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눈을 뜨긴 했는데 그야말로 눈만 떴다. 전날까지 너무 바빠 강의 준비를 마친 시간이 2시 30분, 잠자리에 든 시간이 3시였으니 말 다했다. 밥을 먹다가도 졸고 씹다가도 졸고…..학창시절 등교시간으로 돌아간 기분. 물론 지금의 나는 강의하러 가야 했기에 그 시간에 깼던 거지만.
강의하러 가는 도서관은 집에서 두 시간 삼십 분 거리에 떨어진 곳이었다.내가 길치임과 초행길임을 감안해서 세 시간가량 잡고 출발.
시작은 순조로웠다. 무사히 첫 번째 구간을 빠른 속도로 달려준 버스에게 고마웠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두 번째 버스를 기다렸다. 일단 타기만 하면 일찍 도착할 것도 같았고.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다음 버스는 꽤 멀리 있었다. 갈등이 시작됐다. 어디든 빨리 다른 곳이 가는 버스를 찾아 근처에 도착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기다릴 것인지. 괜히 다른 방법 쓰다가 몇 번이나 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곳에서 망부석이 되어 무려 40분이란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버스가 왔고 환승할인은 당연히 사라진 상태였고 차는 자꾸만 뱅뱅 돌았다. 출근길 체증도 빠뜨릴 수 없지. 결국 관계자분이 불러주신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만 늦었다. 그놈의 버스에 계속 타고 있었다면 얼마나 늦었을지는 하늘만 알 일이다.
두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만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행선지가 예쁜 조카가 나를 반기는 동생네 집으로 바뀌는 바람에 나의 혼란은 가중됐다. 버스 타려고 길 한 번 건너는데 500m 걸어보신 적 있는지? 무려 두 번 반복. ㅠㅠ
19분 뒤에나 온다는 버스는 멍하니 기다리며 오늘의 무진장 헤매기를 떠올려봤다. 아까 겨우 건너간 버스 정거장에서 기사 아저씨한테 행선지를 물으니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하곤 길을 건너라 했던 모습까지. 길을 건너면서는 이미 몸과 마음이 다 너덜너덜해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집으로 갔다면 도착해서 이불 속에 몸을 묻고 단잠에 빠져들었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헤매는 날이구나.'
그러나까 우리에겐 헤매고 또 헤매야만 하는 날이 할당되어 있다.
아귀가 딱딱 맞아 완벽하고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있고 뭘 해도 누가 뒤에 숨어 고약한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계속 버벅거리게 되는 하루가 있는 것. 그 모든 날들이 골고루 인생에 포진해 있다. 누구도 완벽하기만 한 하루를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원래 그렇게 뭔가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와르르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굉장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스스로 받는 압박이나 자책도 워낙 심했다. 당연히 그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회하는 며칠이 뒤따르곤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연륜이라는 것이 쌓이면서는 나의 그런 태도가 변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한은,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 그게 정말 누군가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다그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다그치다 무너져내리면 가장 손해보는 건 나이고, 부정적인 기운이 주변으로까지 전파되어버리고 만다.
재작년 초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교통상황으로 강의 시간에 늦게 됐다. 머리가 하얘지니 헤메는 강도가 세져 더 늦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강의도 망쳤다. 아쉬웠다는 리뷰들이 내 귀에 들릴 정도였으니.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늘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통제 불능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때 더 이상 감정에 치우쳐 혼을 내보내지 않고 오히려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는다. 덕분에 강의는 무탈히 마쳤다. 사실 제대로 할 수 있긴 할까 걱정이 많았는데 강의가 시작되니 마음이 촥 가라앉으며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게다가 강의 끝나고는 재미있었고 고마웠다며 다음 시간이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만다행.
그래서 동생네 집으로 갈 때는 아주 마음놓고 헤맸다. 내가 오늘 제대로 헤매주는 대가로 앞으로 한동안은 다시 이렇게 진땀 빼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다시 길 하나 건너는 것뿐인데 500m나 되는 정거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연식 있는 사람들이나 알 법한 나폴레옹의 "이 산이 아닌게벼" 유머가 떠올라 혼자 껄껄 웃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까지 고생시켰으나 나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이 거리를 헤매고 있으니 그거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무사히 버스를 타고 이제 막 낮잠에서 깨어나 나를 발견하곤 방긋 웃는 조카의 얼굴을 보니 나의 길고 길었던 여기까지에의 험난함을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너지는 순간조차 그 당혹을 재빨리 처리하고 나머지 무사한 것들은 더 우아하게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 어른으로의 길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폭풍처럼 찾아왔다. 마치 현실은 나귀를 타고 추운 알프스를 행군하던 나폴레옹이 그림에서만은 자신을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백마 위에서 세상 다 가진 듯한 포즈와 표정을 그려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특히 강의할 때는 나를 그런 모습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안다. 앞으로 내 인생에 헤매는 날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걸. 다만 이제는 그런 날이 걱정되거나 무섭지 않다. 내 통제권 밖으로 이탈하는 경우엔 더더욱 그냥 그런 날이구나, 생각하면 되는 거다. 헤매야 할 때 안 헤매려고 발버둥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 졸려 죽겠다. 낮잠 2시간 자서 밤에 못 자나 했는데 웬걸. 어서 빨리 자야겠다.
그나저나 꿈나라에서도 해매는 건 아니겠지? 그저 달콤하고 나른한 꿈만 꾸기를......
덧_ 꾸벅꾸벅 졸며 써서 말이 되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ㅡ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