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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22. 2024

냉이 무침 & 쑥 된장국


  나른한 피로감, 졸음, 무기력, 집중력 저하, 식욕부진, 소화불량, 손발 저림, 불안 또는 우울… 갱년기…가 아닌 춘곤증의 증상이다. 날씨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춘곤증을 날리려면 간단한 체조가 도움이 되고 비타민과 무기질,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는데 이때 냉이만 한 것이 없다. 봄에는 신진대사가 왕성해져 비타민 소모량이 겨울의 3~5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냉이는 채소 중에서도 단백질 함량이 매우 높고 철분이나 칼슘, 비타민A 또한 매우 풍부하다. 겨울과 봄 사이, 바람이 차도 햇볕이 따뜻해지면 지천으로 냉이가 돋아난다.


  우리 집 마당에 가장 먼저 피는 꽃, 수선화는 봄이 옴을 알리는 귀여운 전령이다. 파란 잎이 삐죽삐죽 올라오면 곧 노란 수선화가 피고, 뒤를 이어 매화와 자두꽃이 만발하면 이내 벚꽃이 핀다. 벚꽃길 드라이브가 질릴 때쯤 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하면 남자와 풀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제부터는 조금만 방심해도 집과 축사 주변, 도로까지도 밀림이 되기 때문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예초기(刈草機)를 돌려줘야 한다. 땅에 바짝 붙게 베어내도 한 달이면 무릎 높이까지 자라는 지긋지긋한 잡초들, 그중에서도 생명력이 강한 식물로 손 꼽는 것이 쑥이다.


  솜털이 송송 돋은 어린 쑥은 땅바닥에 붙어있는가 싶으면 금세 허리 높이까지 자란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쑥이 먼저 돋았다고 한다. 화재나 제초제 살포로 황량해진 땅에서도 쑥이 제일 먼저 자라고, 전쟁 등으로 폐허가 된 곳을 쑥밭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 빠르게 자라나는 어린 쑥 또한 춘곤증은 물론 성인병 예방, 면역력 강화, 살균, 조혈 및 혈액순환에 좋아 냉이만큼 유익한 봄나물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이 오면 냉이나 쑥뿐이랴, 죽은 듯 보이던 나무에도 물이 오르고 신비로운 연둣빛 잎을 내밀어 살아있음을 알린다. ‘꽃피어야 하는 것은 꽃핀다’라는 라이너 쿤체의 시구처럼 척박해 보이던 땅은 자꾸만 생명을 밀어 올리고 오색찬란한 꽃들로 뒤덮인다.* 그런데 그 푸르름에 왠지 모를 슬픔이 숨어있다. 아름다움이 자꾸만 슬픔과 교차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서일까? 봄 풍경에 취해 돌아다니다 보면 춘곤증인지 갱년기 증상인지 헷갈리는 피로와 우울이 잠식해 온다.


  인간도 나무처럼 매년 다시 새싹을,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니, 한 번만 다시! 단 하루,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푸른 봄, 청춘으로 살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나의 난소는 이제 여성호르몬을 잘 생산하지 못하고, 그런 환경이 낯선 나의 몸은 시도 때도 없는 발한과 그로 인한 불면증으로 늘 피곤하다. 건망증도 심해져서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곤 하는데 한 번씩 그런 일을 겪으면 매우 서글퍼지기도 한다. 봄날은 간다…


  “난 젊어서 너무 고생을 해서 20대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 인생은 40대부터 뭔가 좋아졌어.” 남자가 말한다.

  ‘그건 나를 만나서 그런 거겠지, 이 사람아.’

  봄에 품은 애틋한 희망을 여름내 푸른 슬픔으로 견뎌야겠지만, 그러다 가을이 오면 이 부질없는 욕심을 놓아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이런 슬픔은 잠시의 감상이고, 헤베의 넥타르도 없는 마당에 회한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는 일, 다시 오지 않을 현재를 즐겨야 한다.** 중년의 봄은 청춘과는 다른 중년만의 낭만이 있는 법이니까.


  스스로 빛나던 때는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잘 보지 못했다. 젊은 시절의 관심사는 결국에는 온통 자신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 세상이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으며, 삶과 죽음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가 되자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아름다운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지천으로 땅을 뒤덮은 잡초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쑥과 냉이의 생명력에 감동하고, 죽은 듯한 겨울 매화나무 안에 만개한 꽃이 보이는 듯하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했었는데 말과 행동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을 신뢰했었는데 묵묵하고 성실한 사람을 존경하게 되었다. 비싸고 화려한 음식보다 정성이 들어간 소박한 밥상이 좋고, 휘황찬란한 도시의 조명보다 달빛이 좋다.


  나는 그것이 참 행복하다.






* 라이너 쿤체,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마음 챙김의 시』, 류시화 엮음, 수오서재 (2020)

** 헤베(Ήβη)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청춘과 젊음의 여신으로 제우스와 헤라의 차녀이다. 헤라클레스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 신들이 마시는 꿀처럼 달콤한 음료수로 인간이 마시면 회춘하고 늙지 않는다는 넥타르(Νέκταρ)와 불사(不死)의 음식 암브로시아(Αμβροσια)를 관리하는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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