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득 마흔 10화

너나 잘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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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귀가길에 버스 안에서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 보는데 깜짝 놀랄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6차선 대로 한복판을 한 소년이 쏜살같이 휙 가로지르는 모습. 버스는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했고 나는 뒷목을 잡았고 기사 아저씨는 창문을 열고 그 아이를 향해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육두문자를 날렸고 당사자는 아저씨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꾸뻑 숙이며 ‘죄송합니다’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바로 낄낄거리는 비슷한 또래의 무리로 들어갔다. 그들은 친구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다들 싱글벙글이었다. 나를 비롯해 다른 수많은 승객들은 뒷목을 잡은 채로 내일 아침 멀쩡하게 깨어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중인데 저것들을 그냥 확, 이라고 생각했다가 요즘 애들 무서운데 확, 했다가 오히려 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꼬랑지를 내리며 깨갱. 그런데 정말이지 저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좋을까. 방금 친구 하나는 죽을 뻔했는데도 오히려 신이 나서 하이파이브를 날리는 모습이라니. 무모와 객기의 유쾌한 결합이랄지. 기분이 뾰족해지기도 했지만 어쩌면 저 나이 또래에나 저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거란 생각도 함께 찾아왔다. 그러네, 넘쳐나는 호르몬 동지들 끼리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자기들은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생각하든 마냥 즐겁기만 한 나이, 십대.

생각의 시냇물은 자연스럽게 얼마 전 웬일로 카페에 혼자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날로 흘러 들었다. 디저트가 끝내주게 맛있는 곳이었기에 메뉴판까지 먹어 삼킬 기세로 고심 끝에 홍차와 케이크를 골랐다. 그런 뒤 기왕 온 김에 자주 혼자 카페에 온 사람들이 그러하듯 독서나 뭔가를 끄적거리며 열중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준비해온 책과 다이어리를 꺼내고 어떤 것을 할지 고민했다.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면 그 카페가 인기 많은 곳이었는데 장소가 협소해서 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았다. 덕분에 나는 옆 테이블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대화를 시시콜콜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신입생과 이제 막 1년의 대학생활을 마친 선배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란 학업과 교수들에 대한 품평으로부터 학교를 졸업한 뒤에 나아갈 수 있을 진로가 가장 큰 줄기였다. 그리고 줄기에서는 각자의 스무 해 남짓한 인생으로부터 우러나온 경험과 철학, 동기와 선배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가족들과의 관계까지 의외로 세세하게 등장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자니 둘의 인생이 꽤 싱싱하게 자라난 나무의 녹색 잎사귀까지 세세히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흥미로웠던 사실은 둘이서 집안에 대한 자랑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업을 하시는지 오빠가 어느 의대를 다니는지 등. 하아, 저렇게 어렸을 때부터 탐색하고 관심을 가져야 멀쩡하고 괜찮은 남자가 등장하면 채어가는 거구나, 싶어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나란 여잔 딱히 그런 것엔 관심도 없었기에 괜찮은 놈들은 똑똑한 애들이 이미 다 채어가고 이렇게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는 슬픈 깨달음까지. 어쨌든 의도치 않게 들어버리게 된 둘의 대화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결국 사랑이었다. 신입생은 마음에 후보로 점지해둔 남자 선배들의 인성(!)을 알고 싶어했고, 선배는 귀여운 후배에게 동기들의 진실을 열성적으로 밝혀주는 한편 잘생긴 남자 신입생의 성향(?)을 궁금해했다. 후배는 선배가 자신에게 흡족한 정보를 전달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잘생긴 동기를 찍은 다른 여자애들의 약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니까 저마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의 사랑에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서 서로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선배님이지만 너무 귀엽고 말이 잘 통해서 좋아요’, ‘우리끼리니까 말인데’, ‘이런 이야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 같은 말이 대화 중에 자주 등장했다.

은밀한(?) 정보교환이 끝난 그들이 일어섰을 때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 배웅할 뻔했다. 다행이 그저 마음 속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곧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헬조선, 삼포세대,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이들 대화의 깔때기 결론이 사랑이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물론 요즘 세대의 사랑이란 풍덩 빠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이 언 호수 위에서 미끄러져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시대의 문제이고, 시대의 사랑이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내가 저 나이 때도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느라 정신 못 차리던 것이 떠올라 웃음마저 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였던 삼십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땐 처해지는 상황이 너무 달라 고민이 다양해지는 시기였다.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애인이 있느냐 없느냐, 어떤 직장을 다니느냐,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이냐 말 것이냐,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등 삶의 길이나 가닥이 어느 정도 잡히는 시기가 그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여행을 다닙네, 글을 씁네, 하면서 갈팡질팡 그 시기를 낭비했고 여전히 여기가 어딘지 나는 누군지 헤매고 있지만.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의 사십대를 잘 보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사십대의 고민은 뭘까. 사랑? 삼십대 까지는 확실히 고민이 됐는데 이제 마흔이 되니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건 함께 연대하며 늙어갈 수 있는 인간관계를 공고하게 다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십대 초반에 이런 방면에 똑똑하지 못했던 관계로 전략적인 결혼을 하지 못했고…… 또 나이가 드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희귀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삶을 통해 처절하게 배워 체득했으므로 사랑에 대해 혹은 결혼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십대의 주된 고민이란 경력과 건강이 아닐까 싶다. 가정을 꾸렸다면 그 가정의 구성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고민일 것이고, 가정이 없더라도 그 나름대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 비용이라는 것은 노동을 통해 마련할 수 있는데 그건 각자의 직업과 연결되는 것이고, 회사 다니는 사람은 회사가 내 삶을 보장해주지 않고 자영업자는 그 숫자만큼의 고민이 있고…… 슬슬 건강을 챙기기 위한 점검을 하며 병원에서 돈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처럼 병원에 싸짊어다 줄 돈이 없는 사람은 건강이 진짜 중요함. 나이가 들수록 결국은 건강이 가장 큰 고민이 된다고들 하기도 하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으며 목을 돌려봤더니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건널목에서 초록 신호를 기다리는데 문득 아까 아이들이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비록 무모한 객기를 부렸을지언정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좋아하는 소녀들과 썸을 타고 사귀었다 헤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고뇌하겠지. 살면서 무슨 일로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추가되겠지. 이십 몇 년 뒤에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그때도 이 나라는 지옥 같은 곳이라는 의견이 팽배하고 사람들은 태어난 수저의 색깔을 탓하며 자조적으로 삶의 여러 가지를 포기한 채 살아갈까. 모르겠네.

그나저나 난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젊고 아름답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걔들은 알아서 잘 살 거야. 그러니 너나 잘하세요.
너님께서 잘하시면 적어도 그만큼은 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테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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