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부는 날 넷플릭스 보다가

by 바다에 내리는 눈

나는 넷플릭스에서 감동적인 영화, 밝은 드라마보다는 범죄 다큐멘터리를 주로 보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취향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스위스 넷플릭스 홈에는 대부분 어두운 내용의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많이 본 영상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어서 먼저 보이는 영상들을 누르다 보니 내 넷플릭스 계정의 추천 알고리즘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또 그런 걸 자꾸 보다 보니 취향이 더 어두워지는 악순환이 아닌가 싶다.


최근 '퍼펙트 크라임: 로베더 암살 사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재통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동독의 생산성 떨어지는 국영기업들을 구조조정하고 민영화하는 일을 맡아서 했던 신탁청의 수장, '로베더' 청장의 암살 미스터리를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런데 누가 그를 죽였을까가 궁금해지기보다는 그 암살 사건이 일어난 사회 정치적인 배경이 내 기억엔 더 남는다.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온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경쟁이라는 개념 앞에서 무너지는 동독의 기업들, 그곳에서 직업을 잃는 동독 주민들의 절망과 분노. 그들은 90년대의 카메라 앞에서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로베더 청장이 암살되었다고 하니 안 됐지만 죽어 싸다고, 안 그랬으면 내가 죽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인터뷰하는 동독 주민의 대담함에 깜짝 놀랐다. 과거의 공산주의 국가 국민에게 연민을 가지기에는 나와 그의 시간적, 문화적, 사상적 거리가 너무 멀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시대의 큰 돌풍 앞에서 고스란히 그 바람을 맞아내며 흔들리는 사람들 이야기에 끌렸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에 좋아했던 영국 영화들은 모두 구조조정과 실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풀몬티 (현대화와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철강 노동자들이 스트립쇼를 벌이는 이야기).' '브래스드 오프 (탄광산업의 몰락으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광부들이 브라스 밴드를 조직하는 이야기)' 그리고 '빌리 엘리엇 (파업 광부의 아들 빌리가 발레리노가 되는 이야기)'. 밀레니엄을 앞두고 꽤나 뒤숭숭했던 90년대 후반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뭔가 엄청난 위기가 올 거라는 불안감 속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때. 상실감에 좌절하기보다 유머와 예술이라는 하등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로 시대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희망을 걸고 불안감을 달랬었던 것 같다. 지금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재미로 읽는 글에서 '사라진 옛날 직업 리스트' 같은 걸 거기에 한참 머문다.


19세기 런던 거리의 가스등을 밝히고 다닌 점등사.

알람 시계가 발명되기 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창문을 쳐서 노동자들 일어나라고 깨우던 인간 자명종.

전화 교환원.

버스 안내양.

인력거꾼... 그리고 또…


AI 때문에 많은 직업이 없어진다고 요즘 사람들은 불안감에 시달리는데 이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아쉬워하고 나아갈 바를 모르면서 돌풍 앞에 서 있거나 넘어져 있었다.


힘들게 터득한 한두 가지 재주가 이제 조롱받거나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는 공포가 밀려올 때. 그래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건지, 쓸모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 때. 결국 기대 보는 것은 쓸데없다고 버려질 뻔한 그 과거의 경험이다.


중학교 때 문예부장으로서 학급 문집을 진두지휘해서 만들었어야 했다. 그 당시는 집에 흔하게 컴퓨터가 있을 때가 아니라서 50여 명의 급우들이 낸 원고를 일일이 손글씨로 옮겨 써서 마스터복사하는 문방구나 인쇄소에 갖다 맡겨서 문집을 만들었다. 글씨 잘 쓰는 몇몇의 학생들을 뽑아 일인당 한 10개씩 써 오라고 했지만 바쁘다고 안 써 오거나 까먹거나 대충 날림으로 써 온 아이들이 있어서 결국 문예부장인 내가 거의 대부분의 원고를 손글씨로 다시 썼던 기억이 있다. 성적에도 들어가지 않는 학급 문집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급우들에게 뭐라도 써서 내라고 독촉하고, 유명한 작품을 베껴서 낸 애들은 거르고 (아무리 그래도 김춘수의 '꽃'을 베끼면 어쩌잔 말인가) 일러스트북을 뒤져 삽화까지 그리는 일을 혼자 다 했는데 지금 보면 참 시간 낭비다. 요즘이라면 컴퓨터로 타자 치고 이미지 다운로드하여 삽입하고 웹사이트에서 편집하고 주문해서 뚝딱 만들 수 있는 일을... 도와주는 이도 없이 혼자서 많은 시간을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느라 흘려보냈지만 분명 그 시간 동안 내가 얻은 게 있다. 컴퓨터와 프린터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을 내 책임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잡고 늘어졌던 그 시절의 경험이 있어서 나는 지금 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로 오늘 힘내 보기가 힘들 때. ‘오늘 내가 경험했던 모든 감각과 사건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 주었는가?’ 그것만 점검하고 잠자리에 든다. 넷플릭스 다큐 한 편 틀어 놓고.





keyword
이전 22화회개한 줄 알았더니 후회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