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일단 멈춤
5_
진료를 하는 도중에도 의사는 자주 자신의 진한 핑크빛 핸드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 전에 새로 샀나보다.
그녀는 무릎 부위를 여기저기 눌러보고 내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종아리를 돌리더니 1분 만에 진단을 마치고는 내게 당신의 무릎의 인대가 무리를 해서 휴식이 필요하니 처방해준 약을 먹으며 최소한 10일은 걷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당신의 고뇌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무거운 배낭을 지고 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걸 안다며 10일이 안 되면 적어도 이틀은 그냥 쉬라고 종용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마치고 나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에게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까 그냥 큰 도시에 머물걸,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아침에 힘들게 병원으로 찾아갔더니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 의사 선생님이 일이 있어서 4시간 후에나 오실 거라며 기다리지 말고 다음 도시는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곳의 병원에 가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정말 열 걸음 걷고 5분씩 쉬면서 3km를 왔다.
꽤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가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푸념의 소리를 늘어놓고 그들의 응원을 들으니 아침보다 기분이 나아지긴 했지만 의사로부터 이렇게 할 일 없어 보이는 작은 도시에서 이틀이나 더 있다 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더군다나 이렇게 되면 정말 로빈 일행과는 영영 어긋나게 된다는 생각에 무거움이 더해졌다.
약국에서 의사가 적어준 약과 벼룩에 잔뜩 뜯긴 팔뚝을 위한 약을 사다가 알베르게를 찾았다.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문에는 유명한 순례자의 표식 지팡이, 표주박 물병, 조가비로 문이 장식되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특이하게 성당 안에 알베르게가 있었다.
무릎은 아파 죽겠는데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계단이 많은지 불평불만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신발을 벗어놓고 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니 갑자기 너무 예쁜 공간이 나타나 아까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불평불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투박하고 커다란 돌로 지어진 벽이 그대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한쪽 구석에는 작은 벽난로가 보였다. 그 위로는 예쁘게 핀 꽃이 있는 작은 화분과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들로 장식되어 있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의자와 램프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큰 탁자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둥근 꼭대기를 가진 내 키보다 크고 매력적인 창이 열려있는데 발코니가 둘러져 있고 붉은 꽃이 핀 화분이 나란히 놓였다.
햇살이 드는 창밖의 색깔은 싱그러운 초록색이었다.
너무 평화로운 느낌 때문인지 인자한 성모마리아가 이곳을 감싸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그러운 그녀의 품안에 들어온 나는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고 느긋해졌다.
계단 위쪽에 마련된 숙소에 배낭을 풀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하고나니 한층 기분이 나아졌다.
빈속에 약을 먹지 말라는 약사의 당부를 떠올리며 빵과 치즈를 가지고 부엌에 내려왔더니 슬로베니아에서 왔다는 커플이 수프를 많이 끓였다며 같이 먹자고 했다.
내 빵과 치즈를 내놓고 다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었다.
커플은 산책을 나갈 생각이라며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했지만 아쉽게도 무릎에 절대 휴식과 안정이 필요한 나로서는 그들을 따라나설 수 없었다.
약을 먹고는 그냥 큰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곳에 여정을 푸는 사람도 늘어났다.
황소의 근접 촬영을 시도하다가 공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는 사람, 학교 선생님, 근사한 외모의 이태리 신부님, 두 번째로 이 길을 걷는다는 멕시코 남자, 기타 하나와 최소한의 돈으로 세계를 유랑중이라는 아일랜드 청년, 무리지어 다니기 좋아하는 중년의 프랑스 부부들, 한 마디도 나눠볼 수 없던 아시아계 커플 등 모든 사람이 함께 음식을 먹는 저녁식사의 인원은 무려 30명이나 됐다.
여분의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테이블보를 깔고 에피타이저, 메인, 후식에 와인까지 곁들인 정식 디너였다. 모두 일사분란하게 설거지까지 끝내고는 슬슬 저녁 산책에 나섰다.
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동참했는데 정말 상태가 오전에 비하면 다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전됐다.
다음 날 아침, 혹시 다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일어났지만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은 여전히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테이블 위에 차려진 아침식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짐을 싸서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세라, 이거 받아.”
어제 내 옆에서 예쁜 글씨로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던 네덜란드 출신 선생님이 내게 깃털을 하나 건넸다.
“이거 여기 도착하기 전날 한 도시의 사원에 갔을 때 찾은 거거든.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떨어져 있기에 주워왔는데, 지금 보니 너에게 오려고 그랬던 것 같아. 고통이 아예 사라질 수는 없을 테니 이 깃털처럼 네 고통이 가벼워져서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랄게.”
고마운 그녀를 꼭 안아주고 산티아고까지의 안녕을 빌어줬다.
나는 그렇게 하루를 함께했던 순례자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두 알의 약을 삼켰다.
에이, 기분도 이상한데 오랜만에 잠이나 실컷 자자.
한숨 푹 자고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었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니 뉴욕에서 왔다는 오스피딸레라 제인과 이곳을 담당하는 현지주민 마리아가 대화를 시도 중이었다.
제인은 스페인어를 모르고 마리아는 영어를 모르니 둘의 대화는 자주 엇나가 보였지만 신기하게 어떻게든 서로 동의하는 결론이 나왔다.
벌써부터 저녁메뉴를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한 제인을 도와준 뒤 시간이 남아 동네 산책을 나왔다.
화창한 날씨가 상쾌했다.
좁은 골목들, 각 집의 뽐내기라도 하듯 여러 가지 꽃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발코니, 아무렇게나 모여 수다 중인 동네사람들, 그 주위를 권태로이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마을 어귀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그 위를 장식하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세세한 풍경을 오랜만에 카메라 프레임에 담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면 동네 아저씨들이 느끼하게 날리는, 아름다운 아가씨에게만 특별히 허락한다는 공치사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시 배가 고파져 빵집에 들렸다.
친절한 미소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동양인이 신기한 듯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그제야 수줍게 웃었다.
교회 앞 광장에 앉아 방금 산 둥근 빵을 뜯어 먹고 있자니 많은 순례자들이 서둘러 이 마을을 통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 내가 봤던 세세한 마을의 풍경을 결코 만끽할 수 없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바쁜 순례자 행렬에서 벗어나 머물러 있음에 작은 위안을 받았다.
문득 인생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야곱이 걷기 시작한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고 나도 그 위를 걷고 있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가며 지금의 나처럼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희로애락에 대해 배워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많은 순례자들의 미소를 받았을 어느 마을의 빵가게 꼬마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언제나 그곳에 있으며 가업을 물려받아 끊임없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빵을 팔게 될지 아니면 도시나 다른 나라에서 언제나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게 될지 내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인생은 결코 멈춤 없이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계속 걷기만 했을 때는 지나가기에 바빠 생각할 겨를이 없던 사실들을 멈춰 있으면서 깨닫게 되다니, 역시 인생은 이상하다.
다시 돌아간 알베르게에서 마을사람들, 이곳 식구들과 지역 와인을 곁들여 빠예야를 먹었다.
하루 더 얼굴 봤다고 식구처럼 따뜻하게 챙겨주는 그들에게 고마웠다.
빨래를 널러 종루에 올라갔다가 주저앉아 주황색 지붕이 인상적인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제는 살짝 가을 냄새도 스민 공기를 들이마셨다.
벽에 널찍하게 난 구멍에 앉아 오래도록 햇살이 길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을이 점차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내 몸도 황금을 칠한 여사제 같아질 즈음 저녁식사를 돕기 위해 내려왔다.
어제와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고, 밤이 지나자 아침이 찾아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놀라운 현대 의학의 힘과 나를 돌봐준 이곳 식구들의 친절함 덕분에 기운을 차린 무릎 덕분에 나 역시 짐을 싸서 사람들과 함께 출발했다는 것.
세상 모두의 인생이 멈추지 않듯, 산티아고를 향한 나의 순례 길도 지속되어야 하니까.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