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말

불릴 이름 위에 머무는 인연

by 화몽


초록 그늘이 노을빛으로 물든다. 솟아오르던 그림자가 스르륵 누워 드리운다. 생경하다. 그러나 따스하게 겹쳐진다.


“또각또각”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구두가 삐걱거린다. 낯설게 다가오는 바람엔 가을이 묻어있다. 뾰족한 정류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다음에 올 버스는 그때로 돌아갈 버스입니다.’ 전광판의 문구는 내 기억 속을 더듬어 글자들은 만든다. 손가락으로 추억을 옮겨 써본다.

‘그때로 돌아갈 버스의 도착 시간은 08분 남았습니다. 이 버스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그래 마지막이다.


왜 하필, 오늘인 걸까?

운명이라 부르기엔 까끌하고 필연이라 하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일까, 가을은 늘 나를 서성이게 한다.


왜 하필, 가을의 하늘일까?

내리 꽂는 햇살을 피해 달려온 지난 계절이 버거웠었나?


내게만 그랬을 리 없는데. 아직도 목뒤를 따라 흐르는 땀은 나를 지치게 만든다. 낙엽 지듯 조용히 가렴.

바람처럼 스쳐갈 오늘아. 오늘의 나는 초침을 따라 거슬러 걷는다. 그렇게 드리워진 살구빛 거리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너와의 그때가 떠오른다.


반백년 살아오며 알게 된 것들, 양말은 짝을 맞춰 벗어놓아야 된다.

짝을 만나야 온전해지는 삶처럼, 유리컵보다 머그컵이 안고 있는 온기가 오래간다.

두툼한 마음을 전하는 우리같이. 늘 서툴다.

매년 들뜬 맘으로 마련하지만 넘어갈수록 공백이 커지는 다이어리처럼.

다음으로 미뤄둔 과자는 눅눅해진 미련만 남긴다.

휴… 한 숨간은 이렇게.

기다릴 땐 안 오고 빠진 목에 화장실에 들어가면 울리는 전화벨소리.

편한 신발이 최고다. 관계도 그렇고…

500원 할인보다 따스함이 더 소중한 텀블러.

치워도 치워도 어디선가 다시 오는 먼지처럼, 삶은 76프로 충전된 핸드폰 같다.

이렇게 버스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익숙한 거리가 내 시선에서 겉도는 것처럼.


그녀와의 인연은 10여 년 이어졌다. 같은 아파트 한 라인의 3층과 13층. 아이들의 나이도 같았다. 5여 년의 중국, 남경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에서 만난 그녀는 두 살 아래였다. 내 손을 꼭 잡은 두 아이 들을 동네의 가로수만큼 훌쩍 자랐다. 살아내던 곳으로 돌아왔건만 모든 게 새로웠다. 그런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줬던 그녀가 그리웠다. 목화솜 빛의 얼굴에 초승달이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언니, 나랑 같이 가요.” 수년간 내게 가장 긴 여운이 담긴 그녀의 한마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다시 나섰다. 덕분에 드리워진 암막커튼을 걷어내고 가을햇살을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함께 새로운 배움의 길을 떠났다. 젊은 시절 우리는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일상 속에서 꿈은 지워져 갔다. 공감과 동감의 그 어디쯤에서 만났던 나와 그녀. 꿈이 있던 그때의 내 이름으로 나를 불러줬던 그녀. 내 곁에 촛불을 놓아준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때로 돌아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있다. 세상의 잣대로 긁히고 잘려나간 모서리에서 생각 상처는 꿈꾸는 내가 안을 수 있다. 이번 생만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만 녹녹지 않네. 그럼에도 기억되는 것들로 별을 따라 그려본다. 나를 가리키는 별자리를 눈으로 따라간다. 사라져 가는 반짝임에 기대어보는 가을의 한밤, ‘찌르르르. 찌르르르…’ 촘촘히 새겨지는 소리를 따라간다. 이 가을의 낙엽 속에서 당신이 주워줄 그 인사. 붉은 뺨이 건네는 안녕일까? 종알종알 흩뿌리는 노란 손짓일까? 알록달록 무지개를 따라 걷는 평온함일까? 바람결에 코끝에 건네는 커피색 안부일까? 사박사박, 황톳빛 흙길에 남겨진 수줍은 잘 가… 당신과의 소곤거림은 촘촘히 널려 있는 반짝임으로 맺힌다. 이 밤, 우리의 시간은 흐르고 너는 나를 부를 말을 찾는다. 높다란 벽을 허물어 그 안에 숨어있는 말. 때가 되면 자연스레 다가올 내 이름이 곁에 머문다.


가을의 꽃잎들이 흩날릴 때, 그 그림자로 기억될 이름. 계절이 넘어가 눈처럼 사라질 흔적이지만. 흙밭을 굴러다닐 시간의 껍질이 아닌 흙밭아래에 숨겨진 씨앗으로 나를 찾아줘.

이름을 불러봐. 기다리다 이 길의 끝으로 향한다. 계절이 지는 곳으로. 오늘이 넘어가는 곳에서 미지의 창문에 기댄다. 계절의 모서리에서 우린 손을 잡는다. 흑연의 마음을 빌어 꾹꾹 누르며 적어 내려 갔던 우리 꿈을 다시 떠올려. 아삭 영근 열매는 떨어질 때 더 아프다. 고개 숙인 이삭이 더 서럽다. 아파도 웃던 우리는 얼마나 자라 있을까? 다시 만날 그녀처럼 이어질 수많은 이름들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너는 가을을 사랑한다. 마음을 조용히 만드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


“나는 가을을 기억한다. 마음을 아스라이 지우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가을에 스며든다. 마음을 너와 나, 나와 너로 다시 채우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


서로의 짐을 나누고, 미소로 마주해. 안녕, 인사할 그런 가을밤.

수많은 너와 그, 그녀를 다시금 만날 달빛아래서. 너에게 건넬 말을 고른다. 내가 불릴 이름을 그려본다.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을 부른다. 내 이름을 부른다.

네게서 떠나 내게로 올 그 계절이 순간, 읊조린다.

가을의 끝자락에 달려온 이름, 시간은 이제야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노을이 내려앉은 얼굴 위로 스미는 햇살 아. 따스해. 따… 스해. 당신의 내일도 그렇게 물들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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