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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Jun 29. 2024

프로듀서의 세계

일류는 친절하다는 걸 알게 한 일

우리나라에서 PD란 직업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콘텐츠 기획 및 총괄진행을 담당하는 Producer(프로듀서), 또 다른 하나는 콘텐츠를 직접 연출, 제작하는 PD(프로그램 디렉터)다. 특히 프로듀서가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연예인 기획사에서 아이돌 그룹의 활동을 총괄하는 사람도 PD라고 부르고, 웹툰이나 웹소설 작가와 작품을 관리하는 편집자도 PD라고 칭한다.


어쨌거나 문화산업의 핵심은 콘텐츠이고 PD라 칭하는 사람들은 그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해당 직업과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그림은 코파일럿


창의성이 있고 호기심이 많으며 일에 쉽게 질리는 타입이라면 방송사는 꽤 좋은 선택지다. 일단 부서마다 하는 업무가 전문적이면서 동떨어져 있다. 어제까지 해외에 콘텐츠를 파는 마케터였는데 갑작스럽게 정부기관이나 국회를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할 수도 있다. 방송 기사를 쓰다가 인사 발령 후 가전사와 OTT플랫폼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한다. 회계 업무를 하다가 라디오 부스에서 콘솔을 만지는 PD가 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다른 직무로 옮겨가기 위해선 사내 평판과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사내공모 절차 등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른 장(field)으로 옮겨 가는 일이 호떡 뒤집 듯 쉬운 건 아니지만 이직보단 쉬운 일이란 뜻이다.


요즘이야 전문화된 외부 교육과 연수를 많이 시키는 편이지만 과거엔 도제식으로 연출자를 길러냈다. 처음 들어온 신입들은 보통 짧은 예고 등을 만들며 편집기술과 편집감을 배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만과 편견의 남자 주인공 이름(마크 다시)을 질리도록 듣는다. '다시!', '이게 뭐야, 다시!', '다시...'


마크 다시, 그는 도덕책...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영상을 만들던 기억이 난다. 스테이션 브레이크 시간에 들어갈 주관방송 행사 홍보용 스팟이었다. 부장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지금 나가는 게 하나뿐이라 하나 더 만들어 틀기로 했어. 전국으로 50회 이상 나갈 건데 제작해 봐."


'MZ3요'로 유명한 그 말, '제가요? 이걸요? 왜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되물었다.


"언제까지 완제하면 되나요?"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시사하고 내자고."


"실제로 일할 시간이 금토일 3일뿐인데... 제작비는요?"


"옆 부서에서 외주로 제작하면서 예산 소진해서, 남은 게 아마 50만 원 정도 쓸 수 있을 거야."



전국에 나가는 영상을 실 제작기간 3일 만에 제작비 50만 원으로 만들라는 미션이었다. 첫 영상 일이니 잘하고 싶지만 잘할 수 없는 환경. 그런데 가만 보니 이 부서의 PD들은 그런 일을 투덜거릴지언정 어떤 식이든 해내고 있었다. 하루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기로 했다.


제작비와 기간 문제로 촬영이나 복잡한 CG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존 영상을 재편집하는 방법뿐이다. 편집 시간을 확보하려면 영상소스를 빠르게 검색해서 확보해야 한다. 회사 스토리지에서 영상 검색을 많이 해본 작가를 찾아서 해결하자. 그런데 영상 재편집의 경우 콘셉트가 확실하지 않으면 이어 붙인 영상일 뿐이므로 뻔하고 지루해진다. 사람들에게 낯선 흑백 시절의 희귀 영상을 찾아 쓰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흑백에서 컬러, 다시 HD로 이미지 컬러와 화소수로 변화와 발전의 느낌을 살리기로 했다.


또 성우 멘트 없이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화면 내 글자를 클라이맥스 자막처럼 활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고른 bgm이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였다. 1악장 인트로에서 천천히 걷는듯하다가 점차 빨라지는 오케스트라 템포가 시공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데 잘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임팩트 있게 '짜잔'하고 끝나야 해서 영상 말미에 협주곡의 피날레를 붙여야 했다는 점이다. 급하게 라디오국에서 일하는 음악 편집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전문가는 도자기의 미세한 틈을 메우듯 '흠'이라고 얕은 신음을 내더니 자연스럽게 음향작업을 완성해 냈다. 맘마미아.


음악을 깔고 소스영상으로 가편을 이어 붙인 뒤엔 전체적인 통일성을 줄 수 있는 색보정과 간단한 CG정도를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전에 몇 번 마주쳤던 CG팀 전문가에게 '갑작스럽게 정말 미안합니다...'를 시전 하며 시사일정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결국 영상은 소소한 수정을 거쳐 OK 되었고 무사히 방송되었다. 옆 부서 동료가 '몇 천 쓴 것보다 50만 원짜리가 낫다고 위에서 혼났어요.'란 칭찬에 가까운 불평을 듣기도 했으니 성공적이었달까.



이 우악스러운 업무지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일터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여에서 출발한다. 예산이 부족하고 시간이 부족하고, 인력이 부족하다. 이 조건이 맞으면 저 조건이 맞지 않는다. 인생과 비슷한 면이 있다. 완벽한 조건에서 부여되는 삶은 없고 우리는 그저 당면한 조건들 속에서 고투하며 노력을 다할 뿐이다.


둘째, 변명과 이유는 불허되며 결과물로만 평가된다. '예산이 50 뿐이었잖아요', '제작기간이 3일이 전부였다고요'라고 해봤자 시사실에선 통하지 않는다. 마치 1억 정도 예산으로 석 달 정도 제작기간에 10명짜리 제작팀을 붙여 준 듯 냉정했다. 평가의 기준은 오직 이게 방송 내기에 적합하냐 아니냐 뿐이었다.


셋째, 일이란 관계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PD나 감독이라도 혼자서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작가, 조명, 카메라, CG, 음향, 연기자, 홍보 등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모든 이름들이 모여 협업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오히려 프로듀서는 이들 간의 관계조율자란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후 우리말 연출, 프로그램 기획, 제작 편집 등 프로듀서 일을 하면서도 위의 교훈을 떠올리곤 했다. 저 중 한 가지 교훈이라도 소홀히 하는 제작팀과 프로듀서는 늘 고생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과장되게 꾸미는 세상의 차가움은 일터에서 체화된 것이 분명하다.


달리 보면 차가운 일터에서 따뜻하고 친절한 프로페셔널을 만났다면 그는 능력은 물론 인격면에서 훨씬 대단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존재란 뜻이 된다. 일터의 차가움이 세상의 차가움을 닮아있다면 일상에서 친절한 사람은 일류임이 분명하다. 정말 그렇다는 걸 회사를 다니며 지금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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