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베이비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 쓸쓸한 마음에 나방이 불로 날아들 듯 컴컴한 밤 골목에서 환하게 붉을 밝힌 편의점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스르르 미끄러지듯 걸음이 멈춘 곳은 맥주 코너 앞. 네 캔에 만 원 행사를 시작한 이래 매월 바뀌는 할인 수입맥주 목록을 관찰, 골라서 집으로 돌아와 마시는 재미가 생겼다. 어떤 때는 마시고 싶은 맥주가 떠오르면 편의점마다 그 목록도 다르고 보유한 맥주도 다르므로 찾아 다니며 원하는 것이 있나 기웃거리는 열성까지!
같이 고르는 안주는 때마다 다르지만 가장 단골은 바삭한 감자칩이다. 신중하게 1+1이나 2+1 행사가 있는지 살핀다. 이따금 행사 여부에 따라서 안주가 결정되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맥주들은 냉동 칸에서 더 차가워진다. 마침내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내어 고리를 드는 순간 들려오는 ‘푸슈, 탁~’ 소리의 경쾌함이라니! 특히 더운 열대야의 밤이라면 천국으로 한 걸음 다가간 기분마저 들기 마련.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드라마나 영화를 보든 냉장고에 든 맥주들은(두 번째 캔을 꺼냄과 동시에 나머지 두 캔은 냉장 칸으로 옮겨간다) 대개 사라지기 마련이었건만…… 해가 바뀐 뒤로는 더 이상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한두 캔 정도 마시면 그만 마시고 싶다는 신호가 감지되기 때문.
‘읭?’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더 달라고 아우성 치는 일은 있었어도 ‘이제 그만’이라니 낯설기만 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다. 당시 시내에서 최신으로 지어진 고급호텔 연회장에서 펭귄 같은 유니폼을 입고 검정색 나비넥타이까지 메고 서버로 아침 5시부터 저녁 5시까지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던 것.
일이 고되고 힘들긴 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매우 팔팔했던 나는 다음 날의 컨디션을 위해서 일찍 잠드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거나 파티에서 만난 마음에 드는 남자와 데이트 계획을 세우거나 당시에 나처럼 같은 숙소에 묵으며 호텔 인턴생활을 했던 영국 친구들과 바Bar들을 돌아다니며 맥주를 마셨다.
특히 펍Pub의 나라 영국에서 온 두 청년들과의 바 순회는 참 재미있었는데 멋도 모르고 나와 맥주값 내기를 했다가 두 남자 모두 차례로 패배했다는 것. 새벽까지 즐겁게 마시고 데니스까지 들러 아메리칸 스타일 팬케이크로 해장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일정이었다.
두 번째 도전까지 패배했던 날 C가 볼멘소리로 절규했다.
“넌 인간의 모습을 했지만 외계인임이 분명해!!!”
“뭔 소리야, 난 그저 자그마한 숙녀인걸.”
“그러니까! G랑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너처럼 조그만 애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거지?”
“하하, 뭐야, 영국 신사답게 패배를 인정하시지.”
“아니야, 정말이지 네 혈관에는 피 대신 맥주가 흐르고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그러니까 넌 맥주인인 거지.”
“이런, 내 정체를 들켜버렸네. 사실 난 지구인들에겐 밝혀지지 않은 은하계에 있는 맥주행성에서 왔어. 됐냐? 그러니 더 이상 함부로 나에게 도전하지 말라고.”
그랬던 나인데……
아무래도 지구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 보다. 내 혈관에는 더 이상 맥주가 흐르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들처럼 백혈구와 적혈구, 혈장, 혈소판으로 구성된 피가 흐를 뿐. 이제 예전처럼 마셔지질 않는다. 설사 맥주인이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답시고 그때처럼 마신다 한들 그저 시체처럼 누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꿈틀대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긴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든다는 건 그렇게 과거에 당연했던 것들과 하나씩 이별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또한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하였다. 그간 차곡차곡 마셔온 맥주들은 내 안의 뱃살로 돌아왔으니 거 참 맞는 말일세.
이제 이 뱃살과 회자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떠난 뱃살이 화사하고 예쁜 옷으로 거자필반해주었으면…… 바야흐로 꽃이 피고 처자들은 바람 난다는 봄날이 아니던가!
나도 이번 봄에는 바람 좀 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