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에도, 이전의 포스팅에도 적었다)
하늘이 자연 감옥으로 가둔 평창 깊은 산중에, 골프의 반신반인 잭니클라우스가 빚어놓은 결계(結界)가 첫 홀부터 마지막 홀까지 ‘18 나한진(十八羅漢陣)’처럼 극적(Dramatic)으로 펼쳐진다.
레이크코스 1번 홀 티잉 구역의 전망은, 코스 조형 조경의 아름다움인지 자연이 빚은 풍광인지, 또는 골퍼 마음속 샷 구현 상상력이 자아낸 긴장의 황금률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다음에 맞는 파4 아일랜드 그린의 ‘시그니처 홀’에서 그런 혼돈은 점증하고, 플레이어의 흥분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드높아진다.
'골프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속단할 수도 있는 지점이다.
이 홀들만 그런 게 아니다. 마운틴코스 2번 파5 홀은 위태로운 가운데 유장하고, 마운틴 8번 파3 홀은 포근한 듯 거칠다,
마무리 지점인 레이크코스 7,8,9 번 홀에는 자연과 대화하고 코스와 투쟁하며 골퍼 스스로를 발견하게 하는 극적 안배가 있다.(홀들에 대해서는 본격 탐사기에서 다루려 한다)
코스 기능 자체의 완결성이 주는 아름다움이랄까.
플레이어의 기량과 생각을 시험하는 설계의 기능 배치가 조형 조경의 심미적 형태와 만나서 갈등과 긴장의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홀마다 빚은 이유와 이야기가 선명하고, 그것들이 이어지는 극적 전개가 팽팽하다.
인천 송도의 평지에 이국적으로 조성된 '잭니클라우스GC'에도 그런 맛이 있지만, 한국의 깊은 산중에 펼친 풍미는 별나고 정겹다.
울창한 원시 소나무 숲에 드문드문 보이는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 군락, 연분홍 참철쭉 꽃무리 들이 조경 화수목인지 제멋대로의 자연인지 모르게 어우러진다.
(문득, 골프를 한다는 게 영화 ‘와호장룡’ 같은 무협 세계를 현실에서 꿈꾸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특별히 멋을 내지 않아도 이곳은 코스와 자연 자체가 조경일 것이다.
1999년 문을 연 뒤 특별한 코스 개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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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산다. 땅을 깎아서 문명을 빚는 것 또한 생존을 위한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
골프장을 만들려면 산을 깎아야 하는 게 우리나라 땅의 형편이니 깎인 자리마다 원통함이 서려있을 것이다. 깎아냄의 최소한이 어느만큼이어야 하는지, 어떤 아름다움으로 ‘재자연화’ 해야 하는지 답을 아는 이는 없다.
골프장 이야기를 적어 나가다 보면 다친 산의 이야기도 얼마간 들어주는 셈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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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골프장이야기] 둘째 권 집필을 위한 골프장 탐사 중의 단상입니다.
첫째 권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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