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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08. 2024

조기 매운탕


  창문을 열어보니 밤사이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올해는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다. 12월 중순인데 벌써 세 번째 내린 눈이다. 무주의 사계절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늦게 오는 봄은 짧지만, 비현실적일 정도로 강렬한 연두(軟豆)의 잔치. 갖가지 새순과 봄꽃의 향기가 코끝에서 춤을 춘다. 여름의 새벽 운무와 한낮의 짙은 녹음 사이로 흐르는 맑고 서늘한 계곡은 신선(神仙)의 세계로 굽이치고, 분홍 코스모스와 감나무의 배경이 되는 가을 하늘은 청화백자의 오리엔탈 블루로 찬란하다. 아! 그러나 무주 계절의 백미(白眉)는 겨울이다.


  겨울 무주는 분주하다. 최고의 설경을 자랑하는 덕유산에는 겨우내 등산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매년 1월 1일에는 새벽부터 운영되는 ‘곤돌라’를 타고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덕유산 스키장에도 개장과 동시에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말에는 교통체증이 생길 정도다. 무주의 겨울은 설산의 눈꽃과 스키장의 역동성으로 한껏 젊어진다.


  무주는 참 이상한 곳이다. 바쁜 서울 생활이었지만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에 잠시 짬을 내어 내려올 때면 매번 희한한 경험을 하곤 했다.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피곤하고, 약간은 귀찮기도 한 귀성길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풍경은 삭막했고 버스 안은 항상 너무 덥거나 추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주에 가까워지면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는 걸 깨달았다. 보이는 거라곤 온통 산과 하늘뿐이었는데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고,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화자처럼 나도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있었던 걸까?


  7월에 태어난 나는 늘 겨울이 싫었다. 지긋지긋한 수족냉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시의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은 숨 쉴 때마다 폐를 가르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독한 것이었다. 힘겨운 일이 겨울에만 더 많이 생기진 않았을 텐데 왜 그리 춥고 외로웠는지… 무주의 겨울은 달랐다. 가족이 있었고, 따뜻한 ‘엄마 밥’이 있었고, 서울의 원룸보다 커진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찐 고구마며 부침개 같은 간식거리를 나눠주는, 잔소리 많고 정은 더 많은 이웃이 있었다. 무엇보다 겨울의 연약한 해를 가리는 악독한 빌딩이 없었다.


  서울의 빌딩숲을 떠나 처음 무주로 내려와 살던 집은 친정집과 걸어서 40분쯤 걸리는 수락마을에 있었다. 무주군 안성면은 겨울이면 눈 쌓인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외국의 멋진 풍경을 담은 사진들만큼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나는 가끔 산책 삼아 친정집까지 걸어가곤 했는데 그 길옆에 작은 논밭이 많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밭만 있어도 놀리지 않는다더니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도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이 심겨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흙 묻은 손, 일하는 손들이 끌어당기는 봄을 보라’고 말하는 안도현 시인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추위를 날려주는 무주의 겨울 음식은 많지만, 특히 버섯전골과 어죽(魚粥)이 유명하다. 감기에 걸리거나 기력이 떨어졌을 때 어죽을 챙겨 먹으면 한결 기운이 난다. 무주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천마(天麻)를 넣은 어죽은 최고의 보양식이다. 전국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머루와 머루와인, 호두와 사과 또한 품질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지리적표시(PGI) 등록 제도를 통해 상표권을 인정받은 이 풍요로운 무주의 특산물들 이면에는 깊은 산골, 척박한 환경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무주 농부들의 투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있다.


  저절로 오지 않는 봄이 되기 전까지는 거실의 창가나 차 안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 놓고 창밖의 눈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꽉 차오른다. 조용히 나부끼는 눈꽃 송이들의 춤을 구경하고 빈 들판에 쌓인 새하얀 눈에 때 탄 마음을 씻는다. 눈이 그친 후에는 미움도 욕심도 버리고 오직 사랑과 감사만 가득한 새롭고 깨끗한 나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면서, 그토록 싫었던 겨울을 사랑하게 해준 무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따뜻하고 부지런한 무주의 이웃들에게 흰 눈 같은 사랑을 띄워 보낸다.


  무주는 제설(除雪)의 천국이기도 하다. 밤새 눈이 와도 오전이면 주도로는 깨끗이 치워져 있다. 몇 년 전 제부가 교환교수로 가게 돼 여동생네가 독일로 떠나기 전날, 전주에 폭설이 오고 차가 갇혀 애먹은 기억이 난다. 전주에 그렇게 눈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눈이 많이 오지 않는 도시는 폭설에 교통이 마비되기도 한다지만 무주에 살면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산에 사는 우리는 도로까지 눈을 치워야 한다.


  “또 눈 오네! 밤새 얼면 큰일인데, 많이 오나?”


  눈만 오면 걱정이 앞서는 남자를 위해 오늘은 어죽 대신 뜨끈하게 조기 매운탕이나 끓여볼까? 말린 고사리는 불려 놨고, 엄마의 저장고에서 가져온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어 칼칼하게 끓여야지. 조기는 몇 마리나 넣을까? 넉넉하게 6마리를 손질한다.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내장을 제거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잊고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인다. 창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무주의 푸근한 겨울이 깊어진다.




* 안도현, 「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 푸른숲(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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