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마다 제목을 뭘로 해야 할지 고민이다. 나부터도 온라인에서 제목만 보고 클릭할지 말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터라 제목을 잘 지어야 하는데 글의 내용이 제목보다 흥미롭지 않을까 봐 시류에 맞거나 도발적인 제목 짓기를 주저하게 된다. 작년에 내 브런치에서 '건강검진 결과가 섭섭한 이유'라는 글의 조회수가 폭발을 해서 놀란 적이 있다. 다른 훌륭한 브런치 작가들은 더 조회수도 많고 구독자도 많겠지만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조회수가 천, 이천, 삼천을 돌파했다고 알림이 올 때마다 얼마나 놀랍던지... 심지어 조회수가 팔천이 넘었다고 알림이 왔을 땐 좀 무서웠던 것 같다. 주변인들 모르게 브런치에서 속내를 끄적이고 있었는데 팔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졸고를 읽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사람들이 '건강검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서 의학 정보를 얻으려고 클릭했다가 별 도움 되는 정보는 없이 잡소리만 늘어놓은 내 글을 읽고 '이거 제목 장사네?' 하고 실망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정초부터 호되게 이석증을 앓고 난 소감을 쓰고 싶은데 정직하게 '이석증'이라는 제목을 달면 또 건강검진 글 같이 기대를 저버리는 시시한 글이 될 것 같은 걱정이 든다.
인생에 벼락같이 찾아오는 것들의 목록에 사랑,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이석증을 추가시켜야 할 것 같다. 참말로 이석증은 주가 하락이나 지진과는 달리 전조 증상도 없이 찾아온다. 정초 주말에 결린 어깨를 풀겠다고 마사지 기구를 어깨에 대고 누워 있었다. 누워서 이런저런 새해 구상을 해 보는데 구상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 거창하고 오래 걸리는 일들이라서 실행할 수 없어보였다. 그나마 실행 가능한 일이라면 미뤄 두었던 집안 정리 정도? 신발들이 어지럽게 쑤셔 박혀 있는 신발장 안을 떠올려 보니 이런 상태로 새해를 맞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는 진짜 신발을 정리해야 해. 정리함을 사러 이케아에 가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맘이 급해졌다. 지금 이케아에 가서 신발 정리 상자를 사지 않으면 2022년도 2021년 꼴이 나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어 남편에게 당장 이케아에 가자고 소리를 질렀지만 거실에 있던 그가 잘 안 들린단다. 옆에서 알짱거리는 아들에게 "아빠한테 이케아 가게 빨리 준비하라고 해!"라고 말하면서 몸을 오른쪽으로 확 돌리는 순간, 세상이 팽그르르 돌았다.
왔구나. 이석증.
그전에 한 번도 앓아 본 적은 없지만 작년에 부모님 두 분 다 이석증으로 한참 고생을 해서 그 증세에 관하여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월미도 디스코 팡팡 위에서 헤드스핀을 도는 듯한 극강의 어지러움이 찾아온 순간 말로만 듣던 이석증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서 있을 수도 누워 있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니 당장 정리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던 신발장 생각은 전혀 나지 않고 오로지 이 어지러움이 사라지기만을, 메스꺼움이 가시기만을, 구토가 멈추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사람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1초 후에 이석증이 와서 주말 내내 누워 있을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1년의 계획을 세우려 하다니.
월요일이 되어 대학병원에 전화 걸어 보니 1월 내내 예약 자리는 꽉 찼고 응급실에 오면 4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태로 4시간을 응급실에 앉아 대기할 자신이 없어 구글 검색을 통해 맨 처음 나오는 시내의 유명한 이비인후과에 전화를 걸어 보니 자기네도 오늘은 예약 환자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랑 친한 의사가 일하는 데로 가 보라고 친절하게 전화번호를 알려 줘서 바젤 시내에서 제일 리뷰가 좋은 이비인후과의 옆 이비인후과로 가게 되었다. 소문난 맛집 바로 옆집에 가서 어영부영 한 끼 때우는 느낌이지만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오늘 의사를 못 보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의사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 스위스니까. 어렵게 만난 의사는 이석증 때문인지 뇌 질환 때문인지 확실하게 알아봐야 한다면서 똑바로 걸어 봐라, 지그재그로 걸어 봐라, 팔 들어 봐라, 다리 들어 봐라 이것저것 30분을 시키더니 뇌는 멀쩡한 것 같단다. 그러고 나서야 이석증을 진단할 수 있는 특수 안경을 겨우 써 볼 수 있었다. 프렌젤 안경이라는 고글 같이 생긴 것을 쓰고 몸을 돌렸을 때 이석증이면 안구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걸 관찰할 수 있다. 안구가 미친 듯이 움직이는 걸 본 의사가 이석증이 맞다고 확진해 주었다. 그러면서 물어본다. 최근에 어디 심하게 머리를 부딪힌 적이 있냐고.
그러고 보니 2주 전에 썰매를 타러 갔다가 언덕에서 넘어져서 머리가 바닥에 쿵 부딪힌 적이 있다고 하니 뇌진탕 와서 그 당시 토하고 쓰러졌을 정도가 아니었으면 그건 원인이 아닐 거란다. 그렇다면 마사지 기구 때문인가? 어깨가 결리지만 목도 뻣뻣하고 두통도 좀 있는 것 같아서 머리와 어깨에 걸쳐서 마사지 기구를 대고 있었는데 그 진동으로 이석증이 온 것 아닌가 싶어 물어보니 그것도 아닐 거란다. 그러면 노화? 의사 생각에는 아직은 노화 때문에 이석증이 올 나이도 아니란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이석증이 왔단다.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는지 자책할 때면 현재 이 꼴에 이르게 된 원인을 밝혀 보려고 애쓰곤 했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으로 돌아가 그때 내린 결정을 후회하기도 하고 게으름과 의지박약과 같은 내 안의 부족한 자질을 탓하기도 했다. 유리천장, 불공정한 시스템, 가부장제, 인종차별, 이런 거대담론 안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어쩌면 딱 하나의 원인 때문은 아니고 그 모든 것의 합으로서 총체적인 난국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이석증의 원인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과거를 곱씹으며 지나간 일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원인을 찾으려 안간힘 쓰는 과정 중에 나 자신이 완전한 덩어리로 존재하지 못하고 파편처럼 해체되어 버리는 통에 그렇게 피곤하고 힘들었구나. 과거에 존재하는 원인들을 밝혀 내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열심히 잘 살아왔어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회복에만 집중하는 게 차라리 지금 내가 수행해야 할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귓구멍 안의 작은 돌덩어리 때문에 이렇게나 어지럽고 힘든 걸 겪고 나니 작고 미미한 모든 것들이 지키고 있는 자기 자리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도 알겠다. 인체 내의 장기 중에서 심장이나 뇌처럼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장기도 아니고, 간이나 위장처럼 크지도 않고, 귓속 전정기관에 붙어 있는 작은 석회 덩어리가 이탈해서 반고리관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갈 수 있다는 건 그전에 미처 몰랐다.
이석증인 게 너무나 분명한데 40분 만에 이석증임을 진단한 의사는 손으로 고개를 45도 각도로 1분씩 돌리는 에플리 마뉴버라는 물리치료를 3분 해 주더니 집에 가란다. 집에서 하루 세 번씩 스스로 고개를 돌리다 보면 나을 거라고, 신발끈 묶는다고 고개 너무 푹 숙이지 말고 조심하라는 충고도 해 주었다. 며칠 후 집에 날아온 청구서를 보니 500프랑 (65만 원)에 육박한다. 자가치료법을 프린트까지 해 주면서 어쩐지 친절하더라니......
귀하신 자가치료법 프린트
며칠 동안 '엄마 어지러워, 시끄럽게 하지 마' '엄마 어지러워, 뛰지 마' '엄마 어지러워, 아빠한테 해 달라고 해'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아들 녀석은 말을 더 잘 듣는 게 아니라 말버릇만 배워 책 읽어 주는 나에게 '엄마 영어 쓰지 마, 나 어지러워'라고 말대꾸를 한다. 아프면 더 잘해 줄까 싶어 엄살 부렸더니 남편은 어지러운데 무슨 외식이냐며 내 생일이라고 예약한 식당에 내 손으로 전화 걸어 예약을 취소하란다.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어 봤자 나만 손해라 결국 훌훌 털고 일어나 다 나은 셈 치고 생일에 악착같이 외식을 했다. 이석증에는 500프랑짜리 스위스 이비인후과보다 냉정한 동거인들이 즉효약인가 보다.
제자리를 이탈한 작은 귓속 돌덩이 하나 때문에 요란하게 앓고 나니 벌써 새해 첫 달이 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