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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몽 Jul 05. 2020

달빛이 내어놓은 길을 걷다.

2019년 여름의 한가운데, 지리산을 향하며 만난 인연.

"와, 큰일 났다. 쭈니야. 엄마가 대박 실수했어. 핸드폰 충전 케이블을 안 가지고 왔네."

"엄마. 우리 둘만 갈 텐데, 핸드폰으로 길을 찾아야 하잖아. 사람들도 안 다니는 길이라면서?"

"그러게, 어쩌지. 기차역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일단 눈 좀 붙여. 어떻게든 해볼까."

"휴... 내가 잠이 오겠어? "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땡그라니 뜨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 이 일을 어쩌나. 쩌렁쩌렁한 울음으로 엄마 배를 박차고 세상에 나와 처음 가보는 곳, 나와 아이가 꿈에도 그리던 곳. '지리산'. 그곳을 가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준비를 했다. 수많은 블로그를 긁어와서 프린트해 밑줄을 치고 메모하면서 꼼꼼히 챙겼다. 일박 이일 동안 50km가 넘는 산길을 가야 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하다는 지리산의 수많은 봉오리를 오르락내리락해야 했기에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그러했음에도 구멍은 터지고 말았다. 아이에게 눈가리개를 씌워놓고 재빨리 일어났다. 덜컹거리는 한밤의 무궁화 속을 총총거리며 사람들의 손끝을 살폈다. 대여섯 명을 오가며 몇몇 분께 부탁했지만 케이블을 팔 수 없다는 암담한 대답만 돌아왔다. 작은 실수로 모든 계획이 꼬여버렸다. 기차 안 작전을 포기해야 하나? 이동 동선을 이제라도 바꿔? 그래도 한두 명에게만 더 부탁을 드려보자며 창피함에 벌게진 얼굴을 모자로 꾹 누르며 젊은 남녀에게 물었다.


"제가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지리산으로 올라가야 해서요... 핸드폰 케이블 저에게 파시면 안 될까요? 아들과 둘이 와서 충전하지 못하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오빠라 부르며 툭툭 친다.

'아, 또 틀렸나? 저분들은 내리면 살 수 있을 텐데... 정말 너무들 해.. 나 같으면….'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건너편에 앉아 계셨던 어르신이 내쪽을 바라보시며 조용히 말씀을 하셨다.

" **야, 이분께 얼른 드려, 내리면 아빠가 구해줄게. "

"아, 네 여기 가져가세요. 저희는 내려서 사면되죠. 쓰던 건데 그냥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드리고 싶어요. 지금 제게 너무...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드님과 산행 잘 마치시고요. 아드님이 기다리겠어요. 어서 가보세요. "


흥부네 마당, 다리가 부러진 까치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을까? 고마운 마음에 코가 기차 바닥에 닿을 만큼 여러 번 인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차. 의자 위로 아이의 뒤통수가 보일 때서야 연락처라도 물어볼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돌아서기엔 타이밍이 늦었다는 생각에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분들의 여행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속으로 기원해드리는 수밖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이가 눈가리개를 들며 눈으로 물어본다. 케이블을 흔들며 다시 잠을 청하라 전하고 나 역시 두 눈을 감았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못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리가 하차해야 할 구례구역은 잠시 멈추는 곳이다. 한 시간 남짓 자는 둥 마는 둥 꿈과 차창 밖 어둠을 오갔다. 곧 구례구임을 알리자 여기저기에서 짐 덩이들이 들쭉날쭉했다. 지리산이 주는 거대함에 맞닿은 크기의 배낭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배낭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배낭이 곧 짐이요. 걸음의 무게다. 최소로 한 탓에 그 중한 케이블도 집에 놓고 왔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감사한 인연 덕분에 무당벌레 날개만 한 배낭 하나씩을 메고 내렸다. 7월 말의 남도, 생애 처음 오는 곳 다시 생각해 봐도 겁도 없다. 나란 사람. 눈앞에서 손짓하는 택시에 얼른 올라탔다. 벌써 3시다. 시간이 없었다. 어서 산을 올라야 했다.


"아저씨 화엄사로 가주세요. "

"아.. 화엄사요? 힘들 텐데. 거기로 오르면. 지리산에 자주 와요? "

"아뇨. 처음이에요. "

"어디로 내려가려고요? 산장은 예약했죠? "

"대원사요. 네, 예약했어요. "

"처음이라면서, 화엄사로 올라가 대원사로 내려온다고요? "

택시기사는 휙 뒤를 돌아봐 우리 둘을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이내 자동차 콘솔박스를 열어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내게 전했다.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세요. 지리산 아름답지만, 위험한 곳이에요. "

"네... "

손에 만지작거려지는 모서리가 까맣게 모지라진 명함에 벙어리장갑을 낀 듯 따뜻했다.

"아직 많이 어두워서 안 보일 거예요. 여기서 올라가면 됩니다. 안전 산행하세요.”


우리는 산을 오를 준비를 서둘렀다. 기차역에 내린 그 많은 사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택시가 휑하니 사라지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첩첩산중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입 앞에 아이와 나 단둘뿐이었다. 헤드랜턴을 머리에 끼고 스위치를 올리자 그나마 발밑은 보였다. 덜컥 이 끝없는 어둠에 겁이 났다.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가자. 올라가자. "

사방으로 뻗어있는 너른 땅 위에 아이와 나 둘만 존재하는듯했다. 랜턴의 빛이 앞을 밝혀주었지만, 마음의 두려움을 비춰주지 못했다. 잠시 귀가 먹먹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 걷자 숨이 차올랐다. 조금씩 주변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의 소리에 산 아래를 향하는 물소리가 졸졸 들려왔다. 크게 한번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지리산. 그 태초의 숲 속임을 온전히 알 수 있었다. 잠시 멈추고 아이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오지 않을 시공간. 달과 잔별들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는 검푸른 캔버스를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달무리 속 은근히 차오르는 취기에 두려움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달빛이 우리를 조용히 이끌어주었다. 여전히 칠흑의 어둠 속이었지만 우리의 걸음에는 은빛 조명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하늘 지붕 아래 늘어져있는 초록 손바닥 사이로 동살이 조금씩 드리웠다. 하늘빛을 향해 오르다 보니 너른 바위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노부부가 보였다. 감사함을 얻으면 보은해야 한다는 생각이 맘 한편에 들었다. 지난밤 내게 선뜻 충전 케이블을 내주었던 가족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다리에 작은 생채기가 생기고 찌릿 저리는 통에 오를 수가 없어 잠시 쉼을 청하고 계시다 하셨다. 가방에서 약을 꺼내 발라 드리고, 근육통 스프레이를 뿌려드렸다. 노고단에서 내려가신다 해도 그 길이 꽤 길 터. 혹시 몰라 근육통 약을 2개를 챙겨 와 하나를 쓰시라 내어드렸다. 그제야 두 분 얼굴에 홍조가 뛰었다. 할머니께서 조심히 산행하라며 초코바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아이에게 주셨다.


깊이 엮여야만 소중한 연이라 할 수 있을까? 인연이라는 것은 그리 멀리만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스치듯 안녕이라는 말처럼 살며 이들을 다시 만날 연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꺼이 나누고 위해주는 작은 마음은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되어 누군가와 엮일듯하다. 구름에 가려져 수줍게 우리를 이끌어주던 달빛처럼. 고요히 앞서니 뒤서니 하며 삶이란 긴 여정에 우리를 응원해 줌이 느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되었다. 빽빽하게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초록의 물결 사이로 찬란한 새 빛이 비쳤다. 열 걸음쯤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아이가 순간 앞질러 올랐다. 또래보다 마른 아이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단단해 보였다. 노부부가 건네주신 초코바를 물어뜯은 아이도 그 인연의 끈을 알게 될까? 깊은 산과 달빛이 선물한 시간, 쭈니의 생각의 키는  뼘쯤 자랐고 마음속 근력도 한주먹만큼 묵직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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