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nowfield
Oct 20. 2024
문어의 심장이 세 개라는 걸 아는가? 세 개의 심장이 제법 큰 뇌로부터 먼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하나는 몸통에 산소를 공급하고 나머지 둘은 아가미와 흔히 다리라고 부르는 문어의 팔에 피를 공급한다고 한다. 문어는 지능이 매우 높고 힘도 세다. 8개의 팔에 뇌보다 더 많은 뉴런이 분포돼 있어 온몸으로 사고하는 생물이며, 학습과 기억 능력이 있고 장난까지 친다고 한다. 뼈가 없이 근육으로만 되어 있고, 큰 문어는 빨판으로 1톤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고 하니 보양 음식으로 손꼽힐만하다.
문어가 안 나오면 잔치가 아니라는 경상도에서는 제사상에도 삶은 문어가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 고급 식재료인 문어를 말려 각종 도구로 세공한 ‘문어오림’은, 전에는 폐백 자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했을 때 상에 오르기도 했다. 문어로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먹거나 감바스처럼 먹기도 하는데 담백하고 고소한 감칠맛이 훌륭하다. 이도 저도 귀찮을 때는 데쳐서 초고추장이나 참기름장에 찍어서 먹으면 되니 요놈처럼 간편하면서 영양덩어리인 게 없다.
문어는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데다 부모 세대와의 접점이 없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서기를 한다. 그러므로 문어의 지능은 학습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먹이활동을 하는 문어를 보면 영리하다 못해 교활하게 보일 정도라니 문어숙회를 좋아하던 후배 하나가 생각난다.
실력 있는 사진작가였던 그는 우리 직장동료 중 급여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매번 선배들을 졸라 밥이며 술을 얻어먹었다. 애교도 많고 재미있는 데다 10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다보니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면 살살 웃으며 보내는 눈짓에 못 이긴 체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녀석은 입맛도 고급이어서 1차는 치킨이나 삼겹살로 시작하지만 2차는 마음 약한 누나들을 꼬여 로바타야키 같은 곳에서 문어숙회에 비싼 일본 생맥주를 시켰다. 그가 월급을 모아 일시금으로 자가용을 샀을 때 우리는 은근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얄밉고도 귀여운 녀석을 10년 넘게 보고 있다…
나에게도 문어처럼 타고난 생존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30대 중반에 시작한 두 번째 사업을 접고 친척분의 소개로 취직한 곳이 웨딩스튜디오였다. 영업에는 영 소질이 없고 고지식하던 내가 매니저 일을 하자니 작가들과도 고객들과도 좌충우돌이었다.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일을 적게 하려 하고 고객들은 더 많이 얻어가려 하니 중간에서 여간 고되지 않았다. 최첨단 기술에 익숙해져 있다가 고객관리도 수작업과 개인의 기억력에 의지하는 상황에서 답답한 일도 부지기수였고 모든 책임은 초보 매니저인 나에게 돌아왔다. 막막했지만, 밤을 새워가며 고객 정보를 전산화하고 체크리스트를 작성, 반복 확인하면서 차츰 적응도 하고 나름 보람도 느끼고 조금씩 실적도 쌓여갔다.
부모님과 학교, 성경이나 동양의 고전들로부터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고, 늘 한발 양보하고 베풀라’ 하는 교육만을 받아온 나에게는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이 녹록지 않았다. 경쟁자들에게 나는 좋은 먹잇감이었고, 가끔은 친구들조차 나의 신념을 이용해 이익을 챙겨갔다. 그들에게만 나는 알지 못하는 어떤 진화가 일어났을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내가 주입식 교육이 유난히 잘 되는 사람이었거나 온실 속의 화초였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진심을 몰라주는 이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세상을 탓해보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진 것이 많았고 너무 풍족한 탓에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좀 더 이해하게 해 준 지나온 삶에 만족하고,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좀 더 측은지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 과거를 회상할 때면, 나에게도 문어처럼 머리 따로 손발 따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세 개의 심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스튜디오를 그만둔 후로도 토털 웨딩숍, 예물 업체까지 몇 군데를 옮겨 다녔지만, 경쟁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첫 직장의 동료들과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낸다. 가급적 매년 한 번씩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꼬막 까는 법을 알려주었던 동갑내기는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요즘 골프에 빠져있고 고추장찌개를 처음 맛보게 해준, 사진작가이자 사장님이었던 세 살 연상의 친구는 10년간 운영한 제주 민박을 접고 전통주와 빵 만들기를 배우며 새 사업을 구상 중이다. 문어숙회를 좋아하던 후배는 1인 웨딩 촬영으로 아직도 잘 나간다. 평생 그곳에서 지지고 볶을 것 같던 사람들이 모두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만나서 얼굴 보면 우리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울고 웃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의 차이를 느끼게 해준,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알게 해준,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들… 어쩌면 그때가 우리의 빛나는 청춘이어서 돌아보면 자꾸만 그리워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