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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Jun 22. 2015

슬픔이여, 안녕

해를 넘겨서야 겨우 내보낼 수 있었던 온갖 '픔'에 대한 단상


슬픔은 언제부터 슬픔이었는지, 아픔은 언제부터 아픔이었는지,

고달픔은, 서글픔은, 그 모든 '픔'들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궁금했다.

생각건대 '-픔',  '-프다'라는 말은 정서적 또는 신체적으로 어딘가에 상당히 주려 있는 상태를 통칭하는 말이다.

심지어 그 굶주린 상태마저 '배고픔'이라 부르니까.


앞에 열거한 '슬픔', '아픔', '고달픔', '서글픔'이란 단어만 보더라도 어느 하나 행복하고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다. 애초에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만들어질 때부터 절여질 대로 절여진 비통한 마음에만 '-픔'을 붙이게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하길 원할 때 쓰는 비슷한 말인 '-싶다' 마저 '-프다'로 바꿔 써버리면 그 간절함이 한결 절박하게 들린다.

'보고 싶다'는 말을 '보고프다'로 바꿔 말하면 상사병에 풀 죽은 청년의 눈물 가득 괸 눈동자가 떠오르고,

'가고 싶다'는 말을 '가고프다'로 바꿔 말하면 엄마 치맛단을 잡아당기며 허락과 동조를 구하는 어린 아이의 간절한 표정이 떠오르고,

'울고 싶다'는 말을 '울고프다'로 바꿔 말하면 우는 것 말곤 달리 어쩔 도리를 찾지 못하는 어른 아이의 무너져내릴 것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마주 앉은 누군가의 온갖 '-픔'을 가늠해보자면 대놓고 바라볼 수도 없고, 시선을 거둘 수도 없이 마음이 짠해지고 만다.




이렇게 '픔'에 대해 주절주절 말을 하기까지 한참을 마음속에 '픔'들을 담고 있었다.

뱉을래야 뱉을 용기가 안 나서 그저 그렇게 응어리로 가지고 있었다.

이젠 다른 얘기들을 해야지.

아픔이여, 애달픔이여, 고달픔이여, 구슬픔이여,

그리고 슬픔이여,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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