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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27. 2024

미나리 바지락 전과 달래장, 그리고 막걸리

  풀과의 전쟁을 마친 후 땀에 절어 들어와 샤워하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면 그렇게 시원하다는 남자. 보통은 맥주를 떠올리는데 막걸리가 노동주인 이유가 있나 보다. 금주령이 잦았던 조선시대에도 막걸리는 예외로 했다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도 흉년에 금주령을 어길 시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탁주(濁酒)는 요기도 되는 관계로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맥주보다는 막걸리가 대세였다. 오리엔테이션 MT에서 처음 막걸리를 영접한 이후로 수업이 끝나는 저녁 무렵이면 건물 뒤 잔디밭이나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학교 앞 슈퍼마켓에서 파는 데친 두부와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얼마나 마셔들 댔는지 아침에 등교할 때면 막걸리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곤 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막걸리에 한 번 된통 체한 후로 더는 못 먹게 되었지만, 시큼한 그 냄새는 항상 무언가에 목마르던 젊은 시절의 교정(校庭)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목마른 것은 ‘자유(自由)’였다. 아직 문민정부가 탄생하기 전이었고, 북한의 김일성이 죽기 전이었고,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 체포조들이 쇠파이프로 무자비하게 시위자들을 진압하고 때려죽이기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책조차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토론의 장도 감시의 대상이어서 선배들이 조를 짜 후배들에게 ‘자본론’ 같은 금서들을 몰래 강론하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지는 않더라도 민주화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속에 꿈틀댔고, ‘타는 목마름으로’나 ‘노동의 새벽’ 같은 민중가요가 해 질 녘부터 버스가 끊기던 밤까지 교정 곳곳에서 술자리의 성가(聖歌)처럼 울려 퍼졌다.



  개인적인 자유에 대한 갈구도 있었다.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양육하셨지만, 나와 여동생에게는 귀가 시간이나 옷차림에 대해 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셨던 것 같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보호본능이었을 것이지만, 당시 나는 억압이라고 생각했고 집을 떠나 자유로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꿈을 키웠다. 2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유럽으로 33일간의 배낭여행을 떠났다.


  비행깃값을 아끼려 예약한, 전투기를 개조한 모스크바 항공의 비행기는 카펫이 고정되지 않아 이리저리 밀릴 정도로 초라하고 작았다. 지금 타라면 겁부터 먹을 테지만, 처음 만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젊은이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대급 한파를 기록했던 겨울이었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33일간 31개국을 여행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대부분은 맥도널드 어린이 메뉴로 끼니를 때우고 3일에 한 번은 기차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만 너무나도 자유롭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유럽 여성들을 보면서 갈증은 더욱 깊어졌지만,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온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사실 서양의 여성이라고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얼마 전 드디어 독립기념관에 다녀왔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면서 목천읍 독립기념관을 지날 때마다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면서도 쉽게 기회가 닿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뜻 맞는 남자를 만나 드디어 작정하고 가게 되었다. 남자와 내가 한마음으로 감사했던 건 평일인데도 독립기념관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읽고 자기들끼리 토론도 하고 사진을 보며 장난스레 웃기도 한다. 아픈 역사를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학습하고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든든했다.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혹독한 여정에서 주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정의롭고 용감한 여성들을 만나고 그들의 명복을 빌면서 자유나 평등이라는 것이 단번에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진 나라를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다짐한다. 이끌고 나가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바꾸는 건 응축된 민중의 힘이고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폭포가 된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기도 하면서 전과는 많이 달라진 한국 사회. 그러나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지금 다시 고개를 드는 독재의 더러운 냄새…


  여러 정부, 여러 국회를 거치면서 나는 정치를 믿지 않게 되었다. 어떤 놈이 권력을 잡으나 그 나물에 그 밥이고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다 속물이 된다고 믿었다. 한술 더 떠 본래 속물이었으니 저 안에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누가 하나 조금씩 혹은 아주 많이 해 먹고 조금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때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도 하겠지, 그래도 지나고 보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거야… 그런데 아닌 것 같다. 나의 안일한 생각이 위태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어리석고 포악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한순간에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삐쭉 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데 나는 예의 그 수준으로 다시 떨어지기 싫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 어떻게 지켜온 민주주의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주권을 행사하고 독재를 심판하는 가장 쉽고 합법적인 방법은 투표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나눌 지역이 어디 있으며, 작태를 보면 딱히 맹신할 정당이 어디 있나? 이리 저리 광풍에 휘말리지 말고 신중히 판단해서 나의 주권자로서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땀 흘려 일하는 동안 막걸리 생각만 하셨을 테니 오늘은 막걸리 안주로 최고인 미나리 바지락 전과 달래장을 만들어 줘야겠다. 막걸리는 사실 쌀밥처럼 안주를 별로 가리지 않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전(煎) 요리를 생각하면 막걸리가 따라오니 신기할 따름. 미나리와 바지락은 간의 해독작용을 돕고 혈액을 정화해 주는 최고의 봄 제철 식재료이고 달래는 알싸한 맛이 식욕을 돋울 뿐 아니라 다량의 칼슘과 무기질을 함유한 알칼리성 채소로, 양념장으로 만들어 두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정도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슬슬 입맛이 없어지므로 내친김에 오늘은 식탁을 온통 봄나물로 채워볼 요량이다. 소박한 나물 밥상에 어울리는 한국사 프로그램이나 물색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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