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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행복하게
11화
기억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겁이 많은 나
by
로잘리
Oct 14. 2019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가족들 모두 겁이 없는데 비해 어린 시절부터 난 유난히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중에서도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건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 중 하나였다.
별것도 아닌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기 일쑤였고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이름 모를 벌레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 때에는 산속에서 곰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니곤 했다.
가족들이 외출하고 집에 혼자라도 있게 되는 날엔 텔레비전 볼륨을 높이고 거실과 모든 방에 불을 환하게 밝
히고 나서도 언제쯤 가족들이 돌아올까 초조함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또 보곤 했었다.
한 번은 새벽에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했다가 거실 커다란 통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도
까무러치게 놀란 적이 있다. 내 짧고 높은 비명 소리에 부모님께서 놀라 거실로 나오셨다가 서로가 민망해 각자 방으로 흩어졌던 그 날의 기억.
여름날
휴일 가족들이 모여 무서운 내용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라도 하는 날엔 난 항상 혼자 눈을 반쯤 게슴츠레 뜨고 이건 본 것도 아니
요 안 본 것도 아니라는 자세로 이불을 둘러쓰고 얼굴만 빼꼼 내놓은 채로 끝나는 시간까지 화면 한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렇게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가까이 공포영화나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게슴츠레 뜬 눈에 경련까지 일 정도였다.
영화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내게 있어 공포영화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과도 같았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면 짧게는 삼일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제대로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두 시간 정도의 공강 시간이 있었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가까운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필 친구들이 고른 영화가 한국
공포물이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벽면에 공포영화의 포스터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그 포스터에 담긴
주인공
과
눈 하나 마주칠 수가
없었다.
포스터가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낸 가상 스토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어쩐지 서늘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고 싶었던 영화라며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친구들을 두고 "난 너무 무서워서 못 볼 것 같아." 하기에는 그 시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음 수업이 남아 있는데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영화관 안. 평일 낮 시간대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도 않아 화면 가운데 중앙 좌석에
우리는 나란히 자리했다.
두 시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내가 기억나는 건 장면이 아닌 소리가 전부였다. 비명소리,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 시끄럽고 으스스한 배경음악과 귀에 속삭이는 낮고 높은 찢어질 듯한 소리들.
친구들은 나 역시 영화에 몰입 중인 줄 알았겠지만 난 사실 끝날 때까지 이건 본 것도 아니요 안 본 것도 아닌 게슴츠레 권법을 사용 중이었다.
그날 밤 두 시간 동안의 그 소리만으로 난 가위에 눌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겁이 많은 이유, 특히 어두운 곳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이유는 일곱 살 때의 잊을 수 없는 기억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께서 사업에 크게 실패하신 후 우리 가족은 작은 단칸방을 전전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 사업 실패의 후유증이란 만만치가 않았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네 식구가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던 그 집.
이층으로 된 그 집엔 오래되어 낡은 빨간색 자전거를 매일 끌고 다니던 집주인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겐 항상 입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마치 피터팬에 등장하는 후크선장의 시계를 차고 있던 팔을 먹어버린 시계 악어처럼.
시계 악어처럼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집주인 할아버지가 다니던 곳엔 늘 바람소리도 아닌 쇳소리도 아닌 끼익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었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월세를 받으러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멀리서부터
끼익 하는
그 소리가 들렸었다. 그 시절의 난 할아버지를 끽끽 할아버지라 불렀다.
엄마와 나 단둘이 있던 어느 날. 저녁 준비로 바쁜 엄마를 돕겠다며 혼자 목욕을 하러 사람 한 명 들어서기도 힘들 만큼의 작은 욕실로 들어갔었다.
일곱 살이 그렇듯 서투르고 어설프게 열심히 한참 씻고 있던 그때 갑자기 정전이 되었는지 욕실 안 불이 꺼지고 말았다.
갑자기 불이 꺼지자 일순간 암흑천지가 된 욕실은 어둠 그 자체였고 발 밑 어딘가에 있었을 세숫대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던 상태라 나갈 수도 없고 몸을 씻자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냥 그렇게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잠시 후 밖에서 낯익고도 어쩐지 싫은 그 끽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끽끽 할아버지와 엄마의 싸우는 듯한 목소리. 정확히 말하자면 고함에 가까운 고성을 지르던 끽끽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죄송하다"를 반복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정도 대화 내용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 어려운 형편에 두 달 밀린 월세를 받지 못한 끽끽 할아버지가
말도 없이
전기 차단기를 내려버린 것이었다.
불이 꺼진 이유는 정전이 아닌 밀린 월세 때문이었다.
비누가 묻은 채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어린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 끽끽 할아버지가 내지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엄마를 부르며 목놓아 한참을 울었다.
일곱 살이란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기에 그리 적은 나이가 아니었나 보다.
많은 시간과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날의 기억은 내 머릿속, 가슴속 깊숙한 곳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둠을 무서워하는 난 어쩌면 아직도 일곱 살 그때의
내가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시절의 아프고 시리고 씁쓸했던 기억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저
태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지독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도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기억 역시도 내 인생의 한 조각이다.
가슴 깊
숙한 곳에
그 날의 기억을 간직한 채 여전히 혼자 있는 것도 어두운 곳도 싫어하는 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난 때론 웃으며 때론 울기도 하며
오늘 하루를 그렇게
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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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추억
공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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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행복하게
07
난 왼손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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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
09
울리지 않는 전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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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억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소소하지만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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