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nowfield
Oct 15. 2024
개인의 입맛처럼 천차만별인 것이 또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이 다른 이에게는 세상 혐오스러운 음식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별미가 매번 상에 올라와 지긋지긋한 사람도 있다. 육식주의자가 있고 채식주의자가 있으며, 채식주의자도 락토 오보, 락토, 오보, 비건이 다르다. 같은 재료로 요리하더라도 이 사람은 구이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찜을 좋아하며, 그 사람은 탕을 좋아할 수도 있다. 또 대부분 엄마 밥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걸 보면 세상에는 어머니의 숫자만큼, 혹은 더 많은 입맛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남자와 나는 10대를 각각 군산, 전주에서 보내고 20대에 서울과 수도권으로 삶터를 옮겼다가 40대에 무주로 귀촌해 정착했다. 친정엄마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시어머니의 고향은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덕분에 우리는 그 맛있다는 전라도 음식을 먹고 자랐다. 그런데 전라남북도의 사투리가 다른 것처럼 바다와 갯벌을 끼고 있는 지방과 내륙인 고장의 음식이 다르고, 양인 체질인 시댁 식구와 음인 체질의 친정 식구들이 선호하는 음식에도 차이가 있다. 사람의 입맛이 달라도 이리 다를까 싶지만, 전라도 사람치고 꼬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장을 보는데 요즘이 제철인 꼬막이 할인 행사 중이다. 참꼬막은 보기 힘들고 거의 새꼬막이다. 얼핏 깨끗해 보이지만 바락바락 문질러 씻어도 흙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 반나절쯤 해감을 한다. 그런 다음 헹궈서 끓는 물에 찬물을 한 컵 붓고 꼬막을 넣어 한 방향으로 젖다가 두세 개쯤 입을 벌리면 체에 밭친다.
꼬막은 까는 방법도 재미있다. 목포가 고향인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삶은 꼬막을 시켜 먹다가 배운 방법인데 껍데기 뒷부분에 숟가락을 넣어 살짝 비틀면 된다. 이렇게 비틀어서 빈 껍데기는 버리고 살이 붙어있는 쪽만 남겨 양념장을 얹으면 알록달록 모양도 예쁘고 상큼하고 쫄깃한 맛이 기가 막힌 꼬막 반찬이 완성된다.
문제는 꼬막을 해감하고 삶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꼬막에 양념장까지 얹고 있으면 남자에게 꼭 한 소리 듣는 일이다. 대충 양념장에 찍어서 먹으면 되지 뭘 하나하나 얹고 있느냐는 거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거’라는 나와 ‘마누라 힘든 음식 안 먹는다’ 하는 그는 매번 답도 없는 실랑이를 벌인다. 그래, 남자와 나는 입맛만 다른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반찬 하나만도 이렇게 힘든데 어머니들은 어떻게 뚝딱뚝딱 금세 한 상을 차려내시는 건지 참으로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어머니의 음식에 익숙해져서일까? 상경해서 코딱지만 한 뚝배기에 나오는 순두부찌개와 한 젓가락도 안 되는 서너 가지 풀때기 반찬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백반만 시켜도 따뜻한 국이나 찌개는 기본이고 생선조림이나 제육볶음이 포함된 반찬이 접시마다 수북이 담겨 나오는 전라도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잠시, 그런 음식조차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의 20대를 강타한 국가 부도 사태. 재룟값은 껑충 뛰고, 손님은 없고, 비싼 월세를 밀려 보증금에서 까먹는 지경이었으니 소상공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힘든 시대였다. 식당의 반찬 수는 줄었고 가격은 올랐지만, 그때는 그나마 그렇게라도 버텨주는 식당이면 감사했다. 뉴스 프로그램은 도산하는 기업, 부도와 실직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일 보도했고, 일자리도 없고 얼마 안 되는 식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젊은이들의 꿈이 비장한 시간이었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형편이 좀 낫기는 했지만, 당시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시설에서 온라인 게임을 개발 중이었던 나도 결국 투자유치까지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접어야 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위기감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결국 대한민국은 2001년 8월 IMF 구제금융을 졸업했다. 그러나 아시아를 휩쓴 외환위기는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같은 신조어를 양산했고 ‘평생직장은 없다’라는 인식이 정착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따뜻하고 저렴한 음식을 제공하고 달걀부침 하나라도 더 올려주시던 식당의 어머니들은 어려운 시절 젊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신 고마운 분들이었다. 입맛을 떠나 그 마음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에. 어느 어머니의 초라한 식당에서 정성스레 양념장을 올린 꼬막 반찬에 울컥했던 나는 이후 꼬막을 볼 때마다 따뜻하고 배가 부르다.
올해는 IMF 사태보다 무섭다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 대상 취업률이 가장 높다고 하는데 경제가 좀 살아나고 있는 걸까? 정치 돌아가는 꼴이나 세계 경제 뉴스를 보면 그럴 것 같지 않아 매우 암울하다. 그러나 희망은 힘이 세다고 하지 않나! 나라의 미래인 우리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치고, 열심히 일해서 내 집도 마련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사람 사는 행복을 다 누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양념장에 담아 꼬막 위에 꾹꾹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