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득 마흔 09화

이번 생은 맥시멈 라이프!

미니멀 라이프는 다음 생에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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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리 열풍이 부는가 싶더니 이제 미니멀 라이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듯하다. 나에게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없애자는 것이 이 생활 방식의 핵심.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너무 많은 과잉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본래의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것. 물건이 어디 있는지 몰라 다시 사고 그건 사용 뒤에 또 어딘가에 쳐박히고 다시 찾으려다 사고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쌓인 물건이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막상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점령당하는 절차를 밟는다. 쌓아둔 물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작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나 함께하는 시간, 따뜻하고 정성이 깃든 한 끼 식사,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하는 시간, 사람들이 활동해야 할 공간이 줄어든다는 것. 그러니까 이전의 정리 열풍은 그것을 통해 물건 찾는 시간을 절약하고 기운이 순환하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의 미니멀 라이프 열풍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정말 필요한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더 줄이고 없애는 것이 종국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그 과정을 통해서 ‘삶의 본질에 충실함’이라는 쾌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한다.

언제나 유행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아왔던 나는 이번에도 미니멀 라이프에 반하는 맥시멈 라이프를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방에는 구석구석 물건으로 가득 차 있으며, 나 스스로조차도 무슨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뭐 하나 찾겠다고 뒤지다가 삼십 년 전에 친구가 준 엽서를 발견하거나 이십칠 년 전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이 나타나 한동안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것 자체가 일상이다. 어떤 친구는 나에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장애를 겪는 호더의 기질이 보인다며 걱정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이유는 있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일단 1년 넘도록 쓰지 않은 물건을 버리라는 것이 그중 하나다. 문제는 나의 경우 이십오 년쯤 전에 학교 앞에서 받은 학원 홍보용 연습장을 고이 잘 간직했다가 요즘 잘 쓴다는 데 있다. 스누피, 여행, 책, 차Tea, 냉면, 다양한 취미에 관련된 물건 외에 쓰는 돈이 아까운 나는 일단 쓸모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뭐가 생기면 간직하고 본다. 한 해 두 해 세 해…… 세월이 흐르고 난 여전히 그것들을 간직한 채 이사를 다닌다. 물론 이사를 통해 탈락되는 것들도 있다. 실제로 책은 수백 권 처분했고,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던 중-고교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라든지 너무 낡은 자료들은 버렸다. 어쨌든 그렇게 끌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쓴다. 학원 홍보용 연습장은 요즘 새로이 시작한 수묵화와 서예를 위한 연습종이로 딱이라 잘 쓰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교생선생님으로부터 이별선물(?)로 받은 자는 몇 번이고 버릴까 말까 했는데 끝까지 살아남았고, 실제로 요즘 다시 매우 빈도 높게 사용 중이다. 나에게 이런 예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러다 보니 정말 버릴 수가 없는 거다. 까짓 거 새로 사면 되지 않느냐 물으실 수 있겠으나, 완벽하게 내 맘에 드는 대체품을 찾기 전까지는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미니멀 라이프에서도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에게 물건이 많은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가 너무 많다는 것. 그러다 보니 그 각각의 취미마다 꼭 필요한 물품들이 있기 마련인데다가 나란 인간은 뭔가를 하나 하기 시작하면 계속 지속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그걸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거다. 내 취미 목록을 살펴보자.

그림 그리기: 물감(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팔레트, 스케치북, 붓, 연필, 색연필 등
차 마시기: 세계 각국의 각종 차, 다양한 티포트와 찻잔 등
가죽공예: 나무망치, 구멍을 뚫기 위한 도구, 밑을 받쳐줄 고무판, 가죽공예용 왁스실, 다양한 가죽 등
액세서리 만들기: 각종 비즈와 천연석, 가죽끈, 나일론끈, 우레탄끈, 매듭을 위한 장치 등
향초제작: 왁스 녹일 통, 왁스, 향유, 초 심(우드, 스트링) 등
독서: 이삿짐 직원들이 늘 나보고 교수냐고 물어봄
타로리딩: 타로카드, 관련해설서 등
우표수집: 초딩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음
돌수집: 기억 안 나는 시절부터 방방곡곡의 다양하고 예쁘고 잘생긴 돌들을 모으고 있음
일기장 작성: 마스킹테이프, 형광펜, 다양한 색의 잉크와 만년필, 풀, 스티커,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 등
사진: 카메라, 렌즈, 필름 등
스누피: 그냥 일상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물건들 및 컬렉션을 위한 라인으로 나뉨

그냥 대충 생각하며 떠올린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니 각 취미를 어떻게든 미니멀리즘으로 구성한다고 해도 기본으로 필요하고 들어가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러니 이번 생엔 정말 틀렸다.
뭐, 그런들 어떠하리. 난 이런 다양한 잡동사니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장 마음이 안정된다. 그래서 여행 떠날 때도 사용하든 말든 내가 만든 향초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들, 일기장, 책 두어 권, 어반스케치 세트를 가방에 챙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배낭이 늘 무거울 수밖에.
그나마 되도록 물건을 늘리지 않고 각 취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미니멀리즘을 적용하려 애쓴다는 것 정도가 위안이라고나 할까. 이토록 좋아하는 게 많아 미니멀 라이프는 틀렸지만 그래도 즐거운 내 인생에 보탬이 되니까 난 행복하다. 맥시멈 라이프가 진정한 내 모습이자 내 본질인 것인 셈이니 그걸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미니멀 라이프는 다음 생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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