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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21. 2024

알배추 찜 & 봄동 겉절이


  요즘 마트에 가면 봄동이 많이 보인다. ‘봄동… 봄동… 봄동…’ 하며 입을 오므려 부르면 왠지 봄이 빨리 올 것만 같아서 나는 봄동을 좋아한다. 봄동은 가을에 심어 노지(露地)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속이 들지 못하고 잎이 옆으로 퍼진 배추를 말한다. 겨울을 견디려니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잎을 펼쳐 놓았을까? 같은 배추라도 심는 시기와 환경에 따라 모양과 맛, 영양성분까지 달라진다니 신기하다.


  봄동은 땅에 붙어 자라 흙이 많으므로 밑동을 잘라내고 한 잎 한 잎 깨끗이 씻는다. 단단한 듯 여린 잎을 하나 뜯어 입에 넣어본다. 풋풋한 향기가 먼저 코끝을 찌르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에 감친다. 연한 잎은 액젓을 넣어 겉절이로 무치고 겉잎은 국거리로 남겨둔다.


  그러고 보니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도 제각각이다. 남자는 외탁해서 시어머님과 외모는 물론 성격까지 닮았는데 아주버님은 친가 쪽인지 외양도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우리 형제도 마찬가지다. 남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연년생인 여동생과 나도 어려서부터 너무나 달랐다. 나는 소설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동생은 철학과 헤비메탈을 좋아했다. 나는 수학과 과학에 강했지만, 동생은 어학 쪽으로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악보는 내가 더 빨리 익혔지만, 동생은 즉흥 연주를 잘했다. 나는 친구를 두루두루 얼굴만 아는 정도로 많이 사귀었고 동생은 절친한 몇몇과만 교류했다.


  천식과 아토피로 병약하던 동생은 자신처럼 아픈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간호사의 길을 택했고, 다하지 못한 공부 욕심에 모두에게 상의 없는 통보를 하고 호주 유학길에 올랐다. 머리만 복잡하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이 어영부영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분야를 기웃거리며 여러 직업을 전전한 나와는 다르게 목표 의식이 투철한 아이였다. 호주의 날씨가 병을 악화시켰지만,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상위권을 지켰고 귀국 후 3교대 근무로 피곤한 와중에도 다른 도시의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방 안 가득 원서를 펼쳐놓고 메뚜기처럼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공부하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박사 과정 중 결혼과 육아로 꿈을 접지 않았다면 아마도 학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내 천사 같은 여동생의 진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늘 상냥하고 배려가 넘치며 유머러스한 재담으로 주위를 밝게 하는 사람. 부모님께는 착하고 예쁜 딸이자 저와 같은 손주를 둘이나 안겨드린 효녀이고, 과묵하고 비밀이 많은 남동생의 입을 열게 하는 가장 말이 잘 통하는 가족이다. 내게는 철없는 언니를 존중해주고 치켜세워주는 오히려 언니 같은 존재이고, 아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사랑 넘치는 엄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아무도 모르게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날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홀로 수술에 들어갔다. “언니, 사랑해.”라는 맨날 하는 염불이긴 했지만, 왠지 이상한 낌새에 다음 날 통화를 하고서야 겨우 내게만 수술 사실을 알렸다. 담낭염은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라는데, 자칫하면 염증이 터져 패혈증이 올 수도 있을 만큼 심한 상태였다는데 어쩜 저리 참고 버티는 게 버릇이 됐는지… 배려도 좋지만, 너무 화가 났다. 그러다 순간 참담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죽겠다고…’ 내 동생은 응석부릴 언니조차 없는가!


  마음은 늘 곁에 있어도 살아온 길이 달라 다른 자매들처럼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동안 재기 넘치고 통통 튀던 내 동생은 참고 견디는 것에, 부조리한 인생이지만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채 자신의 꿈과 욕망, 건강은 돌보지 않고 있었다. 연약했지만 잘 자란, 속이 꽉 찬 배추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자신을 추위에 방치하고 땅에 누워 온기 없는 겨울 햇빛을 갈망하는 봄동이었던 것이다. 겨울에도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푸른 잎을 내밀지만, 매서운 추위에 옷깃조차 여미지 못하고 힘없이 누운 봄동. 몹시 추운 날은 이불이라도 덮어주고 비실대면 거름이라도 주었어야 했다. 나는 언니도 아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미안해. 퉁명스럽고 까칠하고 직설적이고… 너와는 많이 다른 나지만, 내게 언제든 기대도 돼. 언니는 훌륭하진 않지만 자유롭고 다채로운 삶을 살았고, 그래서 속이 제법 촘촘히 들었단다. 양분이 부족하면 떼어서 먹고, 수분이 부족하면 갈아 마시렴. 어서 건강해져서 따뜻한 봄날, 같이 햇볕이나 실컷 쬐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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