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팽이 May 10. 2022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 글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과일 시식 행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고 말했었다. 사실 그 글을 쓸 때는 엄살을 부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새로운 일을 앞두고 긴장되는 내 심경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처음엔 긴장하겠지만 결국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해줬고 지금까지 잘해온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배반이었다.


 일단 근무 시작 전날 심장이 쿵쾅대는 통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고 했으나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밤을 꼴딱 새우고 마트에 갔다. 근무를 시작하려고 준비하는데 머리가 좀 띵 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따가 직원 휴게실에 가서 눈 좀 붙이면 나아질 거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추가되고 심해졌다. 어지럼증, 오심(속이 메스꺼워 구토를 할 것 같은 느낌), 식은땀이 나는 것과 더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직원 휴게실에서 잠깐 눈 붙이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서 휴게시간에 근처 내과를 찾아 나섰다. 내과는 밖에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곳이 오전 진료만 하는 날이었다. 하는 수없이 개인 의원이 아닌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종합병원에 갔는데, 여러 검사를 해봐야 된다고 해서 비싼 돈 주고 검사를 받았다. 신경과, 심장내과, 소화기내과에서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았다. 하지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정상이었다. 허무했다. 하지만 근무를 다시 시작해야 하기에 임시방편으로 신경과와 소화기내과 약만 처방받고 병원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약을 먹고 근무를 하는데 차도가 전혀 없었다. 어지러움과 오심을 꾸역꾸역 참으며 간신히 버텼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입맛도 없었다. 식사시간이 되자 밥도 안 먹고 직원 휴게실에 쓰러지듯 엎어져서 쉬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날의 근무는 잘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정리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버스 타고 집에 오는 내내 영화 <최악의 하루>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말 그대로 정말 내게 긴 긴 하루였다. 조금 과장 보태서 하나님이 이 아르바이트를 망치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잠을 못 자서 그런 걸 거라고 여겼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내리 12시간을 푹 잤다.


 다음날이 되니 컨디션이 아주 좋진 않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한결 가뿐한 몸으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마트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근무를 시작하니 또다시 이상증세가 시작됐다. 어지럼증도 심한 데다 오심과 쓰러질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됐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시식 매대를 대충 정리하고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S.O.S를 쳤다. 못할 것 같다고, 버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에이전시 담당자는 오늘은 조퇴하고, 귀 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거일 수 있으니 본인이 잘 아는 이비인후과에 내일 출근 시간 전에 내원해보라고 했다.


 에이전시 담당자 말한 집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는 내 증상을 듣고 이석증(귓속에 결석이 존재하는 상태) 검사를 실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전문 장비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냈다. 여기서는 문제가 뭔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체 없이 큰 병원에 갔다.(에이전시 담당자에게는 전화로 근무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둔 상태였다.) 그곳은 이비인후과 의사만 어림잡아 열 명 이상 되는 정말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거기서 어지럼증, 평형, 청력, 청신경 검사 등을 받았다. 수십만 원의 돈이 깨졌다. 부모의 도움도 받았다. 이쯤 되니 정말 왜 이런 건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검사 결과는 또 정상이었다. 이비인후과 정밀 검사에서도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게 되자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정신적인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레스에 대한 자각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기에 앞서 긴장이 되고 걱정도 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앞두고 늘 겪던 거였기 때문에 그게 특별한 징후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택시를 타고 평소 내원하던 정신건강의학과로 향했다. 원장님은 내 증상을 찬찬히 들으시더니 공황발작에 가까운 증상이 발현됐던 거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솔직히 공황발작은 생각도 못했다. 포털 사이트에 나와 있는 공황발작 증상과 내 증상이 좀 달랐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에는 공황발작이 발생하면 보통 10분 안에 증상의 정도가 최고조에 이르고, 1시간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수시간 동안 증상이 지속되었고 죽을 것 같은 공포까진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절망스러웠다. 우울증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원장님도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언젠가 약을 끊고 완전히 회복될 날을 그리곤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공황이라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씨발. 이런 행사 아르바이트보다 힘든 일 무수히 많이 해봤고, 그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아갈 순 없다. 새로운 일, 하기 싫은 일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겨우 이까짓 걸로 공황이 오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근데 와버렸다. 자책감이 심하게 들었다. 원장님은 괴로워하는 날 보며 일시적인 이벤트 같으니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해주셨다. 그리고 공황발작은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도 말씀해주셨다. 위로해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겠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이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이틀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삶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대미지가 너무 컸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정상을 코앞에 두고 매번 미끄러지는 지옥에 빠진 사람 같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여전히 나는 내가 애틋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은 이불을 박차고 밖에 나와서 이 글을 썼다. 지금 이 순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닿기를 바라면서.

이전 10화 임신 공포증에 대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