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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13. 2024

동치미

<조기매운탕> 글을 올리고 나서 "이제 가을 시작인데 웬 겨울 얘기?"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써내려간 글을 순서대로 올리다보니 독자들의 계절감에 혼선을 드리게 된 점 죄송합니다. 편성을 수정하자니 가을은 이미 지나갔고... 마음 넓은 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더니 아침부터 또 눈이 내린다. 함박눈 내리는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럴,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쌓인 선물 상자, 각종 과일이 올려진 화려한 케이크와 달콤한 샴페인 등등…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우리집 크리스마스 풍경을 소개하겠다.


  소 치는 일은 자유시간이 많다. 하루 두 번 소들을 먹이고 물을 갈아주고 상태를 점검해 약을 먹이거나 인공수정을 하는 데 서너 시간쯤 걸린다. 일반 직장인 근무시간의 반도 안 되는 시간이다. 물론 시설을 수리하거나 축사를 청소하거나 송아지 출산이 있는 날은 예외다. 무주의 부지런한 축산인들은 풀이나 볏짚 같은 조사료 농사도 짓고 수정사로 일하기도 하는 등 무척 바쁘시므로 무슨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우리의 소 치는 남자는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자, 무리하지 말고 건강 챙기면서 오래오래 일하자.'라는 주의… 되도록 추워지기 전에 송아지를 낳게 하므로 겨울은 더 한가하다.


  우리는 주로 평일 낮에 외출하는데, 맛있는 음식과 산책을 좋아하는 남자와 나는 철 따라 제철 음식을 먹으러 다니기도 하고 꽃놀이, 각종 축제 구경, 명소 탐방을 다닌다. 비록 CCTV를 수시로 체크하고 한두 시간 거리 안에서 움직여야 하지만, 무주는 사방으로 선택지가 많다. 전북특별자치도 동북부에 있는 무주군은 통영 대전 고속 도로가 연결돼 있고 총 네 개의 도, 즉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와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주말과 연휴, 명절에는 가족과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집에서 논다. 주차와 식당 예약도 힘들뿐더러 사람 많은 곳은 사건·사고도 많고 무엇보다 느긋이 즐기기가 어렵다. 크리스마스도 예외가 아니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이웃 어르신들이 김치는 물론이고 배추랑 무며 김장재료를 몽땅 갖다주신다. 참으로 나눔을 즐기는 분들이다. 덕분에 배추는 겉절이, 된장국으로 먹고 월초에는 깍두기를 담가 전주 동생네까지 식구대로 나눴다. 나눔이란 놈은 자꾸만 새끼를 친다.


  “딸, 무가 또 한 포대 들어왔네. 어쩌지?”


  엄마는 병원 일만도 힘에 부치시니 내가 가져올 수밖에. 행복한 고민 끝에 모두가 좋아하는 동치미로 용도 결정이 나고 내친김에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남자와 동치미를 담그기로 한다.


  가게를 운영할 때는 일주일에 두 통씩 담아내던 동치미인데 레시피가 가물가물하다. 다행히 소금양을 기억하고 머릿속으로 순서를 맞춰본다. 무를 씻고 썰어 절이는 일은 남자의 몫이다. 힘이 있으니, 속도가 예술이다. 무가 절여지는 동안 소금을 계량하고 찹쌀 풀을 쑤고 대파와 고추, 배, 마늘과 생강 등 부재료를 씻고 다듬는다. 혼자 하려면 한나절은 걸릴 것을 남자 덕에 반나절 만에 끝낸다. 맛있게 익어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날짜를 따지기보다는 가난하고 병들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다는 성인의 정신을 기리고 배우는 날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젊어서야 나도 친구들과 왁자지껄 즐겁게 보내느라 정신없었지만, 놀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내가 기억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사랑과 나눔이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 때문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 읽었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한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같은 이야기가 영향을 준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희생과 가르침을 배우며 느꼈던 환희와 감동,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안타까움과 자책감,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가슴 속에 하나의 크리스마스 이미지로 굳어진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질이 필요한 곳에는 물질을, 마음이 필요한 곳에는 마음을 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나의 물질에는 한계가 있으니… 나눔 받는 물질보다 그 안에 담긴 주는 이의 사랑이, 받는 이의 심장을 더 따뜻하게 하는 게 아닐까 자위해 본다.


  내가 감사 속에 행복해하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서럽게 울부짖고 있는 사람, 그에게 잠시 마음을 내어 그의 말을 경청하고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힘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했었던가? 내가 따뜻한 방바닥에 몸을 지지고 있을 때 터전을 잃고 추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나의 관심과 온기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손을 내밀었던가? 너무 잘 알고 늘 곁에 있을 것 같아서 오히려 자주 상처 주게 되는 가족에게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근원적인 고독함을 약간은 덜어주는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나는, 손을 잡고 말해야 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난다고 했던가. 나눔의 별이 더욱 밝게 빛나는 새해가 되길 기도해 본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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