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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07. 2024

참치와 고등어


  나라는 사람은 속으로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들끓을지언정 표정이나 말, 태도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인간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된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과하지 않고 감정을 내비치다 혼이 났던 어린아이의 당혹감, 믿었던 사람에게 패를 다 보여주고 뒤통수를 맞았던 뼈아픔, 책으로 만났던 여러 스승의 교훈을 몸과 마음에 새기면서 느꼈던 평화, 기타 등등.

아니, 고독이었을 것이다.


  Every man has his secret sorrows which the world knows not, and oftentimes we call a man cold when he is only sad. (사람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혼자만의 슬픔이 있으며, 우리는 종종 단지 슬픈 사람을 차가운 사람이라 말한다.)*


  메마른 가슴은 남몰래 피를 토하고 차가운 머리는 밤새 신열이 올랐어도 외롭지 않다고 가장하며 살았다. 소리 없는 외침에 당연히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세상의 침묵에 오히려 안도했다. 나는 살았다. 때로는 바다보다 푸르게 솟구치는 고등어처럼, 때로는 궤짝으로 버려지는 썩은 동태처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세상은 내게 관심을 두지 않고 흘러갔다. 고독에는 이유도 없고 결과도 없다. 원래 나에게 주어졌을 뿐, 그저 숙명일 뿐.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고, 철학을 친구로 삼고, 시(詩)로 위로받으며 나는 가난한 청춘을 살아냈다.


  그런 나에게도 몇몇 속을 내비치는 벗들이 있다. 나의 학창 시절은 잦은 이사와 전학의 반복이었다. 나는 제때 친구 사귀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외로움은 아마도 그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서야 처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는 세 명의 중학교 동창 학우는 서울과 호주 멜버른, 전주에 각각 살고 있어 자주 만날 수는 없다. 청년기에는 서로 너무 바빠 몇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친구들이 나이가 들어 부모님들이 편찮으시고 돌아가시면서 만날 일이 생긴다.


  얼마 전 그중 한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나뭇잎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어대던 중학생들은 이제 자꾸만 삐져나오는 흰머리를 염색하고 주름 보톡스를 맞는 나이가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제(喪制)가 되어 서 있는, 슬픔조차 꾸미지 않고 조문객들을 맞는 친구의 모습 위로 학창 시절 유난히 작고 말랐던, 건드리면 부서질 듯 약해 보이던 소녀가 겹친다.


  그녀와 나는 담임선생님의 전략적 통제(?)의 일환으로 학급의 부반장, 반장을 맡으면서 처음 만났다. 원해서였든 등 떠밀려서였든 이런저런 활동이 많았던 나와 비교해 그 아이는 조용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 소극적인 아이였다. 둘 다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어떤 계기로 친해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는개에 몸이 젖듯, 그녀는 어느 순간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 것인가…


  그녀가 서울대를 목표로 재수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귀가 전, 그녀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던지… 그녀가 서울대에 합격하고 해외 선교를 떠나고 동경 유학을 거쳐 다시 서울대로 돌아올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 아파트 놀이터의 풍경은 내 마음 한편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호주에 사는 친구는 아들이 벌써 직장에 다닌다. 셋 중 출산과 양육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친구다. 예전부터 나는 유난히 욕심 많고 자존감 높은 그녀가 늘 불안했다. 다혈질의 여전사 같다고나 할까… 그녀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대나무나 싸움닭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고, 모난 돌을 싫어하는 세상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오지랖도 유분수’라고 정을 맞은 건 오히려 세게 나가지도 못하면서 허리를 휘지 못하는 나였다. 그녀는 넓은 세상을 찾아 여행하고, 호주를 삶터로 선택하고, 플로리스트가 되었으며, 두 아이를 잘 키워냈다. 몇 년 전 그녀가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을 때, 나는 다시금 예의 여전사를 떠올렸다. 여전사는 멋지기라도 하지…


  오늘은 전주에 사는 친구 부부가 놀러 오기로 했다. 친구의 남편은 20대 중반부터 쭉 봐와서인지 오빠 같은 사람인데, 부부가 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소유자로 까칠한 남자와도 금세 친해졌다. 몇 달에 한 번은 남자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종류별로 사 들고 무주로 들어와 저녁을 먹고 놀다 가거나 자고 가기도 한다. 간혹 아이가 없는 부부 사이를 걱정하는 어르신들이 있는데, 이 부부는 아직도 알콩달콩 연애를 한다.


  친구는 물에 빠진 고기를 안 먹고, 고기보다는 생선이나 해물을 좋아한다. 나는 구이보다는 수육이나 찜의 담백함을 좋아하지만, 두 발 달린 짐승의 고기나 혐오 음식을 제외하고는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남자와 친구의 남편은 식성이 좋고 배려가 많아 우리의 메뉴는 주로 해산물류나 바싹 구운 돼지고기, 한우 안심구이 등으로 결정된다. 오늘은 새로 뚫은 맛집에서 참치회와 고등어구이, 알탕을 먹기로 했다. 손님이 와도 이것저것 준비하고 요리할 필요가 없으니, 친구가 좋긴 좋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요리’가 아닌가! 음식은 그저 거들 뿐, 친구들과의 유쾌한 수다만으로 배가 부른 밤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태초의 인간이 하나였듯이 나는 하나이고 누구도 나일 수 없다. 나와 세 친구도 그렇다. 생물 분류 단계상 같은 과(科)에 속하는 고등어와 삼치와 참치처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간다. 시인들은 말한다. 인생이라는 숲에서 우리는 각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고 안개에 가려 서로를 알지 못하거나, 안개 속에서 오히려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고.** ***


  타인의 존재를 선명하게 인식하는 순간은 빛나는 찰나, 하나가 된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선다. 모든 인간은 혼자이고 고독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서야 관계를 만들고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참 먼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여전히 같을 수 없고 숲의 나무들처럼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하지만 어느 새벽, 조용히 안개가 내릴 때 나의 외로움이 그들을 안아줄 수 있으리라.




*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마인드』 시즌 10: 11회, 재인용.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하이페리온, 로맨스」 (1839)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시집』, 보물창고(2015)

***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푸른숲(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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