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직장인의 지하철 생활
직장을 다니면서 현타를 덜 받는 방법이 있다. 살만한 출퇴근길을 만드는 것이다. 출퇴근 시간 또는 이동 루트를 바꾼다던가, 지하철에서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한다던가. 내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살만한 출퇴근길을 스스로 만드는 게 포인트다.
회사 문화가 바뀌는 것이 가장 베스트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갑자기 “내일부터 유연근무제를 시작합니다!”, “1분이라도 초과 근무를 한다면 야근 수당을 지급하겠습니다!”라고 하겠는가. 조직의 문화가 직원에게 상냥한 방향으로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으면 회사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 이렇게 많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진부하지만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서울 직장인들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약 1시간이고, 경기도권에서 서울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1시간 20분이다. 왕복 2~3시간을 출퇴근에 사용한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친한 친구에게 회사를 다니면서 언제 현타가 오냐고 물어봤다. “지옥철에서 숨 못 쉴 때.” 공감하는 바다. 9호선이라도 타는 날엔 장기 하나쯤은 건넬 각오를 해야 한다. 어느 날엔 거만하게 배낭을 메고 탔다가 배낭만 휩쓸려 떠내려간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 시달리다가 내리면 기운이 쪽 빠진다. 삶의 질이 매우 떨어졌다.
근무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출퇴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에어컨 바람이 슝슝 나오는 사무실에서 쾌적하게 근무를 하다가도 지하철만 타면 땀에 절어 녹초가 되는 상황을 막고 싶었다. 책 한 권 펼칠 여력도 없는 1,450원짜리 공간에서 앞사람이 멘 샘소나이트 가방과 뒷사람의 불쾌한 스킨십을 욕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회사를 다녀야 돼?’라는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살만한 지옥철 출퇴근길을 위해 지하철 타는 일을 설레게 만들기로 했다. 내 마음을 내가 설레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쉽다. 별 거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해주고 하기 싫은 건 안 하게 해 주면 된다.
지하철 독서. 나의 유일한 취미다. 책을 읽고 친구들과 떠드는 걸 좋아하는데 직장을 다니다 보니 책 읽을 시간이 마땅치 않다.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억지로 시간을 내서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서재까지 예쁘게 꾸며뒀건만 누워서 닌텐도만 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이 넘어서 읽는 속도가 엄청나다. 한 달에 열 권까지도 읽어봤다. 엄청난 소득이 아닌가.
최근에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 빠져 출퇴근길이 행복했다. 얼른 지하철에 타서 다음 편을 읽고 싶었고, 두 시간 반이 어찌나 짧게 느껴지던지 순간이동을 한 줄 알았다. 회사가 멀다고 투정 부리던 게 쏙 들어갔다. 몰입으로 뇌를 장악하니 현타가 들어올 공간도 없었다. 551화짜리 웹소설을 6회 완독 했고, 이어 나오는 웹툰까지 봤으며, 종이책 굿즈를 사서 또 읽는 중이다. 작가 싱숑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전독시 때문에 월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어요!
귀찮지만 꼭 해야 하는 게 있다. 가계부 쓰기, 스마트폰 사진첩 정리하기, 놀거리(전시회, 공연, 운동, 원데이클래스, 식당 등) 예약하기. 꽤 성가시지만 하고 나면 나중이 편해지는 일들이다. 하지 않으면 나중에 꼭 대가를 치르는 일들이기도 하고. 따로 시간 내서 처리하기에는 애매하다.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가계부를 쓰면 좋은 점은 그날의 과소비를 막게 된다는 것. 스타벅스가 아니라 메가 커피를 가게 된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 청년도약계좌도 신청했고 적금도 들었다. 전세 대출을 갚은 적도 있고 만기 된 채권을 정리한 적도 있다. 나중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까마득한 일이었지. 스마트폰 사진첩도 후다닥 정리된다. 같은 사진은 왜 이렇게 많이 찍었는지 삭제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쓸데없는 영상까지 삭제하면 최소 2기가는 확보다. 각 잡고 앉아서 뭔가를 예약하는 건 파워 P인 나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빠르게 해결하면 주말이 행복하다. 덕분에 좋은 자리에서 뮤지컬도 보고 독서클럽에도 들어갔다. 종착역이라는 시간제한이 있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지하철에서는 결정 장애가 사라진다. 다음 주에 가는 독서클럽 때문에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구만.
9 to 6. 나는 기립성 저혈압이 있다. 컨디션이 좋은 상태여도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과 있으면 종종 어지러움을 느낀다. 심하면 기절까지 가는 무서운 질환인데, 실제로 출근길에 두 번 쓰러졌다. 그래서 가장 사람이 많은 피크타임을 피해 지하철을 탄다. 유연근무제도가 있는 회사라면 다양한 출퇴근 시간과 이동 루트를 경험해 보고 출퇴근길이 가장 살만한 선택을 한다. 만약 회사의 출퇴근 시간이 나인투식스로 고정되어 있으면 스스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 먼저 간다. 시간을 바꿔도 해결이 안 되는 장기도둑 같은 9호선은 타는 걸 포기했다. 지금도 9호선을 타면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지만 돌아 돌아 몸이 편한 쪽을 선택했다. 쾌적한 출퇴근길은 참 맛있다. 같은 노동 강도라도 체력이 보존된다.
실제로 최근 1년 동안은 출퇴근 지하철에서 현타가 거의 안 왔다. 2호선 강남역으로 출근하며 300번쯤 현타가 왔던 작년과 비교하자면 장족의 발전이다. 좀 더 돌아오는 바람에 저녁을 늦게 먹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현타가 안 온다는 장점이 있다. 어떤 회사를 가도 현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지 않았는가. 이러다 네 번째 이직을 하는 건 아닌지…
출근하면서부터 한숨 쉬고, 퇴근하면서 지하철을 탈 생각에 또 망연자실하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일 년이 되고 이 년이 되고 삼 년이 된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일 년의 시간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 자체를 바꾸게 할 정도로 길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아주 충분하다. 아침부터 욕하면서 다니는 회사와 설레면서 다니는 회사는 분명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